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 참여]너랑 놀고싶었던 것 뿐인데, 어디서 잘못된 걸까?

안녕하세요.
천재소년 @doogie입니다. ㅎㅎ
제가 백일장에 참여하려는 글은 윤가은 영화감독의 [우리들]입니다.

이 영화는 사춘기 소녀들을 다루지만 그때부터 시작되는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어려움을 자연스럽고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자유롭지 않음을 여전히 체감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여기, 이곳, 스팀잇 월드도 인간관계 맺기의 장인만큼 좀 더 근본적으로 들여다보면 이 영화가 묘사하고자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다들 친구하고 싶어, 같이 놀고 싶어 어울렸던 건데, 왜 이리 관계들이 퇴색하고 복잡해져 스스로 미로 속을 헤매는 걸까요?

다들 건강하게 손내미는 건강한 마음을 되돌아 보는 의미로, 부끄럽지만 글 하나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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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춘기라는 성장통의 터널을 어떻게 통과했나요? 관계의 복잡한 골목길을 어떻게 헤쳐 왔나요? ‘자아’라는 이물스러움과 힘든 고독 때문에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지하지는 않았는지, 그러면서 친구와 무리지어 어울리며 저지른 과오를 남탓으로만 돌리거나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지는 않았는지?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로 움츠러들고 비겁하게 냉소하며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는지? 또는 성장통을 오롯이 격지 않고 지름길로 영악하게 가로질러 가며 현실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위악을 굴다가 현실 추종자가 되어 가고 있지 않은지?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은 초등학교 4학년, 사춘기가 막 시작하는 소녀들의 세계입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홈그라운드라면 친구란 집을 벗어나 더 넓은 사회로 뻗어나가는 길에서 만나는 동무들입니다. 친구(관계)와 사춘기가 이들 앞에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사춘기는 ‘자아’라 불리는 낯설고 버거운 것을 홀로 일으켜 세워야 하는 성장통입니다. 카프카의 [소송]의 세계처럼 죄가 뭔지도 알려주지 않고 유년의 낙원에서 갑자기 차가운 고독이란 좁은 독방으로 추락하는 세계입니다. 당황스럽고 억울하기에 반항심과 분노는 언제 어디서 폭발할지 모릅니다.

아직 ‘자아’는 미성숙하기에 주위환경에 쉽게 휩쓸립니다. 인기 있고 리더십 있는 친구와 무리들이 또래들의 세계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엔 그런 친구와 무리에게 지나친 친절을 베풀면서도 무리에 끼고 싶어 합니다. 버거운 자아를 잊으려고 그런 태도를 취하기도 합니다. 또는 서둘러 어른의 태도를 모방하거나 사회의 지배적 가치 기준을 따르면서 그것을 배우고 익히려고 합니다. 경쟁으로 팽팽한 어른의 세계를 보며 승패논리의 속물스러운 영악함으로 미성숙한 자아를 채우려 합니다. 그게 텅 비고 별 볼일 없는 자아인 줄은 모르고, 화려하고 안정적인 외양에 현혹됩니다.

성장통에서 오는 혼란과 고독과 외로움을 오롯이 겪어내면서 자아를 스스로 일으켜 세우지 못하면 아무리 먼 길을 갔고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그건 당신의 것이지 당신 자신이 아니기에 언제든 사춘기의 혼란하고 미성숙한 고독의 좁은 방으로 소환될 겁니다.

왕따 시킨다는 건 피구게임과 닮았습니다. 도덕적으로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마음을 나누려는 친구를 속여 승자들만이 누리는 금 안쪽으로 못 들어오게 아웃시키려는 행위입니다. 속사정(가난, 부모의 이혼 등)은 상처가 난 부위로 서로 보듬는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용기 없고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무리는 정정당당하게 싸우기보단 손쉽게 물어뜯을 수 있는 이 부분을 찾아내려 합니다. 또 1:1로 싸우기엔 희생이 많이 따르니 무리 지어서 한 명을 손쉽게 제압하려 합니다.

왕따 시키는 방법을 보면, 무리 중 누군가가 먼저 앞에 나서서 약자의 약점을 들추어 상처 입히고선 무리들 한가운데에 던져놓습니다. 함께 물어뜯으며 승자의 쾌감을 나누자며 제안합니다. 그들은 옳지 않은 행위와 그로 인한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물어뜯느냐 뜯기느냐의 문제로 논점을 흐립니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관점에 빠져버리면, 금 안쪽으로 들어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기 바쁩니다. 그럴수록 자신을 옭아매는 규칙은 자신의 마음과 세계에서 더욱 견고해지는 줄은 모르고.

여름방학 동안 서로를 보듬어주며 소중한 관계를 맺었던 친구를 모른척하며 무리의 먹잇감으로 서슴없이 바칠 수 있었던 건 금 바깥으로 내몰리지 않으려는 불안감과 승자가 누리는 쾌감을 맘껏 누리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한편 유치원에 다니는 남동생은 덩치 큰 친구한테 매번 맞고 당해서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상처투성이지만 친구랑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사이좋게 지냅니다. 넌 왜 맞고도 같이 어울리느냐고 맞으면 너도 또 때려야지 라는 누나의 충고에 동생은 계속 서로를 때리면 언제 놀아? 난 그냥 놀고 싶은데 라고 답합니다. 어울리다 싸울 수는 있지만 어울리는 진짜 이유는 같이 놀고 싶기 때문이란 것.

또 한편 어른들도 아이들이 거주하는 골목길 너머 또 다른 골목길에서 헤매긴 마찬가지입니다. 할아버지가 병실에서 아들을 계속 찾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끝내 찾아뵙진 않습니다. 아빠는 ‘할아버지는 가해자, 아빠는 피해자’라는 금을 긋고 그 안에서 피해자의 도덕적 정당성으로 할아버지를 욕하며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아빠는 병실의 텅 빈 침대칸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죠. 마음의 금을 지우지 않으면 관계는 회복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회한으로.

왕따 당할지 모를 불안과 외로움에 물어뜯던 손톱 중 하나에 간신히 걸려있던 봉숭아물을 발견합니다. 이혼한 엄마가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또 어겨 상처로 움츠러든 친구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친구의 손톱을 물들여 주며 함께 물들였던 손톱이였습니다. 친구와 속 깊이 마음을 나눠 서로의 상처를 보듬던 시간들 속에선 고독과 외로움과 고통은 견딜만 하고 자아는 더욱 풍성하게 성장할 수 있었고 관계는 진실했었습니다.

피구게임에서 또다시 아웃당하지만 친구가 무리로부터 부당하게 아웃 당하려 하자, 서로의 상처를 물어뜯던 마음의 금을 지우고 친구를 향해 손을 내밉니다. 내가 봤어, 금 밟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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