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티샥을 마시고 서쪽으로, 과거로 (feat. 1Q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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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샥'
'커티샥샥'
'커티샥샥샥'

혀가 말리면서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이 간지럽고 발음이 귀여워 자꾸 ‘샥’을 반복해 말하고 싶어만 진다. 샥샥샥을 반복하다 보니 화려한 깃털 꼬리를 가진 화살이 어디론가 날아가는 이미지가 머리에 둥실 떠오른다.

커티샥. 유명한 술이다. 위스키 입문한 지 어느덧 6개월. 많은 종류의 위스키를 마셨고 그보다 더 많은 위스키의 이름을 듣고 봤지만 내게는 처음 들어보는 술이었다.

“집에 있는 술 아무거나 하나 가져왔어요.”

위즈덤 레이스 서울에 참가한 @peterchung 님이 커티샥 1.75리터를 꺼내시며 수줍게 말했다. 피터님은 이미 준비된 술이 많은 거 같다며 괜히 가져온 건 아닌가 하는 말을 덧붙였고 나는 속으로 ‘아뇨. 아뇨 절대 아닙니다!!!!!. 술이 부족한 건 용서할 수 없지만 넘치는 건 늘 환영입니다. 피터님 만세!’ 라고 격하게 반응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술이 많으면 좋죠.’라고 멋쩍게 말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와 반짝거리는 눈빛은 숨기지 못했다.

밋업이 가장 무르익었을 때 커티샥의 뚜껑을 땄다. 위스키인데도 와인 향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달달한 향이 피어오르며 가벼운 알코올이 찌르르하게 꽂혔다. 처음 보고 처음 냄새를 맡아보는 위스키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맛이 특색이 있거나 개성이 있는 건 아닌데 그도 그럴 것이 커티샥은 무난하기로 유명한 위스키이다. 처음 들어봤다 생각한 이 술은 알고 보니 하루키의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던 술이기도 했다.

바텐더가 메뉴와 물수건을 들고 오자 남자는 메뉴는 볼 것도 없다는 듯 스카치 하이볼을 주문했다. "원하시는 브랜드가 있습니까?"바텐더가 물었다. (중략)

그러더니 남자는 문득 생각난 듯 커티샥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바텐더는 말했다. 나쁘지 않아,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그가 선택한 게 시바스 리걸이나 까다로운 싱글몰트가 아닌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바에서 필요 이상으로 술의 종류에 집착하는 인간은 대개의 경우 성적으로 덤덤하다는 게 아오마메의 개인적인 견해였다. 그 이유는 잘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 1Q84 中

원나잇할 남자를 물색하는 아오마메가 ‘커티샥’을 고른 남자에게 흥미를 가진 건 ‘커티샥’이 까다롭지 않은 술이었기 때문이다. 1920년 대, 영국 본토 스카치 위스키들은 피트 향이 강해 런던의 와인 애호가들에게 크게 호응을 받지 못했다. 이에 프랜시스 베리는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가볍고 부드러운 맛을 좋아하는 미국인, 독하고 무거운 맛의 스카치 위스키를 싫어하는 영국인의 입맛, 둘 다에 맞는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를 개발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커티샥이다. 말하자면 누구나 취향타지 않고 쉽고 가볍게 막 먹을 수 있는 대중적인 술이라는 거다. 스트레이트로 먹어보니 확실히 맛이 순하고 부드럽다. 바닐라 맛이 입안 전체에 감돌고 약간 오일리하면서도 가볍다. 알코올이 세지 않고 목 넘김이 좋아 40도 라는 돗수가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독하지도 개성적이지도 복합적이지도 않은 단순한 맛이라 확실히 싱글몰트 위스키를 먹는 사람은 절대 찾지 않을 맛이기도 하다.

"커티샥을 좋아해요?" 아오마메는 물었다. 남자는 깜짝 놀란 척 그녀를 보았다. 뭘 묻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러고는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아 네. 커티샥." 그는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옛날부터 라벨이 마음에 들어서 자주 마셨어요. 돛단배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배를 좋아하는군요"

무라카미 하루키 1Q84 中

크고 웅장한 커티샥의 몸에는 범선이 그려져 있었다. 미리 준비해놓은 탄산에 커티샥을 섞어 밋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줬다. 커티샥 라벨의 범선을 보며 세계여행을 떠나는 라라님의 여행을 응원하는 축하주로 이만한 술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볼은 만드는 사람에 따라, 제조법에 따라, 위스키에 따라 그 맛이 굉장히 달라진다. 개인적으로 단 걸 싫어하는 나는 탄산와 위스키만을 섞은 하이볼만 먹는데, 그 날은 단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탄산과 토닉워터를 함께 섞은 하이볼도 함께 만들었다. 커티샥은 탄산을 만나 알코올 돗수가 떨어지니 더 부드러워지고 더 가벼워진다. 아일라 지방의 아드벡이나 라프로익의 하이볼이 주는 진한 피트의 강렬함과 시원함 같은 개성은 없지만, 진짜 그냥 부담 없이 몇 잔이고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맛이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을 것 같은 1.75 리터의 위용에 나는 마음 놓고 커티샥 하이볼을 마셔댔다. 남들이 한 두잔 마실 때 그 두 세배는 더 마셨을 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술을 가장 좋아하고, 많이 마시는 사람은 나였기에 1.5리터 정도 남은 커티샥은 내 차지가 되었다.

길은 양쪽으로 뻗어있다. 동쪽은 미래로 가는 길이다. 서쪽은 과거로 가는 길이다. 나는 꽤나 오래 전부터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현재’에 서서 ‘미래’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과거’의 감옥에 갖혀 과거를 보고 웃고, 과거를 보고 울었다. 몸은 앞으로 향해있지만 뒤로 꺾여진 머리는 보기에도 기괴하고 스스로도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경직된 목을 두둑두둑 풀어내고 앞을 바라보기 위해, 과거를 마주하기 위해 과거로 떠나기로 했다. 서쪽으로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길은 바닷길이다.

그는 바닷길이야말로 진정한 길이라고 말했다. 굳은살 하나 없는 말랑말랑한 생살로 된 길이라고도 했다. 먼지가 나지 않는 길. 물고기를 잡으려 물고기를 쫓아다니는 길이니 물고기가 만들어준 길이기도 하다고 했다. 사람이 만든 이때까지의 길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박성원 제주, 익숙하지만 낯선 中

요즘 마구잡이로 읽고 있는 어느 책에서 마치 운명처럼 이런 구절을 만났다. 나는 물을 좋아하고 바다를 좋아한다. 하지만 바닷길 위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해본 적은 없다. 이 여정은 자유롭지만 자유롭지만은 않고, 얽매이지만 얽매이지만은 않을 여정일 것이다. 말랑말랑한 생살 위를 나는 물어뜯지 않고, 조심스럽게 떠다닐 것이다. 그리고 바다는 늘 언제나처럼 흐르고, 깊고, 자유롭겠지..

나는 과거를 헤엄쳐 나가기 위해 서쪽으로 배를 타고 여행을 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정을 하고 돌이켜보니 밋업 날의 커티샥이 떠올랐다. 그리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 피터님이 가져온 커티샥의 범선은 나의 배였다. 그 술을 따라 하이볼을 만든 것도 나였고, 그 술을 가져간 것도 나였고, 그 술에 그려진 범선에 올라탈 사람도 나였다.

커티샥에 그려진 커티샥호는 영국에서 위스키와 맥주, 와인, 차 등을 싣고 상하이를 오가던 배로 1871년 상하이와 런던을 107일 만에 주파한 기록을 갖고 있는 ‘한 때 세계에서 가장 빨랐던 범선’이다. 커티샥호가 술 냄새를 풍기며 오갔던 그 길을 나도 술 냄새를 풍기며 오갈 것이다. 그래서 이 여행의 시작은 상하이이다. 크루즈를 타고 상하이에서 싱가포르로, 싱가포르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미대륙으로 미대륙에서 오세아니아로 지구 한 바퀴를 돌 것이다. 그 여정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두근두근한 마음을 돋우기 위해 커티샥 하이볼을 한잔 타서 마신다.

아, 밍밍하다. 근데 그게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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