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라면서 그것의 침입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기표와 기의를 잇는 인간의 사회화, 또는 상징화가 꼭 단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틈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말이 어떤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관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옳다고 일종의 세뇌에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한번쯤 자신이 믿고 있던 신념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제겐 프로이트와 니체, 다윈을 만날 때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통찰이 흔들림을 갖기 위해서는 '정서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기존에 자신이 믿어왔던 것들이 흔들리는 그런 실존적인 체험과 자신의 충동과 방어기제에 대한 통렬한 통과가 있어야 합니다. 이건 이성적 의식판단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들이 흔들리면 일단 인식적으로 기표와 기의가 분리됩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언어는 소리와 의미가 분리됩니다. 의미를 당연히 가졌던 소리는 그냥 소리가 됩니다. 그건 꼭 필연적으로 그 의미를 가진 게 아니게 됩니다. 의미라는 것은 그 소리에 붙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흔들릴 때는 멍함을 경험합니다.
이런 멍함은 멍때리고 차원의 멍함이 아닙니다. 정신분열의 경계까기 가는 멍때림이기 때문입니다. 뇌에 단단하게 아교로 붙어 있던 의미와 소리가 분리되는 그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를 경험하고 나면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라는 것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휘둘리다가도 중심이 잡힌다는 뜻입니다. 뇌의 중심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몸의 중심이 잡히는 그런 중용의 상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사회는 명리적으로 말하면 식신생재입니다. 자기를 표현하고 말을 통해서, 정보를 통해서 재물을 만들어 내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 재물을 취하고 그 재물에 중독되길 원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소비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시대.
그러나 명리학은 식신생재에서 관인상생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관은 밖으로 향했던 눈이 안으로 들어오길 손짓하는 것입니다. 때론 회초리가 될 수 있습니다. 관이라고 하는 조직, 규율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관을 쓰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그것을 외부 조직의 위계로 잡지 말고 자기 규율로 잡길 바랍니다. 그럼 그것이 체득되고 깊어져서, 즉 관이 인(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중용이라는 중심이 몸에 생깁니다.
개운이란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상징계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편향이기 때문입니다. 중용이란 익숙한 상징계의 욕망에서 낯선 욕망을 받아들이고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