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기존의 동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기 위한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 새로운 이야기 속에 기존 동화가 안고 있는 한계와 새 관점을 녹여냈습니다.
kr-art @kimsursa님이 주최하는 ‘동화의 재해석’ 이벤트에 응모합니다.
(@kimsursa/kr-art-02-50sbd)
스티밋의 창의성을 활성화하는 여러 계기 중 하나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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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야기는 길어질지도 모릅니다. 15년도 더 된 이야기를 하자니 횡설수설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최대한 압축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전 주세페 왕국의 수도 변두리에 사는 그라스라고 합니다. 전 이제 마흔이 되었고, 22년째 유리 공예를 하고 있습니다. 독립하여 공예방을 운영한지는 17년쯤 되었습니다.
유리 공예를 하기 전에는 13살부터 18살까지 5년 간 구두 가게 도제로 있었습니다. 구두 가게 영감이 저를 실컷 부려 먹기만 하고, 가죽을 다루는 핵심 기술은 끝내 가르쳐주지 않아서 구두 도제일은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구두 가게에서 일할 때는 정말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새벽 같이 나와서 일할 준비를 하고, 하루 종일 고관대작들의 구두를 바느질하고 나면 한 밤중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세 끼를 제대로 먹지 못한 건 예사였고, 어쩔 때는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갔습니다. 구두 가게 영감은 제게 정당한 품삯도 주지 않았죠. 하지만 기술을 배울 거라는 기대 하나만으로 5년을 버텼습니다.
제가 시골 마을에서 왕국의 수도로 올라오게 된 이유는, 홀어머니의 짐을 좀 덜어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저희 집엔 늘 먹을 것이 부족했거든요. 두 동생들이나마 배 안 곪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올라와서 쉽게 그만 둘 수는 없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지만, 이 악물고 버텼지요.
제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실 엉뚱한 데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세 번은 찾아오는 어떤 가문의 막내딸 덕분이었죠. 그녀는 저와 동갑내기였습니다. 도제 일을 시작할 때부터 보았지요. 13살 때 처음 본 그녀는 그리 예뻐 보이진 않았습니다. 처음엔 구두를 찾으러 온 하녀인줄 알았어요. 옷차림도, 얼굴도 깨끗하진 않았거든요. 자주 만나다보니 자연스레 말도 섞게 되고 서로에 대해 점차 알게 되었습니다. 단골 가문의 딸이기에 주인 영감은 그녀가 오면 저에게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구두를 완성하는 동안, 차를 갖다 주기도 하고 말동무를 하기도 했죠. 그녀의 이름은 루시였습니다.
그녀를 알게 된 지 일 년쯤 후부터 우리는 서로의 사정에 대해 좀 터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재력이 있는 가문의 사랑 받는 외동딸이었지만,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새 엄마를 맞이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새 엄마가 데리고 온 두 언니에게 관심을 빼앗긴 것은 물론이고, 새 엄마는 아버지가 무역으로 오래 집을 비울 때는 루시에게 하녀들이 하는 일을 시키곤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제가 처음에 루시를 하녀로 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그녀는 처음엔 새 엄마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점점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엔 새 엄마에게 학대 받지 않기 위해 시키는 건 뭐든지 했습니다. 그녀가 당한 일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저 역시도 마음이 아파오니 그건 자세히 풀어놓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새 엄마로부터 모욕적인 말들과 손찌검까지도 줄곧 당해왔습니다. 주변의 누구도 그녀를 보호해 줄 수 없었죠.
그녀는 제 사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과 시골에 가난에 찌든 가족들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도제 생활의 어려움도 터놓았지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친구가 되었습니다. 전 그녀가 두 언니와 새 엄마의 구두를 찾으러 올 때, 고통스런 도제 생활에서 잠시나마 해방되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올 때마다 과자며, 사탕이며, 제가 맛볼 수 없는 간식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도 거의 먹지 못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아끼고 아껴서 저에게 갖다 준 것이었습니다. 전 그녀에게 어머니를 느꼈습니다. 깨끗하지 못한 옷차림이었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빛나보였습니다. 어느 샌가 전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18살이 되자, 그녀는 몰라보게 성숙해졌습니다. 입술은 붉고, 눈은 깊었죠. 앞가슴은 팽팽해졌고,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뚜렷한 굴곡이 생겼습니다. 비록 그녀의 얼굴에 재가 묻고, 옷에 검댕이를 늘 칠하고 다녀도 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녀는 제 눈뿐만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 눈에도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을요. 전 조바심이 났습니다. 우린 여전히 일주일이 최소 두 번은 만나서 즐거운 대화를 나눴지만, 그 만남이 어느 날 갑자기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외모는 그렇다 치고, 그녀의 심성까지 누군가 발견하게 된다면…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악의 조건을 가진 저는, 더 이상 그녀 곁에 있을 수 없게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전 기술을 익혀 하루 빨리 독립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구두방 영감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5년 간 제대로 보수도 받지 않고 일해 왔으니, 이제 얼마간의 보수를 정산해주고 제대로 된 기술을 알려달라고 말이죠. 그 날 전, 구두 가게에서 쫓겨났습니다. 백작 부인의 마지막 구두를 손질하고 가게를 정리하고 있을 때, 영감의 두 아들이 나타났습니다. 큰 아들은 저의 머리채를 잡고, 작은 아들은 저의 허리춤을 잡았습니다. 그러고는 저를 차가운 어둠 속으로 내팽개쳤죠. 구두 가게 지하방에 있는 저의 짐도, 어떤 보수도 챙기지 못했습니다. 5년 전 이곳에 올 때와 똑같은 제가 어두운 거리 한 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서러워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보다도, 내일부터 루시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슬펐습니다. 저의 신분으로는 구두 가게가 아니면, 그녀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전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작정 걸었습니다. 상점들의 거리를 지나서 외곽으로 계속 걸어갔습니다. 지난 5년의 시간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두 동생도 떠올랐습니다. 5년 동안 아무 것도 이룬 게 없었습니다. 제 꿈은 가루가 되어 바람과 함께 흩어졌습니다. 새벽이 되도록 걷다가 도시 외곽의 작은 마을 입구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새로운 기회가 시작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그 날 구두 가게를 나오지 않았다면, 그 길로 계속 걷지 않았다면, 전 태미 영감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제 처지는 어떻게 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겁니다. 태미 영감은 그 동네에 유리 제품을 납품하기 위해 아침 일찍 마을로 들어오던 길이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쓰러진 저를 그는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저를 그의 마차에 싣고 그의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태미 유리 공예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전 그 날부터 그의 도제가 되었습니다. 태미 영감은 일주일동안 제게 아무 것도 시키지 않았고, 그저 먹고 자면서 일 하는 걸 눈으로 익히라고만 했습니다. 전 5년 만에 처음으로 대접을 받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룻밤 만에 제게 최고의 행복이 들어왔는데, 가슴 한 곳은 루시가 박혀서 수시로 고통을 느꼈습니다. 전 다시 다짐했습니다. 이곳에서 열심히 배워서 독립의 꿈을 이루자. 그런 다음, 루시를 찾아 나서자.
5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제 나이 23살이 되었습니다. 태미 영감은 제 아버지나 다름없었습니다. 가족이 없는 영감은 제게 의지했고, 저 역시도 그를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습니다. 그 사이, 시골에 있던 저의 가족들은 영감의 배려로 가게 근처에 터를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두 동생이 이사 온 날, 우리들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고향을 떠난 지 10년 만이었습니다.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감격과 그간 겪었던 일들이 생각나서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역시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손으로 뭘 만들기만 하던 처지라, 조리 있게 말하는 건 잘 못하니 이해해주세요. 차 한 잔 마시고, 그 뒤의 일들을 얘기하도록 하죠.
To be continue. 2편에서 계속-
신데렐라 외전 2편 - @kyslmate/7ejex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