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교단일기] 행복한 고등학교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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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글 지혜를 나르는 작은 날개에서 예고해드린 기획 가운데 "헤르메스의 교단일기"를 이제 시작합니다. 조그만 학교에서 아이들과 속닥속닥 알콩달콩 생활하면서 얻는 깨달음, 크고 작은 즐거움들이 갈무리되어 있는 1000~2000자 내외의 글들로 여러분과 만나려 합니다. 그것을 매개로 중고등학교 혹은 대학교에 다니는 젊은 스티미언들 그리고 그만한 연령대의 자녀로 두고 있는 학부모 스티미언들이 함께 소통하며 입시, 학교생활, 진로준비, 자녀양육과 관련된 고민을 나눌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헤르메스의 교단일기"와 "헤르메스의 작은생각" 시리즈로 스팀잇에 올릴 글들 가운데 저희 제자들이나 학부모님들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글들은 제가 몸담고 있는 학교의 블로그에 이미 게재되어 있거나 앞으로도 게재될 것이니 이 점은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고등학교의 조건


새 학기에 접어들던 어느 날, 저는 일반 고등학교를 다니다 갓 편입한 아이의 수강 신청서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대학생들처럼 학기마다 수강 신청을 통해 스스로 필요한 수업을 선택해서 듣습니다.)

“<철학 연습> 강의는 들어두면 여러 모로 도움이 될 텐데, 왜 신청하지 않았을까?”

“그게 그러니까요, 사실은… 철학이 뭔지 몰라요!”

‘무지의 자각이 곧 앎의 시작’이라는 소크라테스 선생님의 생각과 달리 현실에서 ‘무지의 자각’은 이처럼 ‘무관심의 시작’일 뿐입니다. ‘모르니까 알려고 해야지’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대답과 약간의 용의주도한(?) 설득으로 그 아이는 그 수업을 신청했고 학기를 잘 마쳤지만….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분기탱천하는 대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우리 애는 모르는 게 있어도 알려고 하지 않아요.’
‘목표 의식이 없어요.’
‘뭘 해도 작심삼일이에요.’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모르겠어요.’

버전은 다양하나 내용은 한결 같습니다.

'교육은 하나다'라는 믿음으로 인성, 교양 교육은 물론 입시준비까지 아우르는--대안학교로서는 별난--학교에 있다 보니, 은근히 몸이 단 학부모들에게서 같은 내용의 애타는 호소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그럴 때마다 ‘어머님은요?’ ‘아버님은 안 그러세요?’라고 반문하고 싶은 위험스런 욕망을 억누르곤 합니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 때는 장난기 섞인 미소를 띄며 시제를 살짝 바꿔서 표현하죠.

“어머님은 안 그러‘셨어’요?”
“아버님도 그 나이 때는 그러‘셨을’ 텐데요.”라고.

모르는 것에 무관심하고(혹은 무관심한 척하고) 낯선 것을 기피하고 재미없는 일을 싫어하는 건 사실 애나 어른이나(?) 똑같습니다. 주관이 많이 개입된 판단입니다만, 인간이 가진 의지력은 극한 상황을 뺀 삶의 대부분에서 나약하기 이를 데 없죠.

그렇다고 ‘인생 살아보니 별 것 없더라. 아들아, 너는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라고 쿨한 척하기도 불안합니다. 오늘 하고 싶은 걸 한다고 내일도 할 수 있다는 보장은커녕, 그럴 수 없을 확률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그래도 고등학생인데!). 압도적인 불안을 이겨내고 쿨한 선택을 용맹스레 실천하더라도 또 한 번 거대한 벽에 부딪힙니다.

“그런데 엄마, 전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글쎄요. 딜레마의 탈출구는 행복의 정의에 있지 않을까요? 한쪽에서는 ‘입시성공이라는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고통은 참아야 한다’며 아이들을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뺑뺑이’ 돌리고, 다른 쪽에서는 ‘뭐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면서 준비되지 않은 아이에게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추궁하거나, 책임을 전가합니다. 선택은 반대이나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이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은 같습니다.

행복은 언제나 현재의 행복입니다. 과거는 기억으로서 미래는 기대로서 의미가 있을 뿐 인간의 삶은 언제나 현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유예하는 것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에서 그리 현명한 선택이 못됩니다.

미래의 희망이 없는 현재의 행복 또한 진정한 행복일 수 없습니다. 내일 쫄쫄 굶을 것을 빤히 아는 상황에선 오늘 맛보는 육즙 촉촉한 안심스테이크도 타이어 조각처럼 질길 테니까.

오래 전에 유행했던 노래가사에 ‘행복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행복은 우리의 내면에 깃들여 있습니다. 단, ‘인생만사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공자왈 맹자왈 식의 허튼 소리가 되지 않으려면 한 마디를 추가해야 합니다. 행복은 우리의 내면을 ‘채워가는 과정’에 있다고.

그런 행복은 쉽지 않습니다. 기타리스트를 꿈꾸는 아이의 손끝이나 홈런 타자를 꿈꾸는 아이의 손바닥에 잡힌 물집처럼 그 과정은 오히려 고통스러울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한 고통입니다. 아이가 충분한 여유를 갖고, 어른들의 세심한 도움을 받아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성장의 힘을 자신의 내면에서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고등학교’라는 말은 많은 이들에게 ‘뜨거운 얼음’이란 표현처럼 ‘형용모순’입니다. 행복한 학교는 은연중에 ‘공부를 덜 시키는 학교’로, 웃음 띤 얼굴의 고3은 ‘만사태평인 수험생’으로 여겨지지요.

하지만 진정한 행복이 자신의 내면을 채워가는 과정에 있고, 내면을 채워가는 과정이 공부라면, 행복한 고등학교는 공부 다운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교이고, 그런 학교의 수험생이라면 힘든 가운데 얼마든지 웃을 수 있을 겁니다.

고등학교가 행복해지면 이런 이상한 일도 일어납니다. 아이들이 선생님의 질문 공세에서 스릴을,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아침 등교 준비를 하는 고등학생이 콧노래를 부르고, 행여나 힘들까 차로 태워주겠다면 버스를 타겠다고 사양합니다. 아이들 스스로 아침 출석 체크를 하는데 지각이 줄고,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들은 어서 집에 가라고 아이들 등을 떠밉니다. 선생님들은 더 다양한 강의, 다양한 수업방식을 궁리하고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하이데거를 이야기합니다.

멘토로서 한 인간으로서 부족함을 알기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하는 선생님들과 아직은 어렴풋하지만 미래의 꿈을 위해 스스로 부족함을 일깨워 채워나가는 학생들이 만나는 곳. 우리가 가꾸어 가야 할 행복한 고등학교의 모습입니다.

한 아이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까지 ‘미래의 행복보다 현재의 행복을 중시하는’ 여러 대안학교를 거친 아이입니다. 아무런 노력 없는 현재의 행복이 오히려 불안했던 아이는 우리 학교를 찾아 입학면담 자리에 앉았습니다. 자기표현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입학 면담은 길게 이어졌고, 선생님들은 아이의 내면을 읽어내는 데 힘겨워했습니다. 그러다 아이의 낮게 떨리는 한 마디가 선생님들의 가슴을 때렸습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요….”

그리고 1년 후, 어느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우직하게 공부해왔지만 아직은 녀석이 자신 없어 하는 영어 과목입니다. 저의 질문이 있었고 공부깨나 한다는 친구들도 헛다리를 짚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눈빛에서 뭔가를 읽었고 저는 아이가 손을 들기도 전에 이름을 불렀습니다. “대답할 수 있지?” “음, 네….”

대답은 완벽했고, 다른 아이들은 아낌없이 환호를 보냈으며, 아이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 순간 저는 행복했습니다. 아마 그 아이도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을 것입니다.

(사족: 이 글을 쓰고 몇 년이 지난 작년 연말, 대학생이 된 그 아이와 저는 학교 축제 무대 위에서 친구로 만났습니다. 그는 드럼, 나는 기타... 우리는 오랜만에, 또 한번, 함께, 맘껏 행복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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