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상사를 통해 보는 블록체인 시리즈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 블록체인에서 다시 태어나다
‘비트코인으로 성공한 고졸 출신의 증권브로커, 경제 평론가 활동으로 경제사상을 새롭게 정립하고 국회의원의 자리까지 오르다!’
우리의 가까운 미래에 저런 인물이 등장한다면 어떨까요. 언론들은 위와 같은 자극적인 제목을 띄우며, 앞 다투어 그의 성공스토리를 써내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그만큼 오늘날에도 굉장히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출신성분을 지금보다 훨씬 더 따졌던 19세기에 실제로 저런 인물이 있었다고 하면 믿어지시나요?
경제사상사에서 애덤 스미스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평가되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삶이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증권업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리카도는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일찍부터 증권업에 종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권에 대한 정규교육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5년 만에 큰돈을 거머쥐게 되죠. 일설에 따르면 수백만 파운드(현시세로 100만 파운드가 약 15억 원)를 벌어들였다고 하니, 그의 투자센스가 얼마나 남달랐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큰돈을 벌어들인 리카도는 27살의 어느 날, 휴양지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게 됩니다. 국부론의 탐독은 그동안 실용적인 경제만을 접했던 리카도에게 사상적 경제의 영감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약 10여 년 동안 경제학 공부에 정진함과 동시에, 영국 정치, 경제계의 여러 인사들과 친분을 쌓으며 마침내 37살의 나이에 경제 평론가로 데뷔하게 됩니다. 이미 살아있던 시절부터 달필달변으로 인정받았던 리카도는 이 직업을 잘 활용해서 자신의 인지도를 급격히 키워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쌓아온 명성을 바탕으로 40대에 국회의원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곡물법과 비교우위론
국회의원이 된 리카도는 공론장에 나타나 귀족 국회의원의 저격수 역할을 맡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그가 주로 주장했던 것은 애덤 스미스 시절부터 대두가 된 ‘자유무역’이었습니다. 중상주의의 금은축적이라는 명분 아래 실시되었던 철저한 ‘보호무역’은 애덤 스미스가 죽고 나서도 여전히 풀리지 못한 숙제였습니다. 특히 영국에서 리카도가 살던 시대에는 곡물법 문제가 한창 사회적 병폐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곡물법은 밀 1쿼터(약12.7kg)당 가격이 80실링이 될 때까지는 외국산 밀 수입을 금지한다는 조항이 담긴 법이었습니다. 문제는 80실링이 오늘날 한화 기준으로 약40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는데, 오늘날 밀보다 비싼 쌀 15kg이 약5만 원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너무나 터무니없는 기준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계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애초부터 밀을 수입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면 이 문제가 유야무야 넘어갔겠지만, 19세기 초의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인구급증과 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식량수요가 늘어났던 시기였습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여 곡물 값이 나날이 폭등하였으나, 곡물법으로 인해 수요를 충족시켜줄 수입길이 막혀버리는 바람에 곳곳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되죠.
리카도는 당시 이와 같은 문제에 비교우위론이라는 카드를 꺼내들면서 사상적 논란을 종결시킵니다. 비교우위는 애덤스미스의 절대우위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이론으로써, 두 세력이 무역을 할 때 한 세력이 모든 상품에서 우위를 점하더라도 기회비용을 감안하면 교역을 하는 게 두 세력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개념입니다.
표를 보면 이해가 더욱 쉬운데요. 어느 날 무인도에 박성빈과 김시민이라는 사람이 갇혔는데, 두 사람에게 최대한 많은 개수의 셔츠와 오두막이 필요하다고 가정해봅시다. 여기서 박성빈은 김시민보다 셔츠와 나무박스를 둘 다 더 빨리 만드는 상황이죠. 애덤 스미스의 절대우위론에 따르면 박성빈은 김시민과 거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두 상품 모두 박성빈이 우위를 점하고 있으므로 박성빈 혼자 셔츠와 나무박스를 만드는 게 이론상 더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에서는 박성빈이 두 상품 모두를 잘 만들더라도 김시민과 거래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컨대 두 상품의 생산성에서 모두 우위를 가지고 있는 박성빈이 80시간의 일을 40시간씩 나눠서 하고, 열위에 있는 김시민이 180시간의 일을 90시간씩 나눠서 했을 때 박성빈은 셔츠 10개와 오두막 4개, 김시민은 셔츠 15개와 오두막 3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회비용을 감안하여 박성빈은 80시간의 일을 모두 오두막 만드는 것에 쓰고 김시민은 180시간의 일을 모두 셔츠 만드는 데 쓴다면, 박성빈은 오두막을 8개, 김시민은 30개의 셔츠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 거래를 통해 둘이 셔츠와 오두막을 반씩 나눠가지게 된다면 박성빈과 김시민은 각각 15개의 셔츠와 오두막 4개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림1]과 비교했을 때 같은 시간동안 박성빈은 5개의 셔츠를 더 가지게 되고 김시민은 오두막 1개를 더 가지게 되는 셈입니다.
이와 같은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은 우리에게 타인과의 상호교환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자국의 국력이 타국에 비해 더 큼에도 불구하고 거래를 한다면 타국에게 적선해주는 것밖에 안 된다는 기존의 이론에 일침을 가한 개념이기 때문이죠. 비단 암호화폐 뿐만 아니라 실물경제에서도 보호무역으로의 회귀가 엿보이는 요즈음에 시사하는 바가 많은 이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차액지대론과 세이의 법칙
지금까지의 리카도는 마치 서민들을 대표하여 국회에서 싸우는 투사의 모습과 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곡물법 반대는 어디까지나 국익 증진과 당시의 중산층이었던 부르주아의 건전한 성장을 위한 주장이었을 뿐, 하층민을 위해 벌인 행동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제시한 또 다른 이론인 차액지대론에서 잘 나옵니다. 차액지대론은 한마디로 말해서 지대의 비옥도에 따라서 이윤이 변화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대의 비옥도는 불변이 아니기 때문에 지대수요자는 비옥한 땅을 찾아 자리를 옮겨 다닐 것입니다. 리카도는 여기서 긴 시간을 두고 보면 지대의 비옥도는 어차피 번갈아가면서 올라가게 되어있으므로, 결국 평균이윤은 모든 지대가 똑같아지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차액지대론에 의거한 이윤은 어떤 방식으로 분배되는 것일까요? 리카도는 이윤이 지주, 자본가, 노동자에게 돌아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윤이 분배되는 과정에서 임대로 인해 얻는 지주의 수익은 동일한데, 수확량이나 생산량은 시시각각 변하므로 이 과정에서 지주의 이익만 커진다고 이야기합니다. 불로소득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던 것이죠.
리카도는 이 부분에서 조금 특이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노동자의 임금은 증감 없이 그들 종족이 영속할 수 있게 하는 데 필요한 가격이므로 진정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자본가를 키워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노동자에게 높은 임금이 주어지면 인구 증가를 조장하고 어차피 그에 따른 경쟁으로 임금이 다시 하락할 것이므로, 자본가가 투자를 통한 선순환으로 경제를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19세기의 지배적 사상을 만든 또 한 명의 아웃사이더가 프랑스에서 활동합니다. 그의 이름은 ‘장 밥티스트 세이’이며, 이른바 ‘세이의 법칙’이라는 이론으로 20세기 초까지 주류경제학의 정신적 지주가 됩니다. 젊었을 때 오늘날로 치면 스타트업 기업을 창업했다가 쫄딱 망한 그는, 보험회사원과 잡지사 편집자를 거쳐 대학 교수의 자리에 까지 앉게 되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는 공급이 이루어지면 수요가 저절로 따라오기 때문에 시장은 언제나 균형을 유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단, 이 과정에서 가격은 항상 유연하게 조정되어야하며 수요가 충분하게 유지되어야한다는 단서를 덧붙였습니다. 이 주장은 그의 단서였던 가격 유연성과 수요 충분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제시하면 쉽게 반박될 문제였지만, 그때마다 ‘일시적으로 그 조건이 깨질지라도 어차피 장기적으로는 균형에 이르게 되어 있다’라는 마법의 해법으로 주류경제학을 주름잡게 됩니다. 실제로 20세기 초까지 이 주장은 반박되기가 힘들어서 공급중심의 사상을 찾던 기득권들에게 탈출구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노동가치설
등산로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산세가 험해서 일시적으로 만든 길을 잔도(棧道)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자동차조차 지나갈 수 없는 이런 잔도에서 짐을 대신 운반해주는 짐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60~70kg 짐을 짊어지고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잔도를 오르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한 달 동안 벌어들이는 수입은 약 2000위안, 우리 돈으로 35만원이 안 되는 금액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걸 보고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적어도 유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블록체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최초의 암호화폐이자 블록체인인 비트코인의 증명방식은 POW(proof of work), ‘작업증명’입니다. 보상을 얻는 과정 자체부터가 채굴기라는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이죠. 그런데 최근 POW의 잠재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채굴세력의 담합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통해 앞으로 내가 투입한 노력만큼 보상이 안 나올 수도 있겠다는 본능적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POW 채굴세력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땀 흘려 일한만큼 정당하게 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결국 이것은 블록체인에서조차 문제점이 제기될 정도로, 인류 역사에서 영원히 풀리고 있지 않은 숙제 중 하나입니다.
경제학사에서도 애덤 스미스가 상품의 가치는 노동을 통해 매겨진다는 체계적인 노동가치설을 처음 제시한 후, 많은 학자들이 그 방법에 대해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오늘 이야기한 데이비드 리카도도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설을 이어받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인물 중 하나입니다. 스미스는 모든 상품의 가치가 노동을 통해 매겨진다고 했지만, 리카도는 기계나 도구에 의한 고정자본 또한 애초부터 인간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졌으므로 상품의 값에 포함시켜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동가치설도 상품의 성질에 따른 가격 차별성이나 불변자본(기계, 도구 등)의 구체적인 성격을 설명해내지 못했습니다. 예컨대 그의 차액지대론에서는 지주의 불로소득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정작 자본가의 불로소득으로 비추어 질 수 있는 불변자본을 비판하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또한 노동자의 임금을 최저생계에서 더 올리면 무분별한 생식 때문에 다시 임금이 자연적으로 저하하게 된다는 그의 논리는 노동가치설의 본질을 흐리는 발언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학자들이 노동가치설의 논제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있는 동안, 영국에서는 이제 산업혁명이 완전히 자리 잡게 됩니다. 더 이상 기계 때문에 우리의 일자리가 뺏긴다는 러다이트 운동도 일어나지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 공장의 생활에 다들 익숙해져 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수시로 움직이는 활화산보다는, 힘을 조용히 모았다가 터트리는 휴화산이 더 파괴력이 세다고 했던가요. 화려한 산업혁명의 이면에서 조용히, 그리고 어둡게 자라나고 있던 병폐는 결국 리카도와 세이보다 더한 어떤 아웃사이더 학자 한 명에 의해 그 뇌관이 터지고 맙니다.
SH
참고문헌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저, 이승환 역, 김영사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에 대하여, 데이비드 리카도 저, 권기철 역,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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