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학파, 자유의 경제학] 오스트리아 학파는 반드시 반-정부, 무정부를 지향하는가?

안녕하세요. @rothbardianism 입니다.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마친 후, 오스트리아 학파의 정치 철학적 스탠스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본 글은 원래 헤르메스 선생님의 의문에 답글을 달려는 취지였지만, 본 글의 취지를 제가 잘못 이해해서 그 부분은 바로잡고자 합니다. 헤르메스 선생님께선 오스트리아 학파와 그 학자들이 정부의 존재를 어느정도 인정을 하더라도 정부의 전반적인 권한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는 점을 말씀하신 것(충분히 이해하는 부분입니다)이고, 저는 그 오스트리아 학파가 정부를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세력들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려는 점에서 핀트가 어긋난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의문도 저에 대한 의문이 아니었는데, 제가 답변을 했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었다는 점 밝힙니다)

아메리칸 아나키즘과 오스트리아 학파는 계보부터 다른 사상이다.

우선 라이샌더 스푸너(Lysander Spooner)는 오스트리아 학파가 아님을 밝힙니다. 라이샌더 스푸너는 미제스 하이에크, 그 외에 오스트리아 학파 학자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라스바드 전까지), 벤자민 터커(Benjamin Tucker)와 함께 그냥 미국식 개인주의적 아나키즘(Individualist Anarchism)을 신봉하던 학자였고, 지금도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을 설명하는데 아무런 언급도 없는 학자입니다. 만약에 오스트리아 학파를 설명하는데 스푸너를 엮어서 설명한다면 이는 잘못된 설명입니다. 스푸너는 라스바드가 고안해낸 시장주의적 아나키즘(Anarcho Capitalism)을 고안해 내는데 어느정도의 '영향'을 끼친 것이지 그가 오스트리아 학파의 공리와 경제학적 사상에 공헌한 바는 없습니다. 그래서 헤르메스 선생님이 오스트리아 학파와 스푸너를 직접적으로 엮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셨다는 부분은 저도 공감합니다

미제스 선생님은 라이샌더 스푸너의 국가 강도론에 대해서 동의한 적 없으며(알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오스트리아 학파에게 라이샌더 스푸너가 소개된 것은, 머레이 라스바드(Murray Rothbard)가 시장주의적 아나키즘(Anarcho-Capitalism)을 고안해내는 과정에서 스푸너의 '국가 강도론'에 영향을 받게 되면서 입니다. 즉, 국가는 강도다 라는 표현은 오스트리아 학파의 전통적인 스탠스가 아닙니다. 이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게된 라스바드 계열의 아나코 캐피탈리스트가 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해야 맞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학파의 일부만이 라스바드의 정치철학을 따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저 표현이 오스트리아 학파의 전통적인 표현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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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스는 강도에게 지원받은 학자

일단 미제스는 국가의 지원(?)을 받고 교편에 앉았던 사람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제스가 자기 자신을 반-국가주의자로 표현하거나, 무정부를 지향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미제스의 저서 자유주의(Liberalism)의 한 부분을 한번 읽어보고 가겠습니다:

무정부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실수로 불이 꺼지지 않은 성냥개비를 내버려 불을 내거나, 혹은 분노나 시기심, 복수심에 불타서 그의 동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격할 수 있는가? 그렇게 믿는다면 무정부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천사와 성인들의 세상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리라. (pp.81)

국가의 행동영역을 축소시키려 한다거나, 경제생활에 관한 국가의 모든 행동을 원칙적으로 혐오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유주의가 국가에 대하여 지닌 태도를 나타내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유주의가 정부의 활동영역을 확장하는 데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결국에 가서는 생산수단의 사유제도를 폐지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는 사유재산제도에서 사회내에서의 인간의 행동을 조직하는 데 가장 적합한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pp.82-8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자의 사상적 일관성에 대한 지적에 어느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미제스는 무정부주의를 반대하고 정부의 존재는 인정했지만, 개인의 재산과 권리를 지켜주는 정부를 옹호했지, 교육을 지원해주는 정부는 옹호한적이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정부가 지원해주는 돈을 받고 교육을 했다면, 이 사람의 일관성에는 충분히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미제스와 똑같은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던 하버드 대학교의 저명한 자유지선주의자(Libertarian)인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의 경우, 본인의 철학적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 정부에 대한 지원을 일절 반대했었죠. 미제스와 상반되는 부분입니다(훗날 노직은 자유지선주의 스탠스를 버리게 됩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학자는 자기 자신의 신념과 행동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라. 이 부분은 비판을 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국가의 재무상으로 있었던 뵘바베르크의 경우는, 반-정부적인 스탠스를 취한 적도 없고, 사실상 친 시장 스탠스를 취한 관료 정도로 봐야하기 때문에 뵘바베르크가 강도 집단의 일부였다 라고 말하기에도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뵘바베르크는 주관주의 가치이론과 한계효용의 원리를 자본과 이자, 그리고 시간 선호에 적용을 시켰을 뿐, 미제스처럼 특별하게 정치철학적 스탠스를 주창하던 학자는 아니었습니다(이는 맹거도 마찬가지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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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교환인가?

오스트리아 학파가 교환을 강조하는 이유도 충분히 있습니다. 모든 행동은 교환을 필요로 합니다. 엥? 이해가 잘 안가시죠. 그러면 우리가 행동할 때를 살펴봅시다. 우리는 하루를 시작할 때 부터 선택이라는 것을 하게되고 어떤 선택이 우리에게 더 큰 효용(utility)를 줄지를 고민합니다. "아, 헬요일. 그냥 아프다고 반가쓰고 잠이나 더 잘까.' 또는 '아, 헬요일. 하지만 일은 가야지.' 중에 선택을 하게됩니다. 전자의 경우엔 잠을 좀 더 잘 수 있을 지언정, 병원까지 직접 가서 진료를 받아야 하고, 진료 확인서를 떼야하는 경제적인 시간적인 그리고 노동적인 부분들을 감수해야 합니다. 후자의 경우엔 잠을 좀 더 못자서 피곤함을 얻고, 회사에 출근해서 또 지긋지긋한 업무를 해야하는 스트레스를 감수해야 합니다(노동 대 여가 중에서 선택하는 경우).

우리는 매일마다 이와같은 선택을 하면서 행동합니다. 그럼 교환은 무엇일까요? 머레이 라스바드는 그의 책 인간, 행동, 국가(Man, Economy, and State)에서 교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환이란 행위자가 기대하는 더 만족스러운 상태를 위하여 사물의 한 상태를 포기하는 것이다[...] 행동의 모든 양상은 선택지들(alternatives)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했다. 선택이란 다른 재화를 얻기 위하여 어떤 재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pp.107)

많은 분들이 간과하고 계신 것이 있습니다. 교환은 실물 재화와 또 다른 실물 재화를 교환하는 행위라고만 생각하지만, 사실상 교환이라는 것은 더 높은 효용을 위해서 사물의 한 상태를 포기하는 것이며, 이에 따르면 나 이외에 다른 주체가 없어도 교환은 가능한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더 나은 효용을 위해서 선택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모든 행동은 교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고. 이래서 오스트리아 학파는 교환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죠.

사실 라스바드 말고도 고전적 자유주의자(Classical Liberal)인, 프랑스의 학자 프레더릭 바스티아(Frederic Bastiat)의 경우엔 인간의 본성에 의거해서 교환의 필연성을 설명했는데요. 그의 저서 경제적 조화(Harmonies Economiques)에 따르면 모든 생물들은 고유한 생존과 번영의 원리를 타고나며, 그러므로 자연상태(Natural State)는 생물들이 고유한 원리에 따라 생육과 번성하는 상태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교환이 없으면 생존과 번영이 불가능하고, 그러므로 교환이 인간의 자연상태라는 결론에 이르르는데(여기서 고전적 자유주의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제학적 이론에 영향을 끼쳤음을 밝힙니다).

바스티아는 교환이 인간의 자연상태라는 것을 이렇게 증명합니다:

고립 안에서, 우리 욕구는 우리 능력을 능가한다(즉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많아진다).
교환 상태 안에서, 우리 능력은 우리 욕구를 능가한다(즉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 보다 많아진다).(Harmonies Economiques. pp. 85)

즉 우리는 우리 능력의 결함을 채워줄 수 있는 타자와 재화와 용역을 교환함으로써 욕구를 충족하고 효용을 느낀다는 것이죠.

사실상 우리는 스팀잇에서도 교환행위를 꾸준하게 하고있죠? 누군가는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스팀파워와 스팀달러로 보상해주지 않습니까? 그 외에 다른 일을 하시는 분들도 여러분들의 용역과 재화를 교환하고 계실 뿐더러, 매일매일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내리는 결정들도 더 나은 효용을 위해서 다른 하나를 포기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시장속에서 산다고 보는 것입니다.

교환이 싫다면, 선택하지 않는 삶. 고립되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환없이 살 수 있다고요? 누군가가 정말로 교환없이 고립되어 생존할 수 있다면(심지어 선택이라는 것도 없이 아무런 행동없이 살 수 있다면), 살아보십시오. 그래도 생존하고 번영하게 된다면, 교환은 인간에게 필수의 상태가 아니라고 인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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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법으로써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는 시스템인 데마키. 하이에크가 주장한 사상입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정치공학적인 국가의 의미는 다들 아실테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오스트리아 학파를 위시한 자유지선주의자들은, 국가를 무조건적으로 강도라고 보는게 아닙니다. 학자마다 다르고, 정도에 따라 다르고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국가를 절대악, 또는 강도라고 봅니다(라스바드, 월터 블록, 한스 헤르만 호페, 데이비드 프리드먼), 그리고 누군가는 국가를 필요악(노직, 론 폴, 아인랜드, 바스티아), 또 누군가는 국가를 사유재산의 보호자(미제스, 로크, 밀튼 프리드먼), 그리고 누군가는 국가를 필요한 기관(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이라고 봅니다.

즉 모든 오스트리아 학파 내지는 자유지선주의자가 국가를 강도라고 하는 것은 아니며, 절대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저는 라스바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보니,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다들 아실거라 봅니다(제 국가관에 대해선 추후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오스트리아 학파 내지는 자유지선주의자가 국가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정확한 답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각자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국가를 강도라고 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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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경제원, 전경련, 자유지선주의, 그리고 새로운 단체의 등장.

대한민국에서 오스트리아 학파, 시카고 학파등을 설파한 단체는 자유경제원이 맞습니다. 이들은 전국 경제인 연합이라는 곳에서 일정한 예산을 조달받고 자유주의를 전파하는 싱크탱크였지만, 현진권 원장이 취임하고 나서부터 본질이 달라졌습니다. 사실 김정호(현 연세대학교 경제학 교수) 교수가 자유기업원(자유경제원의 전신)의 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엔 굉장히 자유지선주의적인 색이 짙었지만, 현진권 원장이 취임하고 나서는 공개적으로 정부를 옹호하고 당시 정권(박근혜, 이명박 정권)을 옹호하는 어용집단으로 변질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자유지선주의를 옹호한다는 집단이 국정교과서, 테러방지법등 국가주의적 법안에 찬성하고 지지하는등 이상한 행동을 보였고. 박정희 이승만에 대한 제조명을 하는등. 자유지선주의 단체가 할 수 없는 행위들을 일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쪽 세력들 중 강경파들이 항의를 하고 변화를 촉구하다가 먹힐 뽄세가 없으니 자유경제원을 나와서 자유당(Libertarian Party of Korea)과 자유혁명(Students For Liberty Korea)이란 단체를 설립하고, 정부나 특정 어용세력의 지원없이 자발적인 기부만으로 자금을 운영하여 자유지선주의와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강경파에 속해있으며, 현진권 원장과 전희경 의원(전 자유경제원 사무총장)이 자유지선주의와 오스트리아 학파에 대한 이미지를 망쳐놓은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런 부분을 명확하게하고, 오스트리아 학파와 자유지선주의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불철주야 알리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학파와 자유지선주의는 무조건 아나키즘을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를 최선의 가치로 보는 학문은 맞습니다만, 이 또한 방법이 학자들마다 다릅니다. 모쪼록 이 글을 통해서 여러 오해가 풀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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