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일본에 침탈되어서 넘어가기 전에 있었던,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 중에 하나로 기록된 것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그것도 일본의 낭인들에게 무자비하게 나라의 국모가 시해된 것은 조선인들에게 수치중에서도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수치스러운 사건에서 일본인 낭인들에게 명성황후가 있는 곳을 안내해준 조선인이 있었으니, 바로 우범선이라는 자이다.
우범선, 그는 당시 별기군의 대대장이었는데,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황궁을 지켜야 했던 임무를 가진 자였지만, 오히려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나라를 팔아먹는데 일조를 한 역사적 죄인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보복 당할 것을 두려워한 그는 일본으로 망명을 하고 일본인 여자와 결혼을 하여 살면서, 그곳에서 아들을 하나 낳게된다.
그러나 우범선은 그 아들이 여섯 살 되던 해에, 그가 은신하던 곳을 찾아낸 조선인 자객에게 보복 피살 당하고만다.
어릴 적에 아버지를 잃은 그의 아들은 고된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의 농림성에 취직을 한다. 그러나 창씨 개명과 일본 국적 취득을 강요받지만, 이것을 반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도키이 종묘회사의 농장장으로 직장을 옮기게 된다.
해방 뒤 일본으로부터 채소나 과일의 종자를 수입했던 우리나라는 우범선의 아들이 육종학(종자개발) 전문가 임을 알고 그의 귀국을 추진한다. 그는 자식 및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홀로 한국으로 귀국해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에 취임한다. 그 뒤 제주도 감귤, 강원도 감자, 병충해에 강한 무와 배추의 종자를 개발해 한국 농업의 근대화에 커다란 공을 세운다. 그러자 정부는 그에게 농림부장관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종자개발에만 헌신했다. 농업근대화의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은 그는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는다.
그가 바로 씨없는 수박으로 잘 알려진 우장춘 박사이다.
역사의 인과 법칙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의 아버지 우범선이 저지른 죄값에 대한 인과로, 아들인 우장춘이 아버지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 헌신적 노력을 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한국근대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우장춘박사를 위대한 인물로 탄생시키기 위한 과정으로서 우범선의 그러한 반민족적 행위가 필연적으로 필요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