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독립공채, 그 서글픈 100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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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편안한 내용으로 찾아뵙네요. 1,919년 그러니까 딱 100년 전 임시정부가 발행했던 최초의 채권 이야기입니다. "독립공채"라는 별칭이 더 유명하지요. 위 이미지는 당시 미국에서 팔았던 액면 50달러짜리 "독립공채"로써 임시정부 일원이었던 윤치영이 대부분 압수당하고 일부를 우연히 찾아 "한국일보"에 무료 기증한 것입니다.상해임시정부 관람시에는 국문 형태의 채권이 전시되어 있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은 황당한 "독립공채"의 좀 서글픈 100년 역사를 , 역사책은 그저 몇 권 본 무지랭이이므로, 담담히 팩트 위주로 정리해 볼께요.


격동의 1,919년, 황당한 채권 발행



아시다시피 1,919년은 3.1운동을 비롯하여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해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상해, 인천, 한성(=서울) 등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9월에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조직이 커지면서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겠지요. 참 황당한 채권을 발행합니다. 국문판 독립공채의 발행사례를 보실까요?

대한민국 공채표 <출처 : 위키백과>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 증표를 가진 사람에게 금화 일백 원을 채부한 것을 증거함이니, 북미합중국 정부가 대한민국을 승인한 후 1개년 내로 대한 경성에서 대한정부 재무부 총장에게 이 표를 들이면 곧 합중국에서 통용하는 금화의 대등으로 보상하기를 대한민국의 명예와 신용으로 담보하노니, ...중략...이상에 말한 대로 보상할 때까지는 매년 백분지 6의 이식으로 계산함.』

발행조건 보이시나요? 요약하면,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대한민국의 독립정부가 수립되고(+미 정부의 승인) 1년 후부터 보상해 줄것이며, 연이율은 6%라는 내용입니다. 미주에서는 6%였지만, 중국 등지에서는 5%로 발행되기도 했으며, 1년 후부터라는 기간도 임시 의정원의 조례 변경 등으로 정부 수립 후 5년 이후부터 30년 이내까지 보상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누가 저 채권을 사주었을까요? 아마도 초기 채권들은 애국자들이 사주었을 것 같네요. 이미 미국의 많은 이민자 등이 여러 경로로 독립자금을 지원하고 있던 상황이기에 이를 믿고, 자신감 있게 곳곳에 봉이 김선달급 채권 마케팅(?)을 했던 것 같네요. 서프라이즈에 나올 법하게 생긴 저 서류를 들고 월스트리트를 찾아갔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눈물겨운 스토리네요. 국문/한문판은 정말 더 평범하게 생겼습니다.

실제로 미국/프랑스/독일 등지에서 꽤 판매가 되었으며, 1,945년 7월 제헌국회가 열릴때까지도 계속 발행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무렵에는 투자 목적으로 샀거나 꼼수를 부린 사람도 조금 있을 수 있겠네요.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임정 재무부 서기였던 이현수의 경우, 채권을 빼돌리다가 체포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1,950년이 되면 정식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국채가 발행을 시작하며, 그 이름은 "건국국채"입니다. 50년대의 유일한 국채로 황폐한 한국을 일으키는 데 기여를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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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 아래 작은 딱지들이 보이시죠? 이자를 지급받는 권리증서인 "쿠폰(Coupon)"입니다. 현재도 표면금리를 쿠폰금리라고 하는 유래가 되었습니다.

보상사례는? 그리고, 발행금리는 적절했을까


1,923년 당시 미주흥사단에서 9,320원 어치 채권을 매입, 안창호 선생을 통해 영수증을 전달받았다고 하는 흥미로운 역사가 있는데요. 흥사단 측의 최근 기록을 볼까요?

「한국정부는 지금까지 소액의 공채를 상환한 적은 있으나, 흥사단이 받은 상환금액이 최대의 것이었다. 독립공채 상환내역을 살펴보면, 1차로 1952-53년에 1백31만6천원, 2차로 1984-87년에 4천2백99만원어치의 독립공채를 상환했다. 3차로 1997-2000년에 중국 조선족 이종림씨 원금 3백10원(상환액 3백53만원), 멕시코 교민 장기철씨 원금 40달러(상환액 1백80만원), 흥사단 미주위원부 공채 원금 9천3백20원(상환액 1억 8백 만원)이 전부이다.」

1,922년 채권 발행시에 대등한 금화를 조건으로 하였기에 9,320원 짜리 미주흥사단 채권에 대해 1,997년 1억 8백만원을 보상해 주었다고 합니다. 미주흥사단은 이 보상금을 종자돈으로 당시 미국의 부동산 붐을 타고 운영에 필요한 상당한 자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흥사단 기사 링크 : http://www.yka.or.kr/html/info/column.asp?skey=&sword=&category=&size=10&page=15&no=10717

참고로 당시 미국 국채금리가 대략 4%대였고, 일본 국채금리도 약 6%대였음을 감안하면, "독립공채"의 5~6%수준 금리는 거의 애국심에 기댄 강매에 다름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약간의 아쉬움과 감사함



독립공채의 총 발행금액은 얼마였을까요? 추정치이긴 하나 기재부 등을 근거로 상해에서 약 20만불(4000만 원), 하와이 25만 달러 등 최소 약 45만 달러어치가 발행되었다고 합니다.

초창기에는 법적 근거가 없어 상환을 못 받고 돌아간 경우도 있었으나, 계속 법을 제정하면서 원래 발행시에는 정부 수립 후 5~30년 후 까지만 보상한다던 조건에도 불구하고 특별법을 통해 보상을 해주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실제 찾아간 보상금액은 흥사단 기사에서 처럼 미미한 수준입니다.

대체로 애국심에 기댄 후원에 가까웠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데다, 일본에 발각되면 대부분 압수당했고, 땅 속에 숨겨 놓는 등 비밀스럽게 보관하다 세월이 흘러 소실되는 등으로 대부분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네요. 찾는다면 꽤 대박일 겁니다만

어쩌면 그 분들은 국가를 위하는 마음 뿐이었을테니, 현 세대의 세금을 쓰는 것을 크게 달가워하지는 않을 것도 같습니다.

1,919년부터 "독립공채"가 발행된지 100년이 되어가는 즈음에서 잠시 감사한 마음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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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 앞>

행복한 한 주 시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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