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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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확실히 다른 차원의 언어란 생각이 든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는 동안 나는 비논리와 비논리의 결합이 진리를 만들어내고 그 진리가 자아내는 운율을 따라 언어가 다른 차원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다시 한번 지켜봤다. 나는 현실에 굳건히 뿌리내린 몹쓸 이성과 합리의 벽을 무너뜨리고 싶을 때마다 시집을 꺼내든다.

서정이라는 말이 꼭 슬프다는 뜻은 아닐건대 시는 대개 서정적이면서 동시에 슬프다. 엉엉 우는 울음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차가운 겨울 바람에 땅 밑으로 끌려 내려온 달빛처럼 스산하고 쓸쓸하다. 고조된 슬픔이 사라지고 난 뒤, 세월이 한참이나 지나 이제는 다 잊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지만, 어느날 살랑이는 바람에 가슴 깊이 묵혀있던 감정의 잔해들이 먼지처럼 일어나는 순간이 언어화 하는 게 바로 시라는 생각이다. 어쩌다, 문득,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시상은 칼날처럼 떨어져 내린다.

이 시인은 찬란한 현재의 사랑을 노래하는 법이 없다. 그의 미인은 늘 과거의 미인이거나 한때 자기 옆에 머물렀던 미인이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지금 없다는 것이다. 시인은 떠나간 자리, 그 휑하게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애꿎은 그녀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을 먹어 보지만 부활은 오래가지 않는다. 생은 곧 멸과 함께 나오는 것이기에 시인은 자신이 지어 놓은 이름이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한 번 사라지는 슬픔을 느껴야 한다.

나는 문득 슬픔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슬픔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오직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슬픔의 당사자가 과연 그 슬픔을 아름답다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잔인한 생각은 해본 적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시인은 머리말에서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 사라진 것의 아름다움을 다시 살리기 위해 가슴 깊이 묻어왔던 감정을 토해낸다. 내눈엔 종종 그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나는 그가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본다.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는 말에 깃든 서로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자신의 시 쓰기가 우연히 직업으로써의 글짓기가 된 것에 대한 시인의 소회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되어진 일을 보니 슬픔은 배가 되고 아름다움은 처연한 상실감으로 변해 처음의 의도와는 너무나 멀어져버린 실제를 자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은 결코 사라진 것을 되돌릴 수 없다. 오르페우스는 결국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케는 망자가 되어 영원한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되돌리려는 모든 행위, 나는 그 부질없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것을 감수하는 인간의 비애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시인이 이렇게나 멀리 온 일을 이렇게나 아름답게 여기는 것에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그가 멀리 온 일이 더이상은 멀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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