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인도에서 지내는 내내 날 미치게 했던 그 클라이언트와의 기 싸움은 한국에 와서도 진행되었고, 결국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실수를 단 하나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이미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합의한 내용조차도 모두 잊고, 일방적으로 모든 과정을 초기화해버린 상태랄까. 대신 내가 기 싸움 중에 드러낸 허점을(사실 의도적으로 쓴 수였지만) 빌미 삼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는 '넌 에이전시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프리랜서이니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는 논리로 웃기는 소리를 해댔다. 늘 사람 좋은 말투와 톤으로 일관하며, 내 생활 패턴과 작업 방식을 이해한다고, 멋지네, 부럽네, 굳이 할 필요 없는 말까지 해가며, 세상에서 제일 관대하고 유연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인 양 굴었던 그는, 지독한 위선자였다.
결사 항전을 외치며 며칠 울며불며 이를 갈았지만, 결국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아주 쿨한 사람처럼 마지막 이메일에 '행운을 빈다'고까지 썼다. 진심으로 행운을 빌었을 리가! 도대체 그 말을 왜 썼을까!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한 것은 아니고, 그냥 자기만족이랄까. 그래, 저주를 퍼붓는 것보다는 행운을 빌어주는 것이 멋져 보일 거야...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처음부터 끝까지 그 위선자가 그렸던 빅픽처라면 너무 속상해지니까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친구들도, 엄마도 다 빅픽처였다고 말하지만... 끝까지 싸우지 않은 것을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겠지. 그래서 그가 어떻게 사업을 지속해나가는지 끝까지 지켜보려고 한다. 그때는 그 위선자가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도록 결코 그냥 두지는 않을 거다.
위선자 하니까 떠오른 기억인데. 티베트를 지지하는 모임에서 활동할 때의 일이다. 우리는 영화제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영화제를 후원하고 싶다고 먼저 연락을 해왔다. 재단에서 받은 지원금으로 꾸역꾸역 일을 꾸려나가고 있던 우리에게 자발적 후원자는 더없이 반가운 존재였다. 나는 그와 그의 비서라는 사람을 두 차례 만났는데, 중국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 외에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후원과 관련해서 모든 것을 익명으로 처리해달라고 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나. 그냥 마음으로 열렬히 티베트를 지지하는 사람이겠거니 했지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만남에서 그는 50만 원이 든 흰 봉투를 내게 건넸고, 며칠 뒤 지인들을 영화제에 초청하고 싶다며 영화제 초대권을 요청했다. 관객이 많이 들면 나쁠 것도 없었기에 우리는 흔쾌히 그렇게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남대문 경찰서 외사과에서 전화가 왔다. 그 전화를 받았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중국대사관으로부터 신고가 들어왔다고, 발신인이 '중국대사관'으로 되어있는 영화제 초대권이 한국에 있는 각종 중국 관련 기관 및 단체에 보내졌다고 했다. 담당 경찰은 공공기관 사칭 운운하며 내게 조사를 받아야 하니 경찰서로 출석하라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찰서에 가보았다. 혼자서는 무서워서 같이 활동하던 친구와 함께 갔다. 입구에서 신분증을 맡기고 내 신분을 밝히는 네임택을 목에 걸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불평 가득한 얼굴로 쉴 새 없이 구시렁 거리는 영화 속 경찰들이 오르내리던 그 계단과 똑 닮아 있었다. 외사과 사무실 안에 들어가니 한 남자가 '베트남 김 사장'과 '찜질방'에 갔다는 이야기를 목청 높여서 떠들고 있었다. 이 부분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게 좀 웃겼기 때문이다. 나는 그 와중에 친구와 눈빛을 교환하고 좀 키득거렸다.
담당 경찰은 먼저 영화제 초대권을 내게 보여줬다. 틀림없이 내가 그 후원인에게 보낸 것이었다. 그가 영화제를 위해 후원을 했으며, 지인을 초대하고 싶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초대권을 주었다, 그와 우리의 관계는 딱 이만큼이다, 라고 나는 말했다. 경찰은 소인이 광화문 우체국이었기에 광화문 우체국 CCTV 영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했다. 내게 영상을 보여줬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커다란 벙거지를 쓴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나와 접촉했던 그 사람의 얼굴이 맞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다음엔 그의 연락처를 말하라고 했다. 나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경찰은 내가 앞으로 곤란해질 수 있다며 약간의 협박을 했는데, 아니 도대체 내가 곤란해질 일은 또 뭔가.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우리는 어쨌든 그의 신상을 경찰에 밝혀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버티다가 조사는 끝났다.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경찰이 그의 정체를 스스로 밝혀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한국을 떠났다. 그는 나와 우리 모두를 이용해서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었다. 50만 원의 후원금을 냈으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우리는 훗날 그가 파룬궁 소속이었을 것이라 추측했고, 그렇게 추측한 증거가 있었는데 그게 뭐였는지도 까먹었다. 지금 이 일을 떠올리며 내 기억력을 심각하게 걱정하는 중이다. 아무튼, 반중국 시위를 하며 한국 사회에서 결코 고운 시선을 받지 못하던 그들이 후원금이랍시고 몇 푼 쥐여주고는 결국 우리의 목소리를 빌려 중국대사관을 엿 먹이려 했던, 뭐 그런 음흉한 시도? 써놓고 나니 이건 위선도 아닌 사기에 가깝지 않나. 저 그때 경찰서 가면서 참 무서웠어요. 잘 계시죠?
위선을 할 바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조금 더 과격하게는, 대놓고 못된 짓을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것 같다.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비슷한 이유로, 아직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 그래서 비교적 자연 친화적인 삶을 여전히 이어나가고 있는 나라, 그래서 가난한 나라에, 고도의 산업화를 이룬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생태주의자들이 가서 자발적 가난과 고립을 택하여 살며 생태주의를 말하는 모습을 아주 눈꼴시어서 봐줄 수가 없다.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 정전이 일상인 라다크에서, 왜 하필 그곳에서, 유럽의 생태주의자들이 태양열 발전 설비를 보급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라다크 친구들이 국회의원을 뽑을 때마다 '전기 문제'에 대한 공약을 유심히 살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은 멋진 곳에 놀러 가서 좋은 거 다 해놓고, 맛있는 거 다 먹어놓고, 나중에 온 애들한테 '야, 여기 별거 없어, 그냥 너희 동네 가서 놀자!' 하는 느낌이랄까. 어떤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나든 그것은 그들 스스로에 의해 그들 삶 속에서 진행될 일이다. 개발과 변화를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마지막 남은 샹그릴라' 운운하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 역시 일종의 위선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나도 자주 안타까워 한다. 감정은 감정이니까. 뭘 하든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먼저 증명할 수 있기를. 내 삶을 근거로 삼아서.
그래서, 스팀시티의 첫 오프라인 프로젝트는...
한바탕 와다다다 늘어놓고 나니 좀 후련해졌어요. 이어서 여러분께 중간보고를 올립니다. (돌연) 스팀시티 오프라인 플랫폼을 제가 꾸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주 미스터리한 글로 전해드리고서는 너무 깜깜무소식이었죠? 재미있고 신나는 이야기를 할 건데, 앞에 이렇게 온갖 답답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니... 어쩐지 죄송해집니다. 위선자 클라이언트 때문에 좀 지독한 나날들을 보냈는데, 그렇게 화가 날 때마다 적어둔 글들이 이렇게나 쌓여버렸어요. 이제는 모든 것이 정리되었기 때문에, 이걸 어서 포스팅해야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마치 짠 것을 먹으면 단것이 먹고 싶은 것처럼요. 이건 아닌가...
아무튼, 스팀시티 오프라인 첫 프로젝트가 될 플리마켓 + 전시회 + 상영회 + 공연 + 중계방송 + 파티, 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두둥!
장소와 날짜는 정해진 상태고요. 대충의 그림만 나와있고, 지금은 팀을 꾸리는 중입니다. 아! 오늘 그 장소를 보여드리기 위해 사진을 찍어오려고 했는데, 또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네요... 할 일이 너무 산더미 같은데!
6월 초가 되면 정식으로 공지를 하고, 이 모든 것들을 위해 기꺼이 힘을 보태주실 STAFF도 모집하고요, 플리마켓을 빛내주실 셀러도 모집하고요, 전시할 작품을 모셔오기 위해 kr-art 커뮤니티에도 슬금슬금 연락을 드리고요, 공연을 위한 섭외도 진행하고요, 각종 홍보물 및 MD도 제작하고요, 홍보를 위한 포스팅도 부지런히 하고요, 보도자료도 작성하고,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홍보도 할 거랍니다. 혼자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지금 몇몇 분들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옆구리를 찌르는 중이에요. 이미 차오르는 관심을 억누를 수 없는 분은 언제든 제 손을 잡아주셔요! 깍지도 낍시다!
스팀잇을 하면서 펜클럽 일기 공모전에 참여한 것 외에 다른 이벤트나 공모전에 참여해 본 적이 없는데요. 문득, 매번 하소연을 늘어놓고 있는 것 같아, 주절주절 구시렁구시렁 가득한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졌어요! 지금 방금요. 이벤트 내용도 싱글벙글하며 막 생각해냈고요.
제가 올린 사진 속 도시는 제가 두 번째로 사랑하는 도시인데요. 사진 속 도시의 이름과 제가 첫 번째로 사랑하는 도시의 이름을 차례대로 댓글에 적어주셔요. 제일 먼저 둘 다 맞추신 분에게, 제가 이번에 인도에서 사온 것들 중에 선물이 될 만한 의미있는 무언가를 드릴게요! 뭐가 될지는 저도 아직 모르겠지만... 정답에 대한 힌트는 스팀잇 어딘가에 있습니다... 후후...
어머!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