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보의 지성


사자성어,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쫄보의 소심한 짓거리일 뿐이라고 치부 되기도 한다. 그 의미의 감각적 체험으로 어렴풋하게 이해되었던, 아니 전혀 어렴풋하지 않은 기억이 생생하게 불현듯 소환되었다.

아마 10살 즈음? 초딩 2년이던거 같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또래의 자녀들을 둔 학부모들은 자연스럽게 친해진다.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그 엄마들과 작당하여 형과 나를 포함한 대여섯 명 수컷 아동이 어느 추운 겨울 날 고래를 잡혔다. 마취때문인지 수술은 아프지 않았다. 별로 기억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사건은 며칠 후 일어났다. 성도착적 쾌락이든 종족번성의 인간의무를 위해서든 훗날 소중하게 쓰여질지 모르는 그 마름질된 고래의 상태 점검을 위해 그 아동들은 병원 치료실 방 한구석에서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형아부터 간호사 누나가 고래 대가리 밑의 하얀 천 목도리를 푸는데 이때부터 그 형아가 고래고래 악을 지른다. 그 다음 빨간 약을 뭍힌 흰 천으로 고래 대가리 주위를 살짝 쓰담쓰담 해주는 데 더 울어 재낀다. 집행 당하는 형아의 아우성, 그걸 보고 있는 기타 등등 수컷 아동들의 시퍼런 얼굴 표정에 공포감은 트라우마 그 자체였다. 나는 계속 징징거리며 울어 대다가 엄마한테 짜증 섞인 욕 바가지를 재대로 들었다.

그런데 예상 밖이다. 막상 상황에 직면하니 생각보다 안 아팠다. 물론 나도 울어댔지만 악질러서 아픈 목의 통증 때문인지 나의 고래 대가리가 아픈 것인지 헤깔렸다. 40여년이 지나간 훗날 그 기억을 고찰하자면 이게 바로 유비무환의 변태이다. 과하게 걱정하고 겁내다보면 막상 일이 들이닥칠 때 생각보다 견딜만 하다. 학창 시절 지난 성적 대비 떨어진 점수만큼 선생 XX한테 궁둥이를 두들겨 맞을 때 겪었던 대기 관람자와 체험자 느낌의 부조화도 유비무환의 변태적 적용 사례이다. 극대화 된 두려움과 공포가 막상 겪게 되는 고통을 충분하게 약화 시킨다. 기대감이 크면 실망도 커지는 것처럼,

이러한 변태적 지성이 2주 후에 겪게 될지도 모를, 내심 무탈하게 지나가길 기대하지만, 고산병에도 유효하길 희망한다. CHOONZA ROAD in LADAKH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앞으로 10일 남았다. 라다크 여행기관련 서적들을 읽다 보니 고산병때문에 고생했다는 사연이 남일 같지 않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 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다는 유홍준 작가가 발굴한 명언을 바꾸자면 쫄아도 잘 보이고 보이는 게 죄다 쫄아서 예전과 같지 않은 듯 요런 글만 눈에 더 잘 띈다. 이에 고산병에 관한 예방과 대처를 정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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