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포함해서 적지 않은 분들이 스트레스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는 조금 더 생각해보면 저를 불편하게 한 외부의 사건이었다기보다는 그것을 불편하게 여겼던 어떤 특성이 제 안에 있고, 그래서 어쩌면 그 특성이 그 외부의 사건을 스트레스로 지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보통 이런 특성들의 총화를 우린 성격이라고 말하는 것같습니다. 호불호를 느낄 사안은 세상에 널려있으니 한 사람의 성격도 매우 다양할 수 밖에 없구요.
호불호란 감각 대상을 중추가 파악한 순간, 우리가 갖는 감정입니다. 주관적 가치판단이죠. 그러니까 나름의 정교하고 복잡한 가치 판단들의 총화가 바로 성격일 듯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고 꿰뚫는 한가지 기준은 있을 수 없으니 사람의 성격에는 매우 상이한 요소들이 함께합니다. 해서 일정 부분을 넘어서 누군가의 행동을 예측하는데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여하간 그래서 스트레스는 잘 살펴보면 그것의 원상인 제 것을 보는데 도움이 됩니다. 스트레스라 여겼던 것들은 제가 갖고있던 원상이 그 곳에 비춰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투사라고 하지요. 거울에 비춰봐야 제 모습이 보이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보인 제 원상들을 우리는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해의 깊이를 더 하기위한 것이지 본래 그렇게 나눠져 있었다고 할 순 없구요. 거기에는 persona라고 하는 것도 있고 그것과 대비한 그림자가 있습니다. 페르소나도 일부는 무의식에 있지만 그림자는 전적으로 무의식 안에 있다 보니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무의식 안에는 이것들 말고도 더 엄청난 것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엄청난 것들은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라고 여기는 것들의 원상 중 페르소나와 그림자 정도만 적어볼까 합니다.
우린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호모사피엔스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사유하고 협동하는. 사막에서의 수행이 어려운 이유는 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이 부족한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묵언이 수행의 한 방편인 이유도 언어를 통한 소통이 막힌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인류가 살아온 이래 어느 때보다 평판이 중요해진 것도, 네트워크의 세상이 된 것도 어느 정도는 그때문 아닌가싶습니다.
여튼 그래서 우린 저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세상(처음에 대개는 부모)과 일정 부분 타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눈치를 본다고 할까요. 하지만 타고난 내가 갖고 나온 것도 마냥 포기할 수만은 없으니, 그 절묘한 타협점을 만들어갑니다. 그것을 페르소나라고 합니다. 태어난 시점, 혹은 태내에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것이기도 하고 살면서 겪은 것들을 전부 기억할 수도 없으니 많은 부분은 무의식에 잠겨있을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과 '나(ego)' 사이에 드러나는 무엇입니다.
하지만 이때 페르소나로 통합될 수 없는 어떤 부분들은 그 드러난 부분의 뒷면이 됩니다. 해를 보고 섰을 때 등 뒤로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되는 거지요. 그 부분은 무의식으로 숨겨지고 그래서 무의식의 표층이 됩니다. 그리고 사실 표층 밑에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던 것들과 태어나고 퇴적된 엄청난 것들이 있습니다. 아직은 그것들을 적을만한 능력이 부족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번 글에서 드리고픈 말씀은 사실 지금부터입니다. 대개 저를 포함한 우리의 삶이 상당 부분 페르소나 지향적이란 것이죠.
또 글이 길어집니다. 나름 실수를 해서 웃음거리는 되고싶지 않다는 제 페르소나 덕입니다. 그래서 잘 난척을 하고싶은 제 그림자가 하는 짓입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아직 알지 못 하는 제 페르소나와 그림자는 이 글을 쓰는 곳곳에서 비록 제 눈에는 띄지 않지만 님들 눈에는 들보처럼 확연히 보일겁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관심을 갖고 보실 수도 있고 그나마 제게는 조금의 겸손을 덧 칠 한 제 생각이라 적습니다.
정작 적고싶은 페르소나와 그림자 간의 균형 이야기는 다음에 적는 것으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