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웬 마르크스냐, 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미 패배한 사상을 알아서 뭐하게? 소련은 해체됐고, 중국은 배신했고, 북한은 망해가는 중인데. 마르크스? 공산주의? 당신 빨갱입니까?
공산주의라고 하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으레 북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떠올리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도대체 너는 누구 편이냐?' 고 묻는 저급한 폭력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이런 폭력을 간신히 피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무지라는 더 큰 산을 앞에 두고 한숨을 쉬어야 한다. 내가 대학 시절 겪었던 얘기를 하나 해주겠다.
나는 영화를 공부했다. 친구들과 함께 영화 수업을 들었는데 영화 수업이란 대개 워크숍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에 다양한 토론이 오간다. 특히 시나리오를 발표하는 날은 굉장히 치열하다. 갑론을박, 이야기의 당위성을 방어하기 위해 매서운 말들이 쏟아진다. 어느 날 친한 놈 하나가 시나리오를 발표했다. 내용인즉, 공산주의자 히틀러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그의 죽음에 대해선 음모론이 많다) 주인공이 히틀러와 닮은 한 남자를 납치, 감금해 살해한다는 내용이다. 이 세상에 공산주의가 퍼지는 걸 막기 위해. 한 마디로, 자유를 위해!
이 얘기를 듣고 그 어떤 이질감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듣기 바란다. 나는 친구가 시나리오 낭독을 끝낸 순간 일반적인 대한민국 사람들의 머리 속에 '공산주의=북한=독재=전쟁=학살=나쁜 놈' 이라는 강력한 도식이 형성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민간인 또는 정적을 학살하고 독재를 하면 '공산주의자'인 것이다. 아직도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는가? 히틀러는 나치였다. 극우주의자란 말이다. 공산주의는 극좌, 즉 히틀러 집권 시절 그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적이었다!!
내가 그 얘기를 해주자 친구는 전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히틀러처럼 나쁜 놈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공산주의자란 말인가? 녀석의 멍청한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교수님이 그 점을 정확히 지적해줬음에도 녀석은 수업 내내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봤다. 물론 그 놈은 2차 시나리오 발표 때 내용을 대폭 수정하긴 했다. 녀석은 히틀러가 공산주의자라는 내용을 완전히 삭제했다. 대신 유대인 학살을 이렇게 정의했다. 유대 자본이 세상을 지배하는 걸 막기 위한 과감한 혁명. 자본주의=돈=유대인=물신숭배=사치=향락=IMF=나쁜 것 이라는 도식이 히틀러를 자본으로부터 이 세계를 구원하려 한 순교자로 만든 것이다. 나는 학기 내내 그 놈의 무지를 모욕하고 영화 내용의 오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 놈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놈은 온갖 모욕을 참아내며 끝끝내 영화를 완성한다. 영화는 그 해 중앙대학교 영화제에서 금상을 수상, 100만원의 상금을 받는다. 무지의 심연은 이토록 깊고, 또 어둡다.
하나의 사상이 세상을 통째로 바꿔버렸다. 관념(생각)의 힘은 이토록 놀랍다. 그런데 그 사상의 주인공이 관념보다 실재를 중시했던 유물론자 마르크스라는 사실은 우리를 놀랍게 한다. 어쩌면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 본질에서부터 오해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유물론자'의 '관념'이 세상을 혁명한다. 그 사상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거쳐 교조주의적 정치 강령으로 변했고 정적을 제거하는 명분과 독재의 구실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일부 자본가들이 독점하는 생산 수단을 국유화해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을 막고, 그 생산의 결과물을 모두가 골고루 나눠 가진 뒤, 짧아진 노동 시간으로 생긴 여가를 자기계발과 취미에 투자하는 창발적 사회를 만들길 원했다.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였던 것이다.
그나마 공산주의라는 말이 살아있을 땐 그걸 호환마마 보듯 하더니 막상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나자 사람들은 다시 마르크스를 찾기 시작했다. 아마 한국인의 99%는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가 크게 잘못됐으며 뭔가 대단한 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 세계가 곧 자멸할 것이라 말할 것이다. 끊임없이 오른쪽으로 질주하는 자본에 고삐를 달아 왼쪽으로 끌고올 힘이 필요한 시대. 우리는 우리 스스로 쓰레기통에 버렸던 마르크스를 다시 찾는 중이다.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은 자본론, 공산주의는 커녕 마르크스라는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책이다. 물론 인용문의 번역이 별로라는 점, 또 마르크스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너무 너무 싱거울 수 있다는 건 아쉬운 점이다. 제목 그대로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에 충실한 책. 그러나 책의 두께와 디자인에 대해선 두 엄지를 백번을 치켜세워도 모자랄 정도로 훌륭하다. 이 책은 들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디자인을 갖고 있다.
사상과 철학을 골치아파 하는 사람이라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크게 잘못됐다는 건 쉽게 인지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산건 우리가 처음이 아니었다. 100년 전, 자본주의가 처음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그 시점에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똑같은 고통, 아니 어떤 면에선 훨씬 큰 고통을 받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을까? 그들의 노력이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힘든 삶을 사는 거 아니냐, 는 회의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들의 삶을 조금만 지켜봐도 역사가 진보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현실 세계 곳곳에서 우리는 최저 임금 인상에 실패하고, 고용 안정화에 실패하고, 대량 해고를 막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이는 우리를 포기하게 만들려는 저 높은 곳의 계략일 뿐이다.
모든 저항은 '앎'에서 시작한다. 뭔가가 잘못됐다는 건 느끼지만 그걸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른다면 그 잘못이 생산되는 구조를 면밀히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 철학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을 바꾸고 싶지만 그 방법을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깨달음은 호기심으로, 호기심은 더 많은 깨달음으로, 더 많은 깨달음은 더더더더더더 많은 호기심으로 이어져 결국 우리를 거리로 나가게 만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