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인이즘] 커뮤니티는 두 명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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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는 타인으로부터



혼자서는 커뮤니티를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타인과의 공동체를 이루기 전에 내적인 커뮤니티를 먼저 이루어야 하고, 그러려면 성격도 지랄맞은 나의 다중인격들과의 커뮤니티부터 안정을 이루어야겠지만.. 여튼 혼자서는 커뮤니티를 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커뮤니티라고 불러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어쨌든 한 명은 더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공동체, 커뮤니티라 부르려면 두 명, 최소한 두 명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나와 너 말이죠.



그리고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며, 남녀라면 결혼해서 애라도 낳고 하면서 커뮤니티가 확장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적어도 3명, 많게는 일가를 이루게 되는 겁니다. 자자손손 말이죠. 그러려면 그 한 사람은 누가 되어야 할까요?



커뮤니티에는 외부자가 필요합니다. 지구인의 커뮤니티에는 반드시 외계인이 필요합니다. 외부자와 구별되는 것이 커뮤니티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외부자가 필요하고 우리의 외부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외부자, 그와 커뮤니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외부자를 불편해합니다. 나와 꼭 맞는 외부자를 찾아보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외부자 역시 자신과 꼭 맞는 외부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혼자로 남아있고, 공동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모, 형제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커뮤니티조차 버겁습니다. 그들을 외부자라고 인식하기 보다 내부자라고, 자신의 분신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그냥 그렇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무차별적으로 주어졌으니 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내 책임도 아닙니다. 그러니 뭐 안 봐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원가족과의 관계를 등한시하거나 목을 매거나 하게 됩니다. 그게 전부이거나 그게 영 꽝이거나..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남과의 공동체를 시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전혀 다른 타인, 피도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 그와 공동체를 시작해야 합니다. 공동체는 두 명부터니까요. 그런데 그 한 사람 찾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운명처럼 잘도 만나는데, 나는 외톨이의 운명을 타고 태어났는지 주변에 온통 비호감들뿐입니다. 도대체 뭘 같이 해보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느끼는 타인도 역시 그렇습니다. 너에게 그렇습니다.



커뮤니티는 특정인으로부터



불특정 다수와 함께 동시에 커뮤니티를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커뮤니티는 언제나 소수로부터 시작되니까요. 불특정 다수의 커뮤니티는 시작하자마자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모였으니 말이죠. 어떻게 억지로 유지된다고 해도 그 안에서 다 끼리끼리 다시 무리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가만 놔두어도 지들이 그렇게 합니다. 패키지여행이라도 가보십시오.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하루 이틀 지나면 같이 다니는 무리들이 생겨납니다. 학교 다닐 때도 꼭 짝이랑만 친해야 했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케 알고 끼리끼리 뭉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네, 그렇게 시작됩니다. 세상의 모든 공동체는 특정인으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끌리는 사람들끼리 시작하는 겁니다. 그대의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특정하게 되는 겁니다. 누구든 반드시 그걸 합니다. 그러니 불특정인과는 공동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걸 누가 좋아합니까? 우리는 '아무나 오세요.' 하지만 아무나 올까 봐 걱정합니다. 그리고 그 아무나는 꼭 옵니다. 그래서 그 아무나를 어케 배제해 보려고 규칙을 세우고 규정을 만듭니다. 눈치 까라고 은따도 해보고, 안되면 대놓고 왕따도 해보지만, 그 아무나는 잘 나가지 않습니다. 운명은 너의 호불호에 관심이 없으니까요.



모든 공동체는 그래서 특정 소수가 시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특정한 너, 나를 특정한 너, 그리고 서로를 특정한 우리들. 그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물론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나와 너의 교집합 너머의 관계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 불편해지기 마련이고, 그걸 극복하지 못하면 공동체는 그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불편한 관계들로 자신을 확장해가는 그 특정 소수들의 용기가 공동체를 확장시킵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반드시 확장되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많은 선망의 공동체는 확장하기보다 폐쇄적입니다. 그런 공동체일수록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들어가기를 사람들은 욕망하니까요.





나와 너 사이에, 내가 특정하지 않은 자가 들어올 때 우리는 긴장합니다. 결혼한 관계에서는 그걸 불륜이라 부르고, 연인의 관계에서는 양다리라 부르며, 회사에서는 겸직 금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개방된 공동체에서는 회원 배가, 또는 전도라 부르고 영업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개방성과 폐쇄성에 따라 특정하지 않은 자의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불특정 다수를 타켓으로 하는 커뮤니티, 즉 확장성을 목표로 하는 커뮤니티에서는 개방성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쪽수가 많아야 좋은 걸 테니 한 명이라도 더 붙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특정 소수로 구성된 커뮤니티는 폐쇄성이 자랑이 되기도 합니다. 쪽수보다 커뮤니티의 질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죠.



뭐 당연한 얘기를 길게 하고 있습니다. 불특정 다수와 특정 소수는 그 성격이 분명합니다만, 불특정 소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특정 소수가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건 커뮤니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내 꺼 같은, 내 꺼 아닌 커뮤니티



뭔가 되게 어려운 얘기입니다. 누구나 와도 좋지만 언제나 소수일 것. 낭만적이고 환상적이기까지 합니다. 마음씨 좋고 입담이 구수한 주인장이 오래 운영해 온 가게에 드문드문 오가는 사람들의 편안한 분위기, 뭐 그런 게 연상됩니다. 하지만 다들 원하는 만큼만 있다가 떠나가는 공간에서 커뮤니티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지역사회가 발달한 나라들을 다니다 보면 그런 커뮤니티로 보이는 공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특히 일본의 중소도시에 가면 그런 공간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20~30년쯤은 한자리에 있었을 듯한 공간. 그리고 그곳에는 심지어 주인장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손님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들은 지역을 섬기고 지키는 일에 언제나 솔선수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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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금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들이 얼마나 서로에게 깍듯한지, 얼마나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지, 얼마나 겉으로만 마음을 주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문제를 만들지 않고, 서로의 삶에 간섭해 들어가지 않는 적절한 예의 바름이, 매우 단단하고 견고하게 서로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거리를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건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건 그냥 분위기 좋은 카페일 뿐입니다. 영화를 보듯, 드라마를 보듯, 남의 삶에서 비켜나 나의 인생을 누구와도 섞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칸막이에 둘러싸여 각자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건 휴게실에 불과할 뿐입니다.



공동체를 다루는 모든 영화와 드라마는 (어떤 영화나 드라마도 공동체를 다루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공동체의 갈등으로부터 비롯되니까요.) 바로 그런 아름다워 보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는 그 관계들의 허상을 하나씩 하나씩 보여주고,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숨겨진 갈등이 폭발하며, 마침내 뿔뿔이 헤어지거나 갈등을 극복하고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게 세상 모든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세상의 모든 공동체는 탐색기-환상기-폭풍기-적응기-안정기를 통해 형성되고 견고해집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관계가 다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갈등이 없는 공동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갈등을 피해 다녀서는 공동체를 이룰 수 없습니다. 관계가 생겨날 수 없습니다.



불특정 다수가 모였더라도 특정되는 소수의 관계들이 생겨나고, 그 소수들이 갈등을 극복하고 성장하여 확장되어가는 것. 그것이 모든 공동체의 성장과정입니다. 무엇도 예외는 없습니다. 중단되거나 누구도 모르는 사이 이미 거쳤을 뿐입니다.



교회 같은 커뮤니티



인류의 역사에 있어 가장 오래되고 생명력이 긴 공동체가 셋이 있습니다. 가족과 국가 그리고 교회입니다. 수많은 회사와 단체, 조직들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이 셋만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모습을 변화하면서도 존속해 왔습니다. 가족은 해체되고 교회는 쇠락하여 지금은 마치 국가만 남은 듯하지만, 교회는 그들이 섬기는 신을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살아남을 겁니다. 태양신의 생일날이 성탄절이 된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그 교회의 시작도 역시 특정소수로부터였습니다. 예수가 한 일이라고는 12명의 제자와 3년간의 공동체를 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도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렸고 그의 친구들 역시 예수를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히브리어라고는 들어 본 적조차 없는 이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조차 편의점, 치킨 집 보다 많은 교회를 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가족과 국가는 선택할 수 없고 주어지는 것이지만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2천 년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고 전 세계로 그 공동체를 확장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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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예수가 기적을 일으켜서 된 일이 아닙니다. 예수의 설교에는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여들었지만, 그들은 모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고, 그의 열두 명의 친구들조차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중에 한 명은 심지어 예수를 팔아넘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예수가 부활하자마자 처음 한 일은 친구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밥은 먹고 다니니..



특정 소수에 대한 열심. 그것이 공동체의 시작이고 핵심입니다. 모든 공동체는 그렇게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열심이 사라지는 지점에서 멈춰 섭니다.



네트워크는 점으로부터



암호화폐의 핵심은 커뮤니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써야 화폐의 기능을 하죠. 사용하는 사람이 없는 화폐를 어따 써먹겠습니까?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니 치장도 할 수 없고 어디 넣어 먹을 수도 없는, 숫자에 불과한 암호화폐. 그래서 암호화폐에는 사람, 사람과 사람의 공동체, 확장되는 커뮤니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물질이 아니니,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니, 만질 수도 냄새를 맡아 볼 수도 없고, 전기 나가면 쓸 수도 없으니 사용하는 사람들 간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신뢰의 커뮤니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신뢰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나오는 게 아닙니다. 쪽수만 많다고 다가 아닙니다. 시세 떨어지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이들과 맺은 맞팔이 신뢰를 보증해 주지는 않습니다. 신뢰는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비가 내리나 변하지 않는 것이고, 천둥이 치고 폭풍이 와도 흩어지지 않는 견고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걸 커뮤니티라 부르는 겁니다. 그런 걸 공동체라 부르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특정 다수들이 모여서 끼리끼리 수군덕 대다가, 물 빠지자 역시 사기였다며, 허상이었다며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몇 남지 않은 불특정 소수들이 언제나 내 가게에 들러 보팅 한번 해줄까, 오지 않는 계정들을 기다리며, 짐 싸들고 사라져 버린 고래들을 아쉬워하며, 파리 날리는 시간 장사나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백만 스파를 모은들 뭐 합니까? 쓸데가 없는데.. 계좌에 숫자만 늘어나면 뭐 합니까? 부루마불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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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더 공정합니다. 다 똑같이 가지고 시작하니까요.



남은 건 우리뿐입니다.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요?



나와 너가 만났으니 우리가 공동체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스팀시티는 단 한 사람을 찾았고 두 사람이 손을 들어 그 두 사람으로부터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한 명이 더 늘어 세 사람.. 마법사까지 네 사람입니다. 8명 남았습니다. 아닙니다. 60여 명이 위즈덤 러너로 참여했으니 예수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사라진 지금도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듣기에만 그럴듯한 이론이 아닙니다. 실체가 없는 망상이 아닙니다. 마법사의 삶의 경험입니다. 마법사가 단 한 사람에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였고, 또 그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자, 2년 만에 2만 명의 커뮤니티로 불어나는 것을 실제로 경험한 결과입니다. 그러니 믿어도 됩니다. 그때에도 마법사는 마법사였습니다. 그때에도 단 한 사람은 총수였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거두자 커뮤니티는 사라졌습니다. 그 한 사람은 마법사입니다.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하십시오. 공동체를 시작하십시오. 스팀시티 안 들어와도 좋으니 그대의 공동체를 만드십시오. 누군가를 특정하시고 그에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십시오. 그렇게 공동체를 이루고 나면 언젠가 우리는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암호화폐라는 커뮤니티, 스팀잇이라는 공동체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잔치를 벌일 수 있습니다. 누구도 끊을 수 없는 단단한 관계의 마디를 가진 진정한 네트워크를 연결해 낼 수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우리는 교회(사귈 交 모일 會)라 부를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를 코이노니아(Coinonia, Coin+Koinonia)라 칭하게 될 겁니다.



네트워크는 점과 점들, 공동체와 공동체들, 커뮤니티와 커뮤니티들의 연결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점과 점이 만나고 공동체와 공동체가 연결되는 지점에서부터 커뮤니티가 확장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암호화폐도 그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암호화폐의 네트워크도 그렇게 구성되는 겁니다. 허공에다 선 긋는다고 네트워크가 되는 게 아닙니다. 네트워크는 선을 이을 점과 점이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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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점.. 스팀시티가 그 점 하나를 만들었으니 그대도 점 하나를 만드십시오. 그리고 우리! 이읍시다. 그러면 시작되는 겁니다. 네트워크가 시작되는 겁니다. 진정한 코인의 세계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모래알처럼 흩어진 개인들이 타인과의 공동체를 구성하기 시작하는 것. 네트워크를 위한 점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



이것이 역중앙화입니다.







[코인이즘] kr은 커뮤니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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