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님이 지목해주셔서 구성지게 뒷북을 치며 나름의 방식으로 닉네임 챌린지를 수행하는 마음으로 쓰는 글. 본명은 숨길 것도 없지만 굳이 밝히고 싶지는 않고, 닉네임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다. 태그는 달겠지만, 민망할 정도로 뒷북인지라 다른 분들 지목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서울에 내가 세 들어 사는 부모님의 집 말고, 온전히 내 것이었다고 여기는 공간이 있었다. 세 들어있다는 점은 변함없었지만.
라다크 레 시내에 얼마 남지 않은 전통가옥 중 하나였다. 나무와 흙만을 이용하여 지은 그 집은 잘 살피지 않으면 좀처럼 찾기 힘든 곳에 꼭꼭 숨어있어서, 카페를 찾는 손님들은 곧잘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카페에 들어선 사람들의 첫마디는
'여기 사람들이 찾아와요?'
일 때가 많았다. 게 중에는 아니,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없이 장사를 하냐며 신경질을 내는 사람도 있었는데 오죽 헤맸으면 초면에 화부터 낼까 한편으로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카페는 3층에 있었다. 3층으로 연결되는 나무 계단은 너무 낡아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밟으면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삐걱대는 소리가 났고, 계단을 모두 올라 카페로 들어서는 입구는 어지간히 키가 작지 않고서는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반드시 부딪칠 수밖에 없을 만큼 낮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님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머리 조심하세요!' 써 붙여 놓아도 소용이 없었다. 정전은 일상이었기 때문에 촛불을 켜놓기 일쑤였는데, 어둠 속에 촛불, 끼익 끼익, 이런 요소들이 모두 만나 만들어내는 으스스한 분위기 덕분에 가끔 갑자기 들어온 손님을 보고 내가 비명을 지르는 일도 많았다... 그러면 서로 쏘리 쏘리, 죄송해요 죄송해요, 하다가 와하하 웃곤 했다.
가장 자부심을 가졌던 공간은 라다크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화장실이었다. 뭐 굳이 찾아서 체험해볼 만한 일은 아니지만, 레 시내에서 라다크 전통 화장실을 체험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다. 연 강수량이 극히 적은 건조한 땅이기 때문에 지면으로부터 떨어진 곳에 화장실을 만들고 자연 건조 방식으로 처리한다. 냄새는 나지 않는다. 완벽하게 건조되기 때문이다. 대신 물은 절대로 버리면 안 된다.
부엌으로 만든 공간은 중앙에 난로를 놓아둔 가족들의 공용 공간이었을 것이다. 천장에 뚫려있는 구멍은 가운데에 놓아두었던 난로의 배기관을 위한 구멍. 부엌엔 난로가 없었기 때문에 그 구멍은 옥상에 올라가 유리를 덮어 막아두었는데, 낮에는 이 구멍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빛이 훌륭한 조명 역할을 했다. 그 빛줄기 사이로 떠다니는 먼지를 보면 헉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이 땅에서 먼지는 일상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못을 박는 것은 물론이고 상하수도 시설조차 갖출 수 없었다. 이 집에 조금의 흠집도 낼 수 없다는 것이 집주인 아룬의 입장이었고, 세 들어 사는 우리가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물을 길어다 쓰고, 생활하수는 따로 모아 직접 가져다 버려야 했다. 쌓여가는 설거짓거리를 보다 못한 단골손님들이 대신 수돗가에 나가 설거지를 해주는 일이 허다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도 그 집을 포기할 수 없었다. 운명처럼 만나 깊이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은 집이 대부분 그러하듯 계절이 바뀌어도,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들고 나는, 그 박자와 흐름 그대로를 따라가면 그럭저럭 더운 여름날에 땀이 식었고, 추워지기 시작하는 가을에는 칼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집에서 나고 자란 집주인 아룬처럼 나도 그곳에서 세 번의 여름을 보내며 무럭무럭 자랐다.
멍하니 앉아 창밖을, 쨍하게 파란 하늘을, 보란 듯이 솟은 설산 스톡 깡그리를, 와장창 쏟아지는 햇볕을, 스르르 허공을 빗는 포플러 나무를, 흙색의 지구 표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라니 너무 상투적이지만, 그때 나의 마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해주는 말도 없다. 세상을 다 가진 나는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 작은 공간에서 온 세상 사람들(어린이 포함) 정말 다 만난 것만 같다.
카페는 2012년에 정리했고, 10초 만에 뚝딱 지어낸 roundyround라는 닉네임은 2013년부터 사용했다. 이전부터 'the earth is round'라든지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갑니다'와 같은 문장을 나를 표현하기 위해 곧잘 사용하곤 했는데, 닉네임의 의미는 이 문장 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안에 심어져 나를 불행하게 만들던 정착 민족의 본성과 부단히 타협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더 없이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 모든 것과 떨어져 다시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고 싶어지는 순간이 여지 없이 찾아오곤 했다. 때마다 동물들 풀을 먹이기 위해 함께 보금자리를 옮기는 유목민들처럼, 그렇게 나에게 풀을 먹이러 돌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만난 모든 새로운 것들로 차곡차곡 내 안의 빈 곳을 채웠다.
roundyround와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갑니다'의 뿌리는 여전히 사랑하는 라다크 땅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만이 언제고 다시 찾을 내 마음의 고향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질 때는, 억지로라도 재빨리 끊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저녁도 못 먹고 배고파 죽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