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정리되지 않은 글'의 의미로 의식의 흐름을 거론하지만, 내가 쓰는 것 중에는 과연 의식의 흐름이 아닌 글이 있을까 싶다. 논문을 쓸 때에도 자료를 읽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동시에 내 논지를 세웠고, 써내리는 것은 그 후, 거의 단숨에 이루어졌었다. (물론 그런 글의 경우, 어느 정도의 문단 이동은 필요했다.) 정리가 된 상태에서 쓴다는 편이 맞겠지.
혼자 보는 글에 습관을 제대로 들이기 전부터 남들에게 읽혀야 하는 글을 썼지만, 학술적인 배경이나 목적이 있는 독자층을 상대로 했기 때문에 굳이 노력까지 해가면서 친절할 필요는 없었다. 자료를 소화하고 나만의 가설이 뚜렷한 상태에 도달했다는 전제 하에, 의식의 흐름에 따라 내가 쓴 글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 그런 특수한 독자층을 두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하지만 세상엔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꼭 위와 같은 생각에서 출발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밥 먹었냐" 등의 말을 하는데만 사용하던 한국어, 한글로 의식의 흐름을 펼쳐놓게 되었다. 사적인 생각들을 표현할 필요를 느껴서였을까.
가입 초기에 이곳에 쓴 글 중, 특별히 불친절한 글이 하나 있다. 난해해서라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자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부치지만 않았지, 편지가 맞다. 부치지 않은 이유는 그 대상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복합체였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오마주 프로젝트로 그 글, 아니 정확히는 그 글을 썼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원래 같으면 어느 정도의 (내 기준에서) 친절한 서문을 올려두고 본문을 이어 붙이면 그만이다. 그러나 오늘은 불친절한 그 글을, 보다 보편적으로 이해 가능한 내용으로 다시 쓰기로 한다. 봄에 썼던 글이지만, 분위기를 이 시점에 맞춰 여름으로 바꿔보기로 한다. 그리고 원글 링크만 맨 아래에 걸기로.
W에게,
드디어 해가 졌어. 눅눅한 여름이지만 저녁은 제법 상쾌하니, 참을만해.
나는 가을과 겨울을 좋아해. 알고 있지? 혹시라도 널 봤던 추운 그 날이 좋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히 해둔다.
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체 모를 향기가 집 밖을 에워싸고 있어. 평소에는 기억에서 희미해지는 존재이지만, 저녁마다 바다를 따라 걷기 전에 마주치는, 의외의 기쁨이지. 봄에 어떤 꽃이 피었던 것 같고, 지금은 그 자리를 다른 꽃이 차지하고 있겠지만, 어쨌든 둘 다 내 하루를 장식해주고 있어.
그런데 알아? 봄에 그 꽃이 처음 피었을 때, 첫 1초 동안은 역하게 느껴졌어. 마치 거름 냄새처럼 말이야. 그때 네가 떠오르더라. 아, 널 그렇게까지 싫어할 정도의 감정 소비는 하고 있지 않으니 오해는 하지 말고...네가 한 말 때문이야. 언젠가 내가 속이 안 좋아서 앓고 있을 때, 전화로 네가 그랬지. "장미 향기도 과하면, 배설물에서 나는 냄새와 구분할 수 없다"고.
나는 너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래. 하지만 나와 너무 가까이 부대끼고 있으면, 장미향이 거름 냄새처럼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네가 점점 싫어졌었지. 나는 네게 나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고, 무색무취로 있어주길 바랬을 거야. 그래서 네가 네 향기를 내게 자꾸 들이밀수록 네가 싫어졌었지.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고, 너와 연락을 끊은 이유들조차도 이제 내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어. 그렇다고 다시 전처럼 알고 지내고 싶은 것은 아니야. 그냥, 거리를 두니 다시 어느 정도의 향기처럼 느껴지는 기억들 때문에 펜을 들었을 뿐이야.
궁금하네. 이렇게 말하면 너는 화가 날까? 너는 나 때문에 기분이 틀어지기도 하고 빈정 상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삐지기도 했지만, 한번도 내게 화를 내본 적은 없었잖아.
나는 항상 너에게 직설적이었어. 그냥, 그럴 수 있었으니까. 너는 내 직설적임을 싫어했다기보다는, 내가 항상 네게 직설적일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를 싫어했지. 그럼 나는 뭘 싫어했을 것 같아? 네가 감히 너의 가슴 속에서나마 반항한다는 게 싫었어.
그러나 오늘은 그 얘길 하려는 게 아니야.
노트르담의 성당, 위고의 그 소설 기억나? 여러 번 영화화되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 말도 안 되는 해피 엔딩으로 탈바꿈한 적이 많아.
원작대로라면, 결말에서 집시 소녀는 교수형을 당해 죽지. 그녀를 낳자마자 잃어버렸던 어머니는 딸의 처형 직전에야 딸을 알아보게 되는데, 마음이 무너져 내려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아.
집시 소녀가 사랑한 군인은 모든 것을 망각해버리고, 그녀를 애증했던 성직자는 나름대로의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그리고 노트르담 성당의 종을 울리던 추한 곱추는 집시 소녀의 무덤까지 따라 들어가서, 그 옆에서 죽음을 택해.
비극 같지만, 굉장히 현실과 닮아 있는 소설이야. 비록 현실이라는 것이 처형 당하고, 죽고, 죽이고 하는 극단적인 양상들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말이야.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존재들을 아름다운 집시 소녀라고 부르기로 하자. 집시 소녀들은 너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별로 생각도 영혼도 없어 보이는 미남자에게 마음을 주곤 해. 아마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녀들에게도 있는 호르몬 작용 때문일테지만 별로 아랑곳하지 않아. 이렇든 저렇든 초기의 그 모습만은 아름답게 보일테니까.
그들이 사랑하는 금빛 머리의 군인은, 너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가치가 없어 보일지도 몰라. 사랑을 많이 받아봤으니 너보다 가벼울 것 같고, 너보다 겉모습이 화려하니 바람둥이일 것만 같지. 금빛 머리의 군인이 집시 소녀를 사랑한다 해도, 당장의 욕구가 주를 이룰 거라고 생각하지. 그리고 그의 야망은 집시 소녀에게 머무르지 않게 할거라고, 너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해. 물론 너만의 생각이고, 너에 의한 너를 위한 위안일 뿐이야.
물론 어느 집시 소녀에게는 네가 금빛 머리의 군인이었을 수 있어. 하지만 내게도 그러하리라는 법은 결코 없지.
설령 너의 상상대로, 금빛 머리의 군인이 한없이 가벼운 인간상이라 하더라도, 이 집시 소녀는 너를 택하지 않아. 항상 금빛 머리의 군인들을 택할 거야. 그들의 머리카락은 신의 은총과도 같은 햇볕을 받아 금빛이 된 것이지. 반면, 네가 생각하는 너만의 장점들은 네가 애써 그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동안 사라지고 말았어.
소설에서 집시 소녀는 군인을 잠시나마 홀렸고, 반면 그에게 신분을 보장해줄 수 있는 귀족 집안의 아가씨는 마지막에 군인의 애정을 되찾지. 현실의 집시 소녀들은 어떨까. 그 두 여자의 혼합인 경우도 제법 있어. 너의 눈에 얕아 보일지 모르지만, 제법 유쾌한 관계를 오래 행복하게 지속시킬 수도 있지. 지금의 나는 생각이 없지만, 어쩌면 영원히도 가능할거야.
물론 집시 소녀가 다른 차원의 대화가 필요할 땐, 어쩌면 너에게 전화할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아마 너는 그런 전화를 다 받겠지.
소설 속에 너의 위치를 정해보면 너는 누구일까. 집시 소녀를 엄청나게 사랑했던 성직자?
성직자는 훌륭한 두뇌를 가진 데다가, 학문에 종사하는 길을 선택한 사람이야. 그런 점에선 너와 가장 닮은 캐릭터지. 그런데 만일 네가 금빛 머리의 군인과 같은 축복을 받았다면, 그 길을 선택했을까? (여기서 축복이란 꼭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말하지는 않아. 사랑받기 쉬운 사람들은 분명 존재한다는 생각이야.) 물론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기는 해. 만일 그게 너였다면 내가 너에게 이런 글을 쓰고 있을 리가 없겠지.
성직자는 초라한 모습으로, 호감을 얻기 힘든 성격으로 태어났어. 신과 학문에 대한 열정 외에는 아무것도 가질 겨를도, 계기도 없었지. 그러다가 뒤늦게 새로운 열정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거야. 그리고 그걸 일깨워준 집시 소녀를 저주하게 되지.
만약에 그가 성직자가 되기 전에, 많은 사랑을 받아보았다면 어땠을까. 아마 집시 소녀에게 그토록 집착하고 애증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나마 젊음이라도 있었던 시절을 그는 홀로 보냈어.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나날들을 보내왔다는 얘기야. 오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소설의 성직자에겐, 집시 소녀의 몸을 억지로 가질 기회도 있었어. 하지만 다행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그는 무지했지. 그래서 차라리 그녀를 괴롭게 하고 죽이려고까지 해. 여기에서는 악독함과는 다른 어떤 추함이 분명히 느껴져.
한번은, 완력을 써서라도 입을 맞추면 내 마음이 바뀔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어. 역겹기도 했지만, 가장 빠르게 포기하게 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겠더라. 시체처럼 가만히 싸늘하게 있었어. 화를 내고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는 것보다 그게 빠르게 먹히더라. 정말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두 눈 속에 떠오르는 걸 봤어.
너는 내게 그런 식으로 행동한 적은 없지만, 말은 충분히 그런 식으로 했지.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했고 나의 세상에서는 친구 즉 대화상대가 이성보다 높아. 하지만 너는 굳이 이성의 자리를 바랐어. 그러나 내 세계에서 그건 첫 눈에 결정이 되어버린 일이야. 이직의 기회는 없어. 그건 처음부터 확실히 했던 문제야.
성직자는 그렇다고 쳐. 누가 봐도 겉모습이 흉측한 곱추는 짐승처럼 자라났잖아. 곱추는 성직자의 부추김으로, 집시 소녀를 납치하는 범죄를 저지르다가 채찍으로 맞는 형벌을 당하지. 성직자는 숨어서 나타나지 않아.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아이러닉하게도 집시 소녀 뿐이야. 곱추는 마치 처음으로 배려를 받은 동물처럼 감격을 해.
그래서 훗날 곱추가 집시 소녀를 구했을 때, 집시 소녀는 그의 감사를 이해했어. 하지만 그의 감동이 그녀에게 동일한 열기를 갖고 전달되었을까? 아니, 아마도 곱추를, 점차 믿음직한 가구처럼 익숙하게 여기게는 되었겠지. 곱추는 거기까지인 거야. 그녀를 백 번 구했어도 마찬가지인 것이지.
집시 소녀든, 군인이든, 성직자든, 곱추든, 모두 어리석은 군상일지도 몰라. 집시 소녀의 어머니라는 이해 불가한 존재가 있어. 어머니는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긴 세월을 보내왔지. 소녀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서, 딸인줄도 모르고 매일같이 그녀를 저주해왔어.
그러다 결국 딸을 알아보게 되지만, 그 날에는 마침 딸의 처형식이 있는 거야.
그런 비참함을 마주한 모성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어. 그런 감정은 상상조차 하기 힘드니까. 내 고양이들을 관찰해보면, 새끼를 잃는다는 것은 분명히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일 거야. 그런 어머니 앞에서, 누구를 사랑하느니 마느니 하는 나머지 인물들의 촌극이 어때 보여?
물론 나는 그 어머니의 아픔에 대해서도, 계속 추측만 할 뿐이야. 비록 심하게 몰아붙이기도 했지만, 네게 있을 수 있는 아픔에 대해서도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두고, 너는 나를 사랑에 대한 회의주의자로 보고 싶어했어.
너와 나는 역대 사상가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끔은 예술 이야기를 조금 했을 뿐인데, 왜 그것이 곧바로 너에 대한 육체적인 사랑으로 연결될 거라고 생각한 건지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네가 나를 어떻게든 이겨야 내가 너를 다르게 볼 거라고 생각한 것도 알아. 그런데 그건 나로 하여금 너를 굉장히 경멸하게 만들었을 뿐이야.
애초에 모범생으로 자라난 너, 그리고 제대로 걸음마도 하기 전부터 유희뿐 아니라 학교 공부에도 시간을 거의 쓰지 않고 그런 것들에 대해 탐독하고 너보다 넓은 세상을 겪어온 나 사이에는 이미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있어. 왜 내 게임이나 다름 없는 판에서 나를 이기려고 한 걸까. 설령 이긴다 한들 내가 널 이성으로 볼 리도 없는데.
나더러 선천적으로 욕망이 없는 사람이 아니냐고도 했었지. 물론 그것도 남들에 비하면 사실인 것 같아. 하지만 그보다 확실한 것은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했지, 매력을 느낀 적은 한 순간도 없다는 사실이야. 너는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위안이 되겠지만 말이야.
물론 네가 순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닐거야. 감정의 혼란이 있을법한 상황에서도 나는 항상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앞으로도 죽, 너와 같은 사람에게는 그러할 거야.
너를 떠올리는 동시에 노트르담의 성당 이야기를 떠올린 이유는 이거야. 네가 나를 회의주의자로 부를 때, 나는 너에게서 느꼈어. 노트르담의 성당 이야기를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로 바꾸고 외면하고 싶은 모든 모습들을 지워버린, 디즈니를 비롯한 제작자들과 같은 태도를 말이야.
너의 생각에 맞춰줄 수 없는 나를, 너는 뭔가 "고치면 되는 사람"으로 못박고 싶어했잖아. 노트르담의 성당보다 더 아름다울 리 없는 현실 속에서 뭘 바란거니.
그런데 있잖아. 굳이 그 이야기를 바꿀 필요가 있을까? 내가 상기시켜준 노트르담의 성당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 나름대로 충분히 아름다운 이야기야.
그림은 전부 뭉크 작품
2018년 3월 27일 작성한 노트르담의 당신에게를 [오마주] 프로젝트로 재발굴, 재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