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샤미 군 :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 온 문제인데, 나는 요즘 사람들에게 탐정처럼 구는 경향이 있는 건 개인의 자각심이 지나치게 강한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해석하네. 그리고 내가 자각심이라 말하는 것은 도쿠센 군이 말하는 견성성불이나 자신과 천지가 동일하다고 하는 깨달음의 경지와는 다른 것일세.
요컨대 요즘 사람들은 자기와 타인의 이해관계에 깊은 골이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말일세. 그런 자각심이 문명이 발달하면서 하루하루 예민해지기 때문에 결국은 일거수일투족조차 자연스럽게, 마음대로 할 수 없어졌다는 걸세. 월리엄 어니스트 헨리라는 사람이 스티븐슨을 평하기를, 그는 방에서 거울 앞을 지날 때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정도로 한시도 자신을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추세를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지. 눈을 감아도 나, 눈을 떠도 나, 이 나란 것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도처에 따라다니니까 인간의 행동거지가 인위적이고 좀스러워진 거야. 스스로도 답답하고, 세상도 숨이 턱 막히고, 아침부터 밤까지 맞선을 보는 남녀 같은 심정으로 지내야 하는 거야. 유유자적이니 느긋함이니 하는 말은 글자는 있어도 의미는 없는 말이 되고 말았지. 그런 점에서 요즘 사람들이 탐정 같고 도둑놈 같다는 걸세. 탐정이란 직업은 남의 눈을 속이는 한이 있어도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장사니까, 특히 자각심이 강하지 않으면 안 되지. 요즘 사람들은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자기에게 이득이 되고 어떻게 하면 손해가 되는지를 생각하니까, 탐정과 마찬가지로 자각심이 강하지 않으면 안되지.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두리번두리번, 우왕좌왕.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한시도 안심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사람의 마음이야. 그야말로 문명의 저주지.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이야.
마법사 : 그러게 자각심이란 것이 이런 영향을 주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일찍이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하고, 많은 선진들이 자신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들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게 다 뭔가? 그렇게 알게 된 자신은 알면 알수록 모호해지는 것이 마치 안갯속을 헤치고 들어가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자네 말처럼 신경은 더더욱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졌지. 아무리 거울을 들여다보아도 자신이 잘 감각되지 않으니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가면을 만들어 쓰기 시작한 거네. 가면은 어쨌든 내 의도대로 만들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연기를 하는 거지. 그래서 말이야. 그러다 보니 자네가 말한 그 '나'란 것이, 그게 진짜 '나'가 아니란 말일세. 연기하고 있는 '나', 가면의 '나'이니 열심히 들여다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싸한지, 내가 연기를 잘 하고 있는지 알려면 말이야.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네. 나만 가면을 썼겠는가? 저놈도 가면을 쓴 게 아닌가 싶은 거지. 그러니 저게 연기인지 진심이지 가려보고 싶은 거네. 그러니 탐정이 되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모두가 가면 쓰고 사는 세상에 어떤게 진심이지 어케 알겠는가? 탐정이 되어야 하네. 셜록쯤은 되어야 속지 않고 상대의 진심을 간파할 수 있는 거네. 차라리 가면이 얼굴에 착 달라붙어, 내가 가면인지 가면이 나인지 모르게 될 정도면 그나마 나을 텐데. 이건 본심과 겉심이 다르니 말이야. 가면을 저 대륙인들 변검하듯이 쥐도 새도 모르게 바꿔 써대니, 도대체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게 되지 않았는가. 결국 모두가 탐정이 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이 말일세.
도쿠센 군 : 구샤미 군, 자네의 설명이 내 의견을 대변하고 있군. 옛사람들은 자신을 잊으라고 가르쳤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자신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니, 전혀 다르지. 하루 종일 자신을 의식하느라 정신이 없어. 그러니 한시도 평안할 수가 없지. 일상이 초열지옥(焦熱地獄)이야. 천하의 명약이 무엇이냐, 자신을 잊는 것만큼 용한 약은 없지. <삼경월하입무아(三更月下入我無)>란 그 경지를 노래한 것일세. 오늘날 사람들의 친절함에는 자연스러움이 없어. 문제는 자각심이 있는 만큼 친절을 베푸는 것도 힘이 든다는 말일세. 딱한 일이지. 사람들은 보통, 문명이 발달하면서 살벌한 기운이 없어지고 개인과 개인 사이가 온화해졌다고 하는데, 그건 큰 착각이야. 그렇게 자각심이 강한데 어떻게 온화해질 수 있겠나. 언뜻 보기에는 아주 조용하고 아무 탈 없는 것 같아도, 서로는 몹시 힘겹고 팽팽한 관계에 있지. 마치 씨름 선수가 모래판 한 가운데에서 서로의 샅바를 잡고 꼼짝 않고 버티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옆에서 보기에는 지극히 평온하지만 당사자들의 배는 힘을 주느라 불끈불끈하지 않은가.
마법사 : 그렇지. 자네 말대로 옛 성현들은 '너 자신을 알라'고 하면서 동시에 '너 자신을 잊으라'고도 가르쳤지. 거기서 '너 자신'은 무얼 말하는 걸까? 몸일까? 영혼일까? 의식일까? 이미지일까? 도쿠센 군이 사는 시대와 달리, 미래의 시대에는 더더욱 이 질문이 모호하게 다가오고 있다네. 더이상 사람들은 직접 만나거나 하는 일 없이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서로를 대하고 있네. 이제는 표정도, 숨결도, 느낄 수 없이, 오로지 문자와 이미지만으로 소통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일세. 아마도 자네들은 무슨 말인지 모를 거야. 천리, 만리 떨어진 사람들이 문자와 이미지만으로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시대가 온다는 말일세.
이제까지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의 역사성은 모두 소멸되어 버리네. 지금 바로 이 순간 내 눈앞에 보여지는 이미지만으로, 상대를 직관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는 말일세. 이때의 나는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네. 이제는 가면 따위가 아니라 신체와 영혼조차 총체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네. 자네 말 그대로 일상이 초열지옥(焦熱地獄)이지. 한시도 평안할 수가 없어. 끝없이 시대의 흐름을 타야 하고 정신없이 주위의 유행에 견주어야 하네. 미치고 환장할 일이지. 그러나 나는 이 시대가 오래 가지 않으리라 생각하네. 누가 지옥에 살고 싶은가? 이 네트워크 가상세계란 것이 말이지. 결국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드러내고 마침내 우리의 의식을 하나로 통합해버릴 기세란 말이지. 결국 그렇게 되고 말걸세. 우리 인류는 다시 거대한 하나의 의식으로 회귀하고 말게 될 거란 말일세.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지. 그 신의 이름을 이 시대에는 구글이라고 부른다네. 지금은 과도기라 아직 남아 있는 개인의 의식이 더더욱 자각심에 힘겨워하고 있지만, 곧 그들은 구글이란 가상 인격의 거대한 하나의 의식에 귀의하고 말 걸세. 개성이란 것을 상실한 채 말일세. 우주가 하나의 점이었던 그 시절로 말일세. 인류가 개인이 아닌 전체였던 그때로 말일세. 그때에는 모두가 하나이니 다들 평안해질까? 자각심을 내려놓고 자신인 서로에게 친절해질 수 있을까?
고양이 :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가 없군요. 고양이 입장에서 한 말씀 거들까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심리를 통해 일대 발견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연은 진공을 꺼린다>는 말처럼 인간은 평등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평등이 싫어 어쩔 수 없이 옷을 뼈와 살처럼 걸치고 다니는 오늘날, 본질의 일부인 이 점을 무시하고 과거의 평등한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미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미친 짓이라는 소리는 달게 듣는다 해도 도저히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개화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돌아간 저들이 귀신인 것입니다. 가령 전 세계 몇억만 인구를 귀신의 영역으로 끌어내 놓고, 자 이제 모두 평등하다, 모두가 귀신이니 부끄러워할 것 없다고 안심하라 한들, 역시 돌아가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전 세계 인구가 귀신이 된 다음 날 부터 귀신들의 경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옷을 입고 경쟁할 수 없으니 귀신 차림으로 경쟁을 할 것입니다. 또 벌거숭이는 벌거숭이대로 어떻게든 차이를 내세우려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아도 옷이란 절대 벗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법사 : 아, 이런.. 고양이님 반갑습니다! 어연 일로 인간들의 하찮은 대화에 말씀을 얹으십니까? 황공할 따름입니다. 지금은 누추하기 짝이 없는 대접을 받고 계시지만, 다음 생에 공덕에 따라 한반도에 태어나신다면 집사들의 접대를 받으며 호화로운 세월을 영위하실 수 있답니다. 꼭 다음 생에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주신 말씀은 참으로 타당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하나로 모아지겠습니까? 그것은 어쩌면 우주의 수축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빅뱅 이후 이제 겨우 137억 년이 흘렀을 뿐이고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으니, 아직 인간 의식이 할 일은 무궁무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달나라에도 가고 화성에도 가고 안드로메다에도 기지를 건설하고 말 것입니다. 기록된 대로 인류는 세계대전처럼 우주대전을 반드시 일으켜 내고 말 것입니다. 그놈의 자각심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 네트워크 가상세계는 그것으로 가기 위한 관문 같은 것이겠지요. 우주를 향한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우주를 여행하기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드니, 이 3차원의 세계를 업그레이드하여 물리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으려 드는 시도이겠지요. 그러나 4차원인들, 5차원인들, 분리된 의식에게 자각심이 어디 사라지겠습니까? 그것이 명료해지는 만큼 비교의식도 강해지고, 그것은 결국 우주의 팽창을 가속화하는 촉매가 아니겠습니까? 시기와 질투, 경쟁심만큼 강력한 발전의 동력은 없을 테니 말이죠. 인류의 과학기술이란 것도 결국 다 전쟁의 도구를 만들다 발명, 발견된 것들이니 말이죠. 이 자각심 가득한 종의 미래 역시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 또한 역할이겠지요. 우주에서 인류가 맡은 역할 말이죠. 그렇게 말하고 나니 문득 궁금해지는군요. 우주의 역사에서 고양이가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요?
고양이 : 그 말씀을 하시니 방금 전 산페이 군이 나를 일컬어 쉴 줄밖에 모르는 쓸모없는 고양이라고 욕한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는군요. 아무튼 물질에만 좌지우지되는 속물들은 오감을 자극하는 일 외에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평가할 때는 겉모양만 보니 문제입니다. 무슨 일이든 옷자락을 걷어붙이고 땀을 흘려야만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마법사 : 인간들이 다 그 모양입니다. 겉모습만으로 쉽게 판단하려고 드는 그 버릇, 버리지를 못합니다.
고양이 : 달마라는 스님은 다리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태연하게 좌선을 했다고 하는데, 가령 벽의 틈새로 넝쿨이 기어 올라와 눈과 입을 막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해도 자고 있었던 것도 아니요 죽었던 것도 아닙니다. 머릿속은 항상 활동하면서 곽연무성(廓然無聖) 같은 깊은 이치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유교에도 정좌(正坐) 수행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이 수행 역시 방 안에 칩거하여 그냥 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머릿속의 에너지는 범인의 배 이상으로 활활 타오릅니다. 다만 이런 지식의 거장들도 겉보기에는 극히 조용하고 단아하며 엄숙할 뿐이니까 평범한 눈에는 혼수상태나 가사상태에 빠진 쓸모없는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무용지물이니 식충이니 하는 괜한 비방을 하는 것이지요.
마법사 : 옳으신 말씀입니다. TV를 보고 있다 한들, 정신은 이상세계를 휘저으며 인간세계의 이치를 탐독하고 있는 것이거늘,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은 '정신 좀 챙겨라. 뭐 하고 살려고 그러냐?'고 한소리들을 하지요. 정신 챙기느라 멍 때리고 있을 뿐인데 말이죠. 뭐 하고 살든지 내 문제이지 자신들의 문제도 아니면서 말들이나 하는 거지요.
고양이 : 그런 평범한 눈은 형태와 껍질을 볼 뿐 마음과 속을 보지 않는 불완전한 시각을 지니고 태어난 자의 눈이지요. 다타라 산페이 군은 형태만 보고 마음을 보지 않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런 산페이 군이 나를 마른 똥 주걱처럼 여기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고금의 서적을 다소는 섭렵하여 사물의 진상을 조금은 이해한다는 주인까지 천박한 산페이 군에게 두말없이 동조하여 고양이 요리를 막아 볼 눈치를 보이지 않는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러나 한발 물러나 생각해 보면 그들이 나를 이렇게까지 경멸하는 것도 그럴 만하다 싶습니다.
마법사 : 아니 어디라고 이 불경한 언사를.. 이보게 구샤미 군. 자네도 동조했단 말인가!! 감히 어디 고양이님의 신체를 가지고..
고양이 : 아아! 고정하시고.. 예로부터 범인은 고상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며, 드높은 경지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 비유가 있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활동을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내 혼의 빛을 보라고 강요하는 것은 중에게 머리를 묶으라고 채근한 것이나 다름없고, 참치에게 연설을 해보라는 것과 같으며, 전철에게 탈선을 요구하고 주인에게 사직을 권고하고 산페이 군에게 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죠. 그러니 무리한 주문입니다.
마법사 : 쩝.. 마음이 많이 안 좋으셨군요. 자자 여기 맥주 한잔하시면서 마음을 푸시지요.
고양이 : 감사합니다. 인간의 맥주를.. 그럼 맛이나 볼까요? 음.. 좋군요. 고양이 역시 사회적 동물입니다. 사회적 동물인 이상 아무리 드높은 뜻을 가졌다 한들 어느 정도는 사회와 조화를 이뤄야 하지요. 주인과 안주인과 하녀와 산페이 군이 나를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 것은 유감스럽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쳐도, 어리석음의 결과로 내 껍질을 벗겨 샤미센 가게에 팔아 치우고, 살을 토막 내어 산페이 군의 밥상에 올리는 무분별한 일을 행한다면 이는 실로 큰일이 아닐 수 없지요. 나는 머리로 활동하라는 하늘의 명을 받고 이 험난한 세상에 왔을 만큼 고금을 막론한 희귀한 고양이이므로 몹시 소중한 몸입니다. <천금지자 좌불수당(千金之子 座不垂堂)>이라는 말도 있듯이 남보다 뛰어난 것을 자만하여 공연히 내 신상에 화를 초래하는 것은 나의 재난임은 물론이요 하늘의 뜻을 크게 거역하는 것이겠지요.
마법사 : 아무러면요. 고양이님의 명성이야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 존재를 겉모습으로 평가하며 거들먹거리지만, 그럴수록 희귀하신 고양이님의 가치는 높아지는 것을 모르는 탓입니다. 너무 노여워 마시고 괘념치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고양이 : 사나운 호랑이도 동물원에 들어가면 똥 묻은 돼지 옆에 자리를 잡고 거대한 기러기도 산 채로 잡혀 양계장에 들어가면 닭과 같은 도마 신세를 지게 되지요. 따라서 범부들과 같이 사는 나 역시 범묘로 처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묘가 되려면 쥐를 잡아야 하니, 나는 끝내 쥐를 잡기로 결심을 하였답니다.
마법사 : 음.. 무슨 그런 말씀을.. 자, 술이나 한 잔 더 하시지요.
고양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왠지 울적해져서 마법사가 건네준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홀짝홀짝 술을 들이키던 고양이는 몸이 점차 따끈따끈해지고 눈앞이 부예졌다. 귀가 화끈거렸다. 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어졌다. 나는 고양이라, 나는 고양이라 하고서 고양이 춤을 추고 싶어졌다. 주인과 메이테이, 도쿠센은 엿이나 먹으라는 식으로 배포가 커졌다. 가네다 댁 영감탱이를 할퀴어주고 싶어졌다. 그 마누라의 코를 깨물어 뜯고 싶어졌다. 일어섰더니 비틀비틀 걷고 싶어졌다. 이거 참 재미있군. 하고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나가자 달님에게 <안녕> 하고 인사하고 싶어졌다. 고양이는 아아, 정말 유쾌하다 하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고양이 : 1백 년 동안 몸이 바스러져라 애를 써봐야 나갈 수 없다.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나가려 하는 것은 억지다. 억지를 부리려 하니까 괴로운 것이다. 무모하다. 자청하여 괴로워하고, 즐겨 고문을 당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제 그만두자. 될 대로 되어도 상관없다. 삐직삐직 긁어대는 일은 이제 그만하자. 앞발도 뒷발도 머리도 꼬리도 자연의 힘에 맡기고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점차 편해진다.
고통스러운 것인지 다행스러운 것인지 모르겠다
물속에 있는 것인지 다다미 위에 있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간다.
어디에 어떻게 있든 차이가 없다.
다만 편할 뿐이다.
아니 편하다는 느낌조차 없다.
세월을 베어 버리고, 천지를 갈가리 부수어 신비의 평온함으로 들어간다.
나는 죽는다. 죽어 이 평온함을 얻는다.
평온함은 죽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기쁘고 기쁜지고.
고양이는 고단한 세월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평행우주 속 다른 생 또한 고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양이는 태어나자마자 고물상을 하는 부부에 의해 키워지다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 졌다. 그러나 대부호였던 집안이 몰락하면서 다시 양자로 보내졌다. 9세 때에 양부모가 이혼하자 양어머니와 함께 본가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친부모를 조부모로 알았다고 한다. 14세에 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20세 때에 맏형과 둘째 형이 죽었다. 24세 때에는 연인이었다는 설도 있는 형수가 입덧 때문에 죽자 큰 충격을 받았다. 27세에는 폐결핵에 걸렸다. 30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내는 도쿄에서 아이를 유산하였다. 아내는 심각한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며 강에 몸을 던졌으나 어부에 의해 구해졌다. 결혼 후 4년 3개월 동안 6번의 이사를 하고 아내와 불화하는 등 가정적으로 평탄지 못했다. 문부성 국비유학생으로 영국 유학길에 오르지만, 일본인으로 영문학을 연구하는 것에 대한 위화감 때문에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한 이듬해 제자가 폭포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신경쇠약이 더 악화된다.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 38세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연재를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작가로 살아갈 뜻을 굳히고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작가 생활을 시작하며 얻은 위장병으로 고생하다 49세에 세상과 이별하고 말았다.
고양이도 작가도 죽었으니 평온함을 얻었을지 모르겠다. 먹고살자고 시작한 글이 자신의 대표작이 될 줄이야 작가도 고양이도 몰랐으리라. 그러나 자신이 고양이라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된 글쓰기는 10년간의 작가의 삶을 불태우기에 충분한 촉매가 되어 주었다. 앞발도 뒷발도 머리도 꼬리도 자연의 힘에 맡기고 저항하지 않기로 하고 시작한 글쓰기가 그의 인생의 정체성이 되어 주었다. 외국인으로서 영문학을 연구하느라 애를 쓰는 일, 남들 다 하는 가정생활을 유지하느라 애를 쓰는 일,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도리를 다하느라 애를 쓰는 일.. 그것에서 자유롭게 해 준 글쓰기야 말로 곽연무성(廓然無聖), 무하유향(無何有鄕)의 삶을 살게 해 줄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곽연무성(廓然無聖) : 망집을 떨쳐 버리고 깨달음의 높은 경지에 오르면 성인과 범부의 차이가 없다는 뜻.
*무하유향(無何有鄕) : [장자]에 나오는 말, 작위가 없이 자연 그대로인 이상향.
결국 고양이는 쥐를 잡지 못했다. 고양이의 무하유향(無何有鄕)은 쓸모없는 똥 주걱 취급을 받더라도 가만히 있는 것이요. 소세키의 무하유향(無何有鄕)은 글 쓰는 일이었으니, 나도 삐직삐직 긁어대는 일 따위 그만하고 닥치고 마법이나 부릴 일이다.
[위즈덤 레이스+Book100] 00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