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술]부다페스트의 루인펍, 술보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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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럽에서 가장 좋아하는 도시는 부다페스트이다. 유럽의 그 어떤 도시보다 가장 많이 방문하고 오래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걷기만 해도 사랑에 빠져버릴 것 같은 낭만적인 야경 명소 세체니 다리나 뜨끈뜨끈 얼큰한 것이 한국인의 국밥 향수를 달래는 굴라쉬, 온갖 피로를 한 방에 풀어주는 온천까지 부다페스트의 매력은 나열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지만 내가 부다페스트를 가장 사랑한 이유는 주머니 부담없이 마음껏 술을 사마실 수 있는 저렴한 물가였다. 유럽 어디를 가도 생수보다 싼 맥주와 와인을 얼마든지 마실 수 있지만 술은 누가 뭐라해도 술집에서 술쟁이들과 술냄새를 같이 폴폴 풍기며 먹어야 제 맛인 법. 그럴싸한 술집이나 바에서 손을 바들바들 떨지 않아도 기분 좋게 취할 수 있는 곳이 부다페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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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의 술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빠트리면 안되는 것이 바로 루인펍이다. 매년 전세계 사람들이 부다페스트로 찾는 이유이자 부다페스트를 '힙'의 반열로 올린 게 바로 루인펍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어느 장소나 그렇겠지만 젊은이들은 늘 심심하고 주머니는 가볍기 마련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 스물 여섯살이었던 네 명의 청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쭉 방치되어 있던 부다페스트 유대인 지구의 폐공장 하나를 빌려 저렴하게 놀 수 있는 젊은이들의 아지트로 만들었다. 그게 바로 2001년에 문을 연 첫 루인펍 심플라 케르트(Szimpla Kert)이다. 애물단지처럼 공간만 차지하던 폐건물은 펍으로 재탄생이 되었고 그 안은 낡은 테이블, 의자, 폐차 등을 재활용해 낡지만 멋스러운 인테리어까지 완성했다. 폐허에 만든 펍이라 말 그래도 루인펍이라 불리우며 부다페스트 유대인 지구에는 수십개의 루인펍이 있고 그것들은 부다페스트의 밤문화를 책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자주 찾던 곳은 루인펍의 시초이자 랜드마크 격인 심플라 케르트이다. 심플라 케르트는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구조의 펍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왔지만 밖이고, 밖이지만 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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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짜리 건물 중앙에 뻥 뚫린 야외 정원 때문이다. 무언가 관통한 것처럼 뚫린 야외 정원은 서커스 천막처럼 알록달록한 비닐로 위가 덮혀있고 정원을 에워싼 건물에는 다양한 컨셉의 공간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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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피아노와 그림, 텔레비전, 크고 작은 인형과 자전거, 우산, 자동차의 일부분 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이곳저곳에 늘어져 있으며 마구잡이로 낙서 한듯한 그래피티와 덕지덕지 붙은 스티커, 알록달록한 의자와 테이블 등이 혼란스럽게 흩어져 있다. 문이 없는 작은 방은 와인바, 칵테일바, 햄버거 등 스낵과 맥주를 판매하는 펍. 바닥에 앉아 시샤를 할 수 있는 에스닉한 바으로 공간공간 전부 다르게 꾸며져 있어 둘러보는 것 만으로도 큰 즐거움이다. 대부분 나는 낮에 심플라 케르트를 가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노트북을 꺼내 도독도독 글을 끼적이곤 했다. 와인 한 잔에 300ft, 맥주 한 잔에 500ft 부터 시작이라 2,000원도 안되는 가격으로 술을 한 잔 마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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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면서 카페 같은 낮과 달리 밤의 심플라는 그 모습이 180도 바뀐다. 바를 넘어 클럽으로 변신한다. 심플라 케르트의 입구는 이 핫플레이스를 방문하기 위해 긴 줄을 감수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디제이는 힙스러운 장소에 맞는 힙한 일레트로닉 음악을 틀고 다들 서서 음악을 즐기고 몸을 흔들고 이야기를 나눈다. 사적인 시간을 보장 받는 낮과 달리 밤은 사적인 시간을 침해받고 너와 나의 경계없이 뒤섞여 놀고 싶은 인싸로 가득하다. 쉽게 말을 섞고 쉽게 어울릴 수 있다. 혼자 여행한 태국 여행에서 그 어떤 바를 가도 친구를 사귀기는 커녕 말 한번 제대로 섞어본 적이 없는데 밤의 심플라 케르트에 왔을 때는 2015년 처음 친구랑 같이 왔던 날에도 2019년 혼자 왔던 날에도 늘 침묵해본 적이 없다. 주말을 맞아 짧게 여행 온 유럽 여행객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간혹 현지인이나 동양인, 이스라엘 친구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스쳐가는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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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술꾼들이 술집을 찾는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술, 분위기, 음식으로 크게 세개로 그 이유를 나눈다면 내 기준은 당연히 술이다. 내가 먹어보지 못한 술, 신기한 술, 호기심을 자극하는 술이 늘 그 상단에 있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분위기만으로 들낙거렸던 곳이 바로 심플라 케르트이다. 이곳이 좋았던 건 전세계 사람들이 모이고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바이기도 하지만 이곳이 도시 재생 문화복합공간으로 지역 주민과 상생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매주 일요일이 되면 심플라 케르트는 파머스 마켓이 된다. 농산물 생산자는 직접 자신이 일구고 만든 제품을 가지고 오고 시민과 여행객에게 직거래로 판매한다. 신선한 채소, 치즈, 피클, 햄 등을 시식하고 바로 살 수 있다. 이 특별한 시장은 마치 내가 현지인이라도 된 듯한 착각까지 불러 일으킨다. 심플라 케르트에서는 야외 정원에서 영화 상영도 하고 음악 공연도 자주 열리며 누구나 원한다면 무대에 설 수 있고 음반을 내고 활동할 수 있는 레코딩과 심리 지원 프로그램들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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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라 케르트가 다양한 공간적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내는 곳이라면 인스턴트는 철처히 유희하는 인간, 호모루덴스를 위한 춤의 공간이다. "부다페스트에서 춤추러 어디를 가야해?" 라고 묻는다면 단연 인스턴트일 것이다. 이 곳 역시 폐건물을 활용하여 만든 클럽인 만큼 일반적인 클럽과는 다르다. 낡고 동굴같은 스테이지가 여럿 있고 큰 규모의 스테이지가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다. 처음 가는 사람은 혼란스러워 길을 잃을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각 스테이지마다 다른 음악이 흘러나오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곳에서 술을 마시며 즐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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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루인펍이 있는 유대인 지구보다 좀 외따로 떨어져 있는 루인펍도 하나 방문했다. 약간 외곽이고 유동 인구가 많지 않아 차분한 분위기의 엘리스토였다. 2013년부터 시작한 이곳은 와인바, 스피릿바, 수제맥주바 3개의 섹션으로 나눠져 있지만 가장 주력하는 건 수제맥주이다. 이름도 '효모'라는 뜻일 뿐더러 20개의 신선한 수제 맥주가 제공되는 탭이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와인 국가인 헝가리는 사실 맥주 생산으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고 소규모 브루잉이 시작된지 역사는 오래되지 않은만큼, 이곳에서 다양한 맥주를 마셔보며 그 현주소를 직접 가늠해보는 것도 재미난 일이다. 나는 기분 좋게 맛있는 ipa 2잔을 마셨다.


아마 오래 전부터 꿈꾸던 나와 내친구들의 공간을 현실화 한다면 심플라 케르트와 비슷한 형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버려진 공간을 재생하고 저렴하면서 문화적인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물론 바와 더불어 숙소도 갖춰져야 하겠지만. 요원할 것만 같았던 그 꿈의 실현은 '춘자 인사이드'라는 이름으로 곧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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