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린's 100] 너희를 위해 나를 희생시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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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有)



영화 '메이즈러너'는 제게 매우 특별한 영화입니다. 몇 년을 제 곁을 맴돌며 쫓아오던 그놈의 [Wicked]라는 메시지의 정체를 어느 정도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보통의 영웅서사는 주인공 또는 주인공 집단의 고초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국 마지막에 다다른 곳은 인류와 공동체 또는 자신이 속한 가족의 구원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그러한 구원 서사의 결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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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플레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모두 좀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특정한 면역체계를 가진 십대소년들의 신체에서 면역항체를 뽑아 백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연구하는 세계조직인 W.C.K.D.는 면역체계를 가졌을 것이라 보이는 십대소년들을 가두고, 이들의 면역력을 강화하기 위해 혹독한 조건을 가합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여러 소년들이 희생되고, 마침내 남은 소년들은 장벽을 넘어 탈출을 감행합니다.



장벽을 벗어나려면 거대한 미로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 장벽에는 이들을 감시하는 강철거미가 기다리고 있고, 시간 내에 장벽을 통과하지 못하면 장벽들 사이에 껴서 압사하고 맙니다. 그렇다고 장벽 안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밤마다 계속 한 명씩 괴물에 의해 소년들이 죽어나가기 때문입니다. 장벽 안에 있으나 밖으로 나오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소년들은 탈출을 감행하고 이들을 잡기 위한 W.C.K.D.의 추격은 계속됩니다. 장벽 밖의 세상은 플레어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들이 넘쳐나고, 소수의 기득권만이 또 다른 거대한 장벽 내 안전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소년들의 면역체계에서 뽑아낸 혈액으로 만들어질 백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W.C.K.D.는 계속 이들을 회유합니다. '너희들의 희생으로 인류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죠' 그래서 그들에게 [Wicked is good]이란 메시지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세뇌합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소수의 소년들은 영광스럽게 희생하라고 말이죠.



어떻게 되었을까요? 충격적이게도 소년들은 인류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류를 구원하지 않고 탈.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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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배경은 지금 전 세계가 겪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장벽 안에 갇힌 소년들은 공리주의에 의해 희생을 당하고 있고, 그것은 다수의 행복을 위해 당연한 것이라고 요구받고 있습니다. 양극화로 치닫는 냉혹한 현실은 사람들을 돈밖에 모르는 좀비로 만들어 버렸고, 이를 극복하겠다는 의식 있다는 어른들조차 소년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소년들은 희생해야 합니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인류를 구원해야 합니까? 메시아라면, 슈퍼맨이라면, 어벤저스라면 그럴 수 있겠습니다. 부활하면 되고 초능력으로 죽지도 않을 테니 말이죠. 그러나 인류의 구원을 위해 희생할 권리는 이들에게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강자의 권리이지, 약자의 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약자는 그것이 아무리 윤리적이고 대의를 위한 것이라도, 대신 희생할 권리가 없습니다. 단지 어쩔 수 없이 폭력을 감당해야 할 의무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소년들에게 인류를 구원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탈.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탈출하는 이의 의무는 살아남는 것입니다. 살아남는 것이 유전자의 유일한 의무라면, 그래서 이 폭력적인 신자유주의 사회가 용인되고 있는 것이라면, 소년들도 그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러느라고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이들이 탈.출.을 감행하게 되면, 그들도 역시 인류를 구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탈출中'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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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적 합의를 이루려면, 인류는 지금 바로 이 시점에서 모든 것을 멈추고, 다시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아니 좀 늦은 듯도 합니다. 이미 소년들은 장벽을 넘어 블록체인의 세계로 '탈출中'이니 말입니다. 이것을 이뤄내지 못하면 아마도 종말의 그들은 인류를 구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만의 방주에서 인류는 새로운 시작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산적한 문제들을 모두 뒤로 밀어놓았습니다. 대신 기성세대는 이 소년들의 미래를 당겨다가 모두 흥청망청해 버리고 있습니다. 인류까지도 갈 것 없이, 우리사회의 곧 고갈될 연금과 사회적 보장의 각종 장치들이, 이 장벽 안에서, 탈출의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소년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는 때에도, 여전히 유효할까요? 그들이 기성세대의 노후와 생존을 위해 기꺼이 그 짐을 짊어져 줄까요? 영화의 결말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때에도 역시 소년들은 '탈출中'일 테니까요.



참혹한 디스토피아의 미래가 우리 공동체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연대를 위한 대화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장벽 안의 소년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죽은 게 아닙니다. 그때에는 후회해도 늦습니다.


Wicked is good



위키드는 좋은 것입니다.
탈출하는 소년들에게도 역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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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마법사입니다. 그렇다구요.
마법의 열차는 불시 도착, 정시 발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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