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린's 100] 1987 나는 남영동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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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7 남영동



1987년 그때 나는 남영동에 있었다. 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았다는 얘기는 아니고.. 겨우 중학교 1학년이었으니 그럴 일은 없다. 당시 나는 용산중학교 1학년생이었고 학교에서 멀지 않은 남영동에 그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다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에 남은 것은, 그 뜨거운 1987년의 시위 현장이다. 학교 선생님들이 위험하니 절대 갈월동 대로 쪽으로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건만, 호기심 많은 사춘기 소년이었던 나는 친구들도 없이, 혼자 갈월동 사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저 너머에는 무언가 소년들은 알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하는 듯, 마치 숲의 비밀통로를 향해가듯이 두근거리며 다가갔다. 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하건만, 저 멀리 보이는 대로 쪽으로는 무언가가 날아가고, 사람들이 뛰어가고,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보이는 듯했다. 최대한 가까이 다가서고 싶었지만 어린 소년에게는 호기심의 크기만큼 공포와 긴장도 더 했다. 마음 졸이며 갈월동 사거리의 근처까지 다가서자 그새 시위대는 뒤로 밀렸는지, 내 시야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사거리를 두고 시위대와 진압대가 대치하는 중이었으리라. 폭풍 전의 고요 같은 정적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그 정적을 깬 건, 어떤 청년이었다. 하얀 셔츠를 입고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젊은 청년이 갑자기 남영동 방향에서 사거리 쪽으로 튀어나오더니, 진압대를 향해 무언가를 집어 던지고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게 화염병이었는지, 짱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동료도 없이, 전사처럼 홀로 진압대와 맞서던 청년의 모습이 한동안 슬로 모션처럼 흘러가다 스톱되었다. 그리고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탁 긴장이 풀어지고는, 타다다다~ 최루탄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진압대가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 길로 뒤돌아 학교 쪽으로 뛰었다. 나의 1987 남영동 앞 대치 사건은 거기서 기억이 끝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매우 아이러니하고 절박한 대치 상황이었던 것 같다. 사거리 하나를 두고 한 블록 뒤에는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고, 아마도 시청 앞 광장에서부터 밀려났을 시위대는, 밀리고 밀려 이 모든 상황의 시작이었던 남영동 대공분실 한 블록 앞에서 진압대와 대치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기서 더 밀리면 남영동인 상황이었던 거다. 그 하얀 셔츠의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대로 잡혀가 구속이라도 되었을까? 성공적으로 시위를 이끌고 지금은 어쩌면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정치인이 되어 있을까? 아니면 명퇴를 고민하고 있는 부장님이 되어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부동산 값이 오르기만을 기대하며 자녀를 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가 되어 있을까?



#2. 1989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중학교 3학년이 된 나는 또 다른 사회 현상에 부딪혀야 했다. 전교조 문제를 두고 당시 교무실은 매일매일이 일촉즉발의 남영동 앞 사거리 같았다. 선생님들은 전교조 교사와 반전교조 교사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했고, 그 여파는 우리에게도 미쳤다. 반전교조 교사이면서 학생주임이었던 체육 선생님은, 주도적인 전교적 교사였던 우리 반 담임 선생님에 대해 거칠게 비판하며 우리를 운동장 뺑뺑이를 돌렸다. 우리는 체육 시간마다, 체육시간 내내 운동장 뺑뺑이를 돌아야 했다. 신기한 건 단 한 명도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모두가 대동단결하여 이 이상한 체벌을 견뎌냈다는 것이다. 장난을 치는 친구도, 지쳐서 낙오하는 친구도 없이 우리는 이를 악물고 시간을 견뎌냈다. 게다가 더욱 신기했던 것은 아무도 어떤 선생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거나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운동장 뺑뺑이를 도는 중에도, 그리고 체육 시간이 끝나서도, 누구 하나 선생님들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았다. 마치 미리 합의라도 한 듯, 다만 서로 힘내자고 격려하며, 서로 수고했다고 다독이기만 했다. 그런 우리 등 뒤로 들려 오는 소리라고는 ‘빨갱이 선생에 빨갱이 자식들 지독하네’라는 체육 선생님의 독백이었다.



그것은 매우 신비로운 일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릴 만도 하고, 아니면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담임선생님을 비판하는 체육 선생님을 일방적으로 욕할 수도 있었는데, 그런 얘기는 거의 들어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어른들의 선택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1989년 7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개봉했다.
그리고 그 뒤로 많은 아이들이 같은 구호를 외치며 죽어갔다.


"
H에게

난 일등 같은 것은 싫은데,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은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은 엄마가 싫어하는 것이지.
난 인간인데, 난 친구를 좋아할 수 있고 헤어짐에 울 수도 있는 사람인데….
나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라고 하는 분,
항상 나에게 친구와 사귀지 말라는 슬픈 말만 하시는 분….
공부만 해서 행복한 건 아니잖아?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서 이 사회에 봉사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
그것이 보람 있고 행복한 거잖아?
난 로봇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는 물건이 아니다.
밟히다 밟히다 내 소중한 삶의 인생관이나 가치관까지 밟혀 버릴 땐
난 그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떤다.

...."



1986년 한 여중생이 위와 같은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나오고 수많은 열사들이 여중생의 뒤를 이어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우리의 박종철, 이한열은 옥상에서야 날개를 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6월 항쟁처럼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지만, 6.29 처럼 선언으로만 남았다.



우리는 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견뎌내며 학창시절을 마쳐야 했고, 마침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걸 몸소 증명해 준 고등학교 중퇴 ‘서태지’의 등장과 함께 그 거대한 긴장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우리들은 어느새 열사들의 죽음을 잊은 채, X세대, 오렌지족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자유를 만끽하던 우리들에게 사회는 IMF라는 철퇴를 내렸고, 우리는 사회 진입을 저지당한 채 이리저리 떠밀리다가 지금은 20대보다 더 가난해졌다.



‘20대보다 더 가난해진 40대… 왜 이렇게 됐을까?’



#3. 2014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저주



무기력해진 우리는 여전히 아이들의 죽음을 방조하고 있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1987년에 살아있던 사회시스템은 무너져 내렸고, 아이들이 떼로 바다에서 죽어가도 모두가 손 놓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우리의 부채감은 그것이다. 영화 ‘1987’ 속에 살아있던, 단지 자신의 자리를 다하기 위해 검사직도 버리고, 가족에 대한 협박과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맞서며, 군홧발로 밟혀도 원칙을 다하려고 했던 그 기본이 사라진 것 말이다. 1987년, 당시 권력도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명령을 내려도 움직여지지 않는 하부, 기초, 기본.. 2014년에 우린 그 기본이 사라진 현장을 목격해야 했다. 그놈의 발달한 기술력으로 생생하게 라이브로 말이다. 아무리 정신 나간 대통령의 명령이어도, 그것이 서슬이 퍼런 정권의 명령이어도 눈앞에서 아이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그냥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오로지 내 책임이 아니길 바라며 고개를 돌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1987년에는 할 수 있었던, 2016년에는 할 수 있었던 그 거대한 항쟁이 왜 2014년에는.. 왜 그때에는.. 할 수 없었던 가. 왜 그때에는 누구도 옥상에서 날개를 펴지 못 했는가.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우리는 모두 기가 막히게도 가만히 있었다.



우리는 이 씻을 수 없는 엄청난 부채감을 영원히 안고 살아야 한다. 1987년을 살아 낸 청년들은, 시민들은, 1989년 운동장 뺑뺑이를 돌던 우리들은, 옥상에서 친구들을 잃어야 했던 우리들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몇 백배나 더한 군홧발로 짓밟으며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좀! 있으라’고 윽박을 지르고 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며 옥상에서 날개를 펴던 그 중학생의 친구들은, ‘생존은 성적순’이라며 아이들에게, 자신들은 경험해 보지도 못한 분량의 학업 스트레스를 주며 학원 뺑뺑이를 돌리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300명의 아이들을 잃은 뒤에도, 우리는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채 외면하고 있었고, 고졸 비선실세 아줌마의 자녀 입시비리에야 화들짝 깨어나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우리는 이것을 속죄할 수 없다. 성적 때문에, 집중력에 좋다는 마약 먹이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부모들이 된 우리는, 신과 함께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1987, 1989는 끝나지 않았다. 다시 수많은 ‘서태지’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 검사직 따위 개나 줘버릴 수 있는 시민들이 자라나기까지 이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예언이다. 그리고 저주다.







[INTRO]
마법사입니다. 그렇다구요.
마법의 열차는 불시 도착, 정시 발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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