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이야기다. 일기장이 한국에 있어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아마도 출발한 지 사흘쯤 되던 날이다. 길을 떠나기 5시간 전까지만 해도 주방에서 10시간 넘도록 서서 일하던 나는 약 780km 의 순례길을 완주한 29일동안 발바닥에 물집 한 번 생기지 않았지만, 이놈의 퇴행성관절염이 문제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 에릭, 아이터, 프란체스카와 함께 길을 나섰다. 무릎은 첫날부터 말썽이어서 이미 무릎보호대에 테이프까지 떡칠을 한 상태였다. 이탈리아에서 온 프란체스카도 무릎이 아파 스틱(지팡이) 두자루로 힘을 보태 걷고 있었는데, 몇 번이나 나에게 그 중 한자루를 내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니야, 난 괜찮아!, 괜히 더 센 척을 하며 거절했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였는 지, 그저 덜 아팠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태양을 향해 방긋방긋 웃기만 할 줄 알았던 해바라기들은 시들어 풀이 죽은 듯 땅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해바라기 밭, 넓은 들판을 지나 이제는 언덕길을 올라야만 할 때. 남들처럼 10kg 짜리 배낭은 아니지만 내 몸무게와 배낭의 무게를 더한 값에 오르막을 오르고 있으니 무릎에 무리가 갔다. 안 그래도 20대 중반부터 가만 서있기만 해도 무릎이 욱신거리는 퇴행성관절염을 갖고 살았기에, 그나마 걸을 수 있을 때 순례길을 떠나야 겠다 생각한 것인데..
굳이 발걸음을 맞추지 않고 각자의 속도대로 걷다가 한 곳에서 만나길 반복한 우리는 어느새 함께 언덕 위에 올랐다. 아, 내가 해냈다! 우리가 드디어 이 언덕에 서서 이 유명한 조형물을 보고 있어! 이미 수백년 전에 이 길을 걸었던 순례자들의 모습을 남긴 조형물 앞에서서 사진을 찍고 행복에 겨워 잠시 쉬고 있다가 이제는 언덕을 내려가는데... 아뿔싸! 내려갈 수가 없다. 하마터면 돌과 흙무더기 위에서 구르기라도 할 뻔 했다. 무릎이 제대로 고장이 나고 만 것이다.
스프링, 괜찮아?, 나는 또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일행더러 먼저 내려가라고 한다. 사진을 좀 찍으면서 천천히 가겠다고. 개뿔, 이날 이 언덕을 하산할 때 찍은 사진은 단 한장도 없다. 돌 계단 아래로 발을 디딜 때마다 전해오는 고통에 입술을 깨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주제에 센척은! 나보다 출발을 늦게 했든, 속도가 느렸든 간에 내 뒤에 걸어오던 순례자 수십명이 이미 나를 앞선 지 한참이다. 나는 그렇게 돌무더기 내리막길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서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어느새 언덕 위에 나홀로 남겨졌다. 절뚝절뚝 거리면서, 한 걸음에 한 박자 쉬고 또 한 걸음에 두 박자 쉬고 있다가 이내 모든 게 바보같아졌다. 나는 왜 일행들에게 괜찮다고 허세를 부렸는가? 어째서 나를 앞서는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가? 한심하고 외롭고 서러워져서, 딱 한마디했는데 떠들었다고 벌받는 어린아이처럼 입이 지멋대로 씰룩댄다. 까맣게 타서는 고개를 떨군 모습이 마치 아까 지나온 시들어버린 해바라기와 같았다. 그 순간...
맞은 편에서 누가 올라온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녀가 나를 발견한다. 가까워 온다. 나를 향해 두 손을 활짝 벌린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안았다!! 어미가 아기새를 품듯이 그렇게 나를 꼬옥 안아 주었다. 너를 만나서 너무 반가워. 나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우리는 처음 본 사인데? 괜찮아, 잘하고 있어. 내 씰룩대는 표정을 읽은 것인지 그녀가 활짝 웃는다. 나 혼자 아무리 괜찮다고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는데, 그녀가 괜찮다고 하니 정말 괜찮다. 겨우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뚝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우리들의 목적지 산티아고 대성당에서부터 거꾸로 길을 걷는 중이라고 했다. 나를 보는 순간, 그냥 너무나 기뻤다고 했다. 그녀에게 잠시 알던 한국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 생각도 났더란다. 사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그게 다였다. 시간이 더 늦기 전에 그녀도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위해 멈춰섰고, 나를 안아주었고, 나를 향해 활짝 웃어준 후에야, 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고 나에게 마법같은 일이 일어났다. 발걸음이 부쩍 가벼워진 것이다. 이 정도면 내려갈 수 있겠는데? 무슨 힘을 얻었는지 조금씩 더 자주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어느새 돌무더기 내리막길을 지나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평평한 내리막길을 쉴 새 없이 걷다보니 스프링! 하고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에릭, 아이터, 프란체스카가 신이 나서 손을 흔든다. 길가의 노천 카페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 밖에도 나를 앞섰던 많은 이들이 그 곳에서 앉아 쉬고 있었다.
내가 좀 늦었지? 머리를 긁적이는데 맥주 한 잔 하고 있었어! 유쾌하게 대답한다. 이미 두 잔씩은 마신 것 같다. 뭐 시킬래? 하는데 나 오다가 천사를 만났어. 그런 말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입에서 툭 튀어 나왔다. 응? 뭐 마신다고? 나는 웃으며 콜라 한 잔을 시켰다. 그 날 내가 내려온 언덕 이름은 <용서의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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