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몽쇄언(述夢瑣言)] 뒤바뀜(轉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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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기 전에 꿈속의 자신을 보지 못한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 꿈속의 자신을 보지 못한다.
태어나기 전에 이 몸이 없었다.
죽은 후에 이 몸이 없다.
그렇다면 몸이란 없는 것이다.
 
꿈을 꾸기 전에도 마음이 있었다.
깨고난 후에도 마음이 있다.
마음이 있으니 꿈을 꿀 수도 있고 깰 수도 있다.
태어나기 전에도 마음이 있었고,
죽은 후에도 마음이 있으니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러하다면 마음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몸을 기르고,
몸을 수련하여 마음을 기르는 것을 알지 못하니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술몽쇄언/전도(轉倒)



정확하게 말하자면 몸도 없고 마음도 없는 것이다. 다만 몸과 마음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과정이 지속될 뿐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



무상(無常)이란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 영원한 ‘있음과 없음’은 한마디로 엉뚱한 상상일 뿐이다. 차라리 이렇게 노래를 부르자.


엉뚱한 상상

그런데 몸과 마음에서 누가 먼저냐고 묻는 꼰대가 있다면,

마음이 먼저라고 말한다면 유심론(唯心論)일 뿐이고 몸이 먼저라고 말한다면 유물론(唯物論)일 것이다. 그렇다면 심물일원론(心物一元論)이라고 적당히 타협해도 될 것 같지만, 일원론(一元論)은 최초의 원인이 있다는 것으로 우리의 사고나 경험과학으로 확실히 증명할 수 없고 대충 얼버무리는 꼴이 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거나 대세를 따라갈 뿐이다. ‘종교 혹은 주의(ism)’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존재 자체, 여여(如如)’ 즉, 그렇고 그러하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다. 언어란 대상의 전체를 하나의 단어로 고정, 분리하여 온전하게 경험하지 못 하게할 뿐이다. 그런데 누가 뭐뭐 하더라라고 말을 듣는 순간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우선 감정이 일어난다. 온전함의 부분을 표현한 것인데,

불교에서는 우리가 꿈과 전생을 기억하는 이유가 마음이 끊이지 않고 상속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 찰나의 마음은 이전 찰나의 마음과 같지 않기 때문에 이전 찰나의 마음과 똑같다고 할 수 없고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이전 찰나의 마음을 기억한다는 뜻에서 똑같고 그 마음을 통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발생한다는 의미에서 다르다. 그리고 이전 찰나를 ‘기억하지 못함’이 있으므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은 이전 찰나의 마음을 그대로 포섭하되 이전과 다르게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소멸하고 일어나고 소멸함을 되풀이할 뿐이라고 한다. 혹자는 이것을 의식의 진화 혹은 퇴보라고 표현한다.

마음은 끊이지 않고 지속하기 때문에 마음은 없다고 결론 내릴 수도 없다. 하여튼 마음의 ‘있음’과 ‘없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물질인 ‘몸’의 경우는 이전과 이후의 ‘몸’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으므로 ‘있음’과 ‘없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우리의 5감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방 상좌불교에서는 물질의 생성과 소멸의 속도보다 마음의 생성과 소멸의 속도가 18배 빠르다고 한다. 여기서의 속도라는 개념도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물질이 한 찰나에 일어나고 소멸하는 과정 동안 마음은 18개 찰나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이 물질을 인식하고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조: 눈뜨고 꾸는 꿈

물질과 마음의 수명.png
일묵스님의 아비담마와 반야심경에서

사람들은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몸을 기르고,
몸을 수련하여 마음을 기르는 것을 알지 못하니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마음이 몸보다 주체적인 것은 확실한데 우리는 몸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몸이 의미하는 바는 ‘나’를 대표하는 정신과 물질의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보자기일 뿐인데, 바로 이 ‘몸’에는 ‘나’를 대표하는 명성, 재물, 권력 등의 규모가 ‘나’의 행동에 의해서 ‘나’에게 시시각각 녹아들어간다. 이러한 것들이 삶의 중심이 되어 그 속의 주체인 ‘마음’을 제멋대로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 마음의 주체도 마음이다. 화가 일어나건 기쁨이 일어나건 그 ‘나’가 마음먹기 나름일 뿐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일어나거나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바로 이 ‘나’라는 몸에 있다. 어느 순간부터(아주 어릴땐 안 그랬던 거 같다.)

몸의, 몸을 위한, 몸에 의한



몸을 보는 마음이 몸종이 되어버린 삶이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스팀 가격은 왜 안 올라갈까?)



전도된 삶을 즐기고 있을지도,


술몽쇄언(述夢瑣言)


프롤로그
눈뜨고 꾸는 꿈/EMDR(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요법)을 아시나요?
스스로 불러옴(自求)/스팀의 떡락과 나의 자세(나는 낭만적인 선구자다)
징조와 경험(徵驗)/부제: 고요함의 필요성
마음에 물음(問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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