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정말 가고 싶었던 철학과입니다. 저는 잘 다니던 건축공학과를 4학기째에 그만두고 잠시 여행을 다녀온 뒤 수능을 다시 보았습니다. 학교에 새로 입학하니 어색했습니다. 나이 차이가 나서이기도 하지만 저와 동기가 된 이들은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했습니다. 더 많이 산 나는 뭐 했냐는 생각에 부끄러웠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철학과가 익숙해졌습니다. 마지막 학기는 읽어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도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관성대로 학교에 다니다 보니 졸업 사정에 문제없이 마지막 학기가 끝났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학교에 다니면서 어디든 여행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습니다. 전에 다니던 학교를 관두고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었던 일을 긍정적으로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행 덕분에 저는 학교를 그만두어 싱숭생숭한 마음을 정리하고 철학과 입학 준비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도 하고 서른이 되는 마당이니 잠깐 끊어갈 필요가 있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며 반복했던 일상에서 벗어나서 지난 학부 시절도 반성하고 앞으로를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여행 갈 생각은 있었지만 이렇게 준비 없이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학부 동안 짬짬이 서울 여기저기를 답사 다녔는데 이를 정리하자는 제안을 2016년 12월 중순에 받았습니다. 여행을 다녀오면 서울과 비교할 경험이 생기니 답사 정리에 도움이 될 거 같았는데 대학원이 시작하는 3월 전에 답사기를 정리하고 싶은 욕심에 여행을 서둘렀습니다. 서울 답사기는 흐지부지되었지만 이때 급하게 가지 않았으면 무기력에 더 휘말려서 아무것도 못 하고 겨울을 보냈을 거란 생각도 합니다.
제가 왜 오로라를 보고 싶어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일에 늘 명확한 이유가 있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시규어 로스라는 밴드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배경인 아이슬란드의 대자연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위도인 아이슬란드 하면 또 오로라 아닌가요? 그래서 그렇게 된 거라고 추정할 뿐입니다. 오로라 여행지를 검색하니 캐나다와 노르웨이, 아이슬란드가 나왔습니다. 캐나다는 너무 비쌌고 아이슬란드는 왠지 판타지로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노르웨이 트롬쇠는 가격이 비교적 합리적이고 관광 안내도 잘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찾아보지 않고 노르웨이에 가기로 했습니다.
노르웨이로 가는 항공권을 검색하니 직항이 꽤 비쌌습니다. 여정을 끊어가면 유럽 여기저기를 돌아볼 수 있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어디를 갈까 생각하다 책장에 꽂혀 있던 여행 안내서인 『론리 플레닛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막연히 론리 플레닛 한 권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 베를린에서 평양에 가는 기차표를 끊는 영화 장면 본 기억이 남아 있어서 산 책입니다. 그 뒤로 가끔 이 책을 보면서 독일에서 학위를 받고 시베리아 횡단 철도 타고 여행하며 한국으로 돌아오는 낯 뜨거운 상상도 했습니다. 오로라 말고는 목적이 없었고 그냥 밖을 돌아다녀 보고 싶었기에 숙박비가 들지 않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비용도 저렴하고 목적에도 부합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스크바에서 노르웨이 직항은 가격이 살인적이었습니다. 값싼 항공권을 연결하다 보니 아테네와 로마 그리고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가 중간 경유지로 선택되었습니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도 싸게싸게 하다 보니 런던과 인도가 여정에 추가되었습니다.
2016년 12월 30일 저녁에 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서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열차를 예매하기 위해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별생각 없이 멍했지요. 침대 2층보다 1층이 편하다는 말이 있어서 가장 가까운 시간부터 찾아보니 다음 해 1월 7일에 그나마 자리가 있었습니다. 자리를 고르고 결제 창에서 한참을 있다가 결제를 했는데 마침 오류가 났네요? 사실 아무 의미 없는 오류지만 저는 나약한 사람인지라 가지 말라는 계시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다시 머뭇머뭇 망설이다 결국 결제했습니다. 여행의 설렘도 긴장도 없었습니다. 결제를 완료하고도 긴가민가했어요.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도 중간 여정도 아직 확정된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뭘 타고 갈지 어디서 잘지도 아직 몰랐습니다. 열차 취소 비용 몇 푼이 아까워서 여행이 시작된 겁니다.
[그림 2] 『론리 플레닛 시베리아 횡단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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