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어 #4: Vocalize, Vocalise, Vocalese

간만에 돌아온 [문화영어]의 이번 회차는 일상기록/Music Box에 가까운 형식입니다.

요즘 팝은 거의 듣지 않지만, 혹시 우연에 의해서라도 이름이 보이면 일단 믿고 들어볼 수 있는 인물이 있다. 퀸시 존스(Quincy Jones)! 그 무엇을 하더라도 재즈의 느낌을 불어넣을 것이 확실한 사람이다. 시나트라는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밴드 지휘를 맡기고 Q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새끼 손가락에 낄 반지도 줬다고 한다. 그뿐이랴. 일단 퀸시 존스는 그 반짝이는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90년대 중반에 나온 퀸시 존스의 어느 앨범을 별 생각 없이 듣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뭔가 다른 일에 열중한 상태로 한 트랙이 스쳐갔는데,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의문이 생겼다. 내가 방금 들은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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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그냥 흔한 알앤비 풍의 곡이었는데 분명히 아주 익숙한 스탠더드 I'm in the mood for love의 커버곡이었다. 아니, 커버가 맞기는 한가?!

코드는 분명히 I'm in the mood for love 그 자체였다. 여기서 mood라고 해서 뭐 끈적한 뉘앙스의 외래어 '무드'는 아니고, '기분' 정도에 해당한다. '사랑하고 싶은 기분이야' 정도로 보면 되는 제목. 가수의 컨셉에 따라서는 섹시한 가사로 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포근하고 건전한, 그 시대에 맞는 노래이다.

이 곡으로 가장 날렸던(?) 가수는 프란시스 랭포드(Frances Langford)라는, 2차 대전 위문공연 전문 여가수이다. 거의 동시에 루이 암스트롱이 이 노래로 탑텐 안에 진입했고, 그 후 수많은 유명한 보컬들에 의해 불리게 되었다.

줄리 런던(Julie London)이 부른 I'm in the mood for love

그런데 내가 그 날 들은, 퀸시 존스가 90년대에 낸 음반의 곡은 분명 그 코드를 따르고, 연주 장르가 달라서 그렇지 곡 자체의 느낌은 같고, 멜로디도 그 멜로디인 것 같았고(사실 흘려들은터라 다시 들어보고자 한 것이지만), 잘 보니까 제목은 조금 달랐다. Moody's Mood for love(무디의 사랑하고 싶은 기분). 뭔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제목: 비슷함(약간 다르나 제목의 메인 포인트 mood for love는 그대로 따옴)
코드/분위기: 비슷~같음

설마 표절도 아닐테고, 재해석이라기엔 굳이 다른 제목으로 할 필요가 있나 싶고, 그럼 샘플링이라고 봐야 하나. 무디는 분명 사람 이름인데, 무디가 누구지?...

살펴보니, 일단 아티스트 이름 중에 제임스 무디라는 사람이 끼어 있긴 했다. 제임스 무디라고 하니 알 것도 같았는데,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같은 유명한 연주자들의 이름 언저리에서 기억이 나는 이름이었다. 여러 의문을 안고 다시 들어보았다.

Moody's Mood for Love (Quincy Jones feat. James Moody, Brian McKnight, Take 6, Rachelle Ferr)

다시 집중해서 들어보니, 그냥 I'm in the mood for love와 우연적으로 비슷한 점들이 있는건가 싶기도 했는데, 기본 틀은 분명히 그 스탠더드가 맞을 것이라 확신했다.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런 경우를 뭐라 불러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그래서 알아보았다.

1949년에 제임스 무디라는 색소포니스트가 녹음한 I'm in the mood for love가 있었다. 그럼 분명히 그 스탠더드가 맞는데, 왜 Moody's mood for love라고 제목이 따로 붙었을까?

알아낸 답은 이랬다. 제임스 무디는 유명한 스탠더드 I'm in the mood for love에서 여느 뮤지션처럼, 재즈/기악 특성상 자유롭게 솔로 파트를 연주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연주 자체에 착안한 가수가 그것을 하나의 독립적인 멜로디처럼 사용해서 가사를 붙이고 노래로 만들었던 것이다.

분명 1949년의 제임스 무디는 특별히 솔로를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해놓고 연주하지 않고, 다소 즉흥적으로 연주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솔로 연주가 1952년에 에디 제퍼슨(Eddie Jefferson)에 의해 새로운 하나의 노래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래서 현재 제임스 무디의 그 I'm in the mood for love 솔로 연주를 찾아보면, 아예 제목부터가 Moody's mood (for love)로 표기가 되어 있다. 분명 원곡에서 따온 틀이 확실하고 그 중요성도 상당한데, 독창적인 멜로디이다.

제임스 무디가 연주한 I'm in the mood for love → Moody's mood for love

결국 제임스 무디의 솔로는 I"m in the mood for love가 아닌, Moody's mood for love라는 제목으로 또 많은 보컬들에 의해 불려지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뒤늦게 나온 버젼이 내가 그 날 들은 퀸시 존스의 것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 죠지 벤슨이 패티 오스틴과 부른 버젼이 매우 부드러워서 유명하고,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부르기도 했다.

처음으로 제임스 무디의 솔로 연주에 새로운 제목과 가사를 붙여서 불러준 가수는 에디 제퍼슨이지만, 내 마음에 가장 들었던 것은 1952년에 킹 플레져(King Pleasure)가 부른 버젼이다. 꼭 대충 집에서 부르듯 정제되지 않고 생생한데다가, 악기의 소리에 가사를 입혀 부르는 느낌이 살아있다.

킹 플레져, Moody's Mood for Love

그럼 이렇게 솔로 파트만으로 독립적인 노래가 탄생하는 경우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런 경우는 보컬리즈(Vocalese)라고 한다. 재즈 판에서만 통하는 당시의 신조어였던 셈인데, Chinese, Japanese 등의 "언어"와 흡사한 철자를 차용해서, 가사가 없는 연주에다가 보컬로 부를 수 있는 언어, 즉 가사를 입혀서 부른 결과를 가리킨다. Moody's Mood for Love라는 곡은 하나의 보컬리즈 곡인 것이다.

보컬리즈라는 단어를 만들 때, 1차적으로는 악기의 소리를 목소리로 바꾼다는 의미로 '보컬화'한다는 의미에서 Vocalize(보컬라이즈: 소리내다, 말하다, 말로 표현하다)라는 단어를 참고했을 것이다. 사실상 가사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기존 곡의 재즈 솔로에 가사를 입히는 일이었으니까.

2차적으로는 보칼리제(Vocalise; 영어식으로는 vocalese와 별 다름 없는 발음의 보컬리즈)에서 차용이 이뤄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보칼리제는 일종의 연습곡(에뛰드)의 일종으로, 목소리 단련을 위해서 모음만으로 또는 별다른 뜻이 없는 소리들을 사용한 가사를 붙인 곡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별로 클래식에 취미 없어도 들어봤음직한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일 것이다. 흔히 소프라노로 듣는 곡이니까 테너를 골라봄!

니콜라이 게다(Nicolai Gedda)가 부른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아아아아'등으로 이루어진 가사로 다소 악기처럼 목소리 단련을 하기 위한 보칼리제(Vocalise)에서, 악기로 연주한 솔로 멜로디를 목소리로 바꾸어서 부르는 보컬리즈(Vocalese)라는 단어를 만들 힌트를 얻은 듯.

어쨌든, 제임스 무디와 스탠더드I'm in the mood for love, 그리고 새로운 곡Moody's mood for love의 탄생에 얽힌 이러한 배경 이야기가 내게는 상당히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이미 유명한 히트곡을 연주한 것에 불과한(?) 솔로 파트에다가 자체적인 제목, 공들여 쓴 가사, 나아가 정체성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다.

제임스 무디는 에디 제퍼슨의 곡이 성공한 이후로, 제퍼슨을 비롯해서 여러 번 다른 보컬들과 함께 Moody's mood for love의 녹음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렇게, I'm in the mood for love라는 스탠더드에 한해서만큼은 그저 한 명의 연주자로 남을 수도 있었던 제임스 무디의 이름을 딴 이 곡은 새로운 스탠더드 곡이 되었다. 아무리 유명한 보컬이라도 노래 제목에 이름을 올린 경우가 있던가? (물론 이름이 원곡 제목의 Mood와 겹치는 Moody였다는 사실 역시 인상적으로 작용해서 생긴 결과이기도 하리라는 생각도 들지만...) 비교적 최근에 스콧 해밀턴 등이 연주한 영상을 보면 (초반에 원곡을 연주하는데도) 아예 원곡에 대한 언급 없이 Moody's mood for love라는 스탠더드로 지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노래에 대해 찾아보기 전에 제임스 무디라는 이름을 디지 길레스피와 연관해서 기억을 하고 있었다는 말을 앞서 했다. 실제로 무디는 길레스피 등과 활동을 해왔었지만, 1949년의 연주와 1952년의 Moody's mood for love가 성공하게 되면서 아티스트로 부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 연주가 그의 음악 인생의 한 방이 된 셈이다.

누군가의 스타일을 따라해보거나, 글을 필사하거나, 음악을 연주한다거나 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제임스 무디의 연주가 분명 기존 곡에 대한 자신만의 느낌을 담은 해석이었고 기존의 틀 위에서 자유로움을 지향했듯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그 틀도 무색해질 정도로 내가 하는 것들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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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어 1: 리히텐슈타인과 Stardust
문화영어 2: Paris의 판단
문화영어 3: 사제와 큐레이팅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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