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리의 문화산책
산책#2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세줄평
ㅇ '악'에 대한 고민을 담은 고전
ㅇ 당신의 교양을 위한 필독서
ㅇ 철학책은 가끔 지루하다
책 정보
저자/한나 아렌트
옮긴이/김선욱
출판사/한길사
세기의 재판
1961년 4월 11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한 나치 전범에 대한 공개 재판이 진행됩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 계획의 실무를 책임진 사람입니다. 무고한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한 악마 같은 인간의 최후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히만의 체포 소식을 듣곤 신문사에 특파원을 자원해 재판에 직접 참관합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이 때 한나 아렌트가 기고한 재판참관기를 엮어 낸 책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전한 재판 양상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모두의 예측과 달리 아이히만은 ‘악마적’인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모범적인 시민’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고,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했다 주장합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친절한 이웃이었고, 바람직한 가장이었습니다. 유대인을 증오하지 않았으며 나치의 광신자도 아니었습니다.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는 이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고민합니다. 그 과정에서 ‘악의 평범성’을 떠올립니다. 모두가 당연하게 저지르는 일이 악이 될 수도 있다는 개념입니다. 조금 바꾸어 말하면, 악을 행하면서도 스스로는 전혀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는 뜻이죠. 나쁜 일을 반복하다 보니 익숙해져서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되는 상황과는 다릅니다. 충격적인 일을 일상적으로 겪다보니 무감각해지는 상황과도 다릅니다. 애초에 자신이 악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집단 때문일 수도 있고, 권위에 대한 복종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뭔가 섬뜩합니다. 내가 지금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행동들이 어쩌면 악일지도 모른다니. 대량학살 같은 엄청난 악은 아니더라도, 이 사회의 조그만 악들을 답습하고 있진 않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아이히만처럼 조직/집단에 매몰돼 따라 어떤 악행들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한국의 아이히만
아이히만 같은 사례는 예외적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한 국가가 광기로 뒤덮여 있던 나치 치하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구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당장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싶은 충격적인 뉴스 중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들여다보고픈 사례가 있습니다.
윤 일병사건과 임 병장사건을 기억하시나요? 윤일병은 부대 선임들의 집단적인 괴롭힘 끝에 사망했고 임병장은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총기로 부대원들을 사살했습니다. 특히 윤 일병 사건의 가해자들은 악의 평범성이 군에서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 그대로 보여줍니다. 마대자루가 부러질 때까지 허벅지를 때리고, 절룩거린다는 이유로 가슴과 다리를 또 때립니다. 치약을 먹이고, 바닥에 흘린 음식을 핥아먹게 합니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다가 결국 음식을 먹던 중 폭행을 당해 기도폐쇄로 사망합니다. 이들의 악행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충격적인 점은 주모자를 제외하면 모두 비교적 ‘평범한’ 사람들로 여겨져 왔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평범한 자식, 친구, 연인이었겠죠. 그랬던 사람들이 군 조직에선 악행의 일부가 되어 한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고립된 공간, 집단의 권위아래서 이들은 공범이자 방관자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일련의 사건 중 하나를 끄집어내 봅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국가가 주도해 문화 예술계를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헌법을 끌고 올 것도 없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대한민국 수준이 이 정도였나요....... 그런데 이런 악행을 저지르고 끝까지 은폐하려 들던 당사자들은 반성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히만처럼 ‘몰랐다’ ‘난 시킨 일을 했을 뿐이다’며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습니다. 사실상 주모자에 해당하는 이들이 할 말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형량을 감해보려는 사법적 판단이겠지만, 그랬다 칩시다.
이유가 어찌됐든, 우리는 이런 추한 모습이 되고 싶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악행을 저지르고 싶지도 않고, 저질러 놓곤 원인을 조직에 돌리는 찌질함도 싫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처방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인은 ‘무사유’다.
음, 조금 뻔한 얘기 같기도 합니다. ‘무사유’,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하지 않으니 자신도 인지 못한 악행을 저지르는 거겠죠. 한나 아렌트의 설명과 저의 생각을 합쳐서 좀 더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아렌트는 주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개인의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로 ‘무사유’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옳은 말이기에 당연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의 일부가 되어 살아갑니다. 국가, 군대, 직장, 가족, 친구들....... 그 일부로 살다 보면 조직의 공통된 상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상식이 건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악인이 될지도 모릅니다. 나치의 비뚤어진 애국심, 어느 소대의 악랄한 관행, 대기업의 횡포, 가족의 탈세, 친구들의 절도행위를 마주쳤을 때 생각하길 멈출지도 모릅니다. 양심에서 시선을 거두고, 내가 속한 집단의 규범에 나를 내맡기는 일은 쉽습니다. 우리가 욕하는 사람들의 악행만큼은 아니겠지만 본질적으로 같을지도 모릅니다.
불편합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이 ‘불편함’을 알려주는데 있습니다. 나치 전범, 살인을 저지른 병사들, 문화예술인을 탄압한 공무원들은 나와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을 옹호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의 악행으로 인해 처벌받았고, 또 제대로 처벌 받을 것입니다.(꼭....!!)
우리는 이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속한 곳을 좀 더 옳게 만들고, 잘못된 것에 부끄러울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악의 평범성 개념을 통해 그 계기를 제공합니다. 도덕적 고민 없이 살고 있는 나, 일상을 살아내기 바쁜 나에게 진지한 자문을 해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