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23 연습 일지] 포기와 완성 by @ab7b13
Köln, January 24, 1975, Pt. I (Live) 이 웃음 때문에 제가 더 슬퍼지는 건 아닌가요? by @ab7b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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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글을 쓴다는게 부담이 된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또다시 글을 쓰고 싶었다. 어제 저녁 바가바드기타 감상평 릴리에 천가지감天歌之感 11장을 쓰고 거의 하루가 다 되어가는 셈이다.아침에 자주가는 이웃 포스팅의 댓글로부터 이 마음이 촉발觸發되었다. 생각이라는 것이 시도때도 없는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다. 글을 읽으면서 작자의 생각을 접촉하면서 그 접촉이 새로운 생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이웃이 오늘 아침 작성한 새로운 포스팅을 읽으면서 생각이 또다시 연쇄반응Chain reaction을 일으켰다. 그래서 의식의 흐름따라 번호글쓰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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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명상한다고 하는 행위에는 두가지 접근방식이 있다. 몰입사마타/samatha/止/concentration과 분석위빳사나/vipassana/觀/insight/지혜이다. 사실 인간의 행위를 어느 하나로 딱 잘라서 분리하여 행위할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인간 자체가 복합체이기 때문에 그 복합개체의 행위 자체가 단순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내말은 몰입명상 따로, 분석명상 따로라는 말이 아니다. 몰입과 분석명상, 이렇게 한묶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몸덩어리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도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명상이라는 반복적이고 의식적인 연습을 통해서 우리는 의식의 결을 단순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의식이 단순화되어진다는 그것은 그만큼 삶도 단순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단순함 속에서 무궁무진한 새로움창조성/creativity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점점 한 사람이 타자와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복잡해지는 범위가 끝없이 넓어져만 가는 지금 이 시대에 단순한 삶이 주는 가치는 아무리 반복한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솔까 나는 사회에서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면서 부닥치게 되는 물리적/정신적 복잡성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애써 피하려고 자발적인 백수를 선택했다. 더 솔까 고백하자면 내가 사회를 버린 게 아니라 적응에 실패했기 때문에 잽싸게 토낀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겁한 핑계였을 수도 있고 그만큼 나약한 종자였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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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요가Karma Yoga라고 부르는 그 행위는 그 행위의 동기나 결과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건 그 일을 하는 동안에 온전히 그 일에만 몰입할 수 있을까? 글쎄다. 나는 기껏해야 1분? 아니 10초도 다른 생각이 거기에 치고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몰입한 경험이 없는 것 같다. 명상이라는 수행을 통해서도 의식으로는 만리장성 아니 억만리장성을 쌓아올린 거 같다. 명상용어로 주구장창 떠들어 대는 강조어가 있다.
Sati 지금 여기, Now & Here, 깨어있음, 알아차림, 마음챙김, Awareness, Mindfulness, 正念
위에 나열한 모든 의미가 같은 듯 다른 뉘양스를 가지고 있다. 즉, 한 단어에도 단순한 하나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합의미가 녹아져 있는 것이다. 한 단어의 의미도 이렇게 복잡다단한데 명상이라는 행위도 과연 100%몰입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수행에 관한 전승지혜들은 그렇다고 표현한다. 복합정신개체인 나 피터는 그러한 상태 도달을 목표로 하지만 가보지 못했기에 그냥 이해하는 바를 적어놓을 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해한 모든 명상에 있어서 공통된 원칙은 단순함이다. 남방 불교 전통 수행서인 아비담마abhidhamma에는 몰입상태에 들어가서 이루어지는 정신적 경지들을 단계별로 아주 치밀하고 세분하게 정의내리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생략하겠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차분하게 정리할 예정이다.(관심이나 갖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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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에도 두 가지의 길이 있다. 몰입의 과정에서 몰입뿐이냐? 분석과 함께 몰입함이냐?라는 선택의 임계점에 닿게 되는데, 그 임계점은 의식의 단순화과정이다. 그렇지만 의식이 아무리 단순해졌다고 해도 5가지의 요소가 있다고 한다. 이를 선禪/samatha의 구성요소라고 한다.
- 생각을 일으킴尋
- 그 생각을 지속적으로 관찰함伺
- 관찰함과 함께 동반하는 희열喜
- 행복樂
- 의식이 몰입되는 대상에 자연스럽게 머물러있는 상태/평온한 마음상태心一境性/定
몰입의 수련에서 몰입의 행위를 더 밀고 나아가게 된다면 이러한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이 하나씩 벗겨져나가게 된다. 즉, 몰입이 더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몰입하는 대상에 생각을 일으킬 필요도 없어지고, 관찰할 필요도 없어지고, 희열도 사라지고, 행복도 사라지고 맨 마지막에는 몰입된 대상에만 머물러있는 평정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즉, 몰입된 대상과 한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시간의 차원이 없는 것이다. 하루가 백년 아니 천년 같아진다고 말한다면 뻥이라고 얘기할까? 우리가 아주 좋아하는 이성과 함께 있을때 시간가는지 모른다는 체험쯤? 으로 이해해 볼수도 있겠다. 수행자는 이러한 상태를 희열도 행복도 없이 자연스럽게 평정하게 유지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평정한 상태를 보는 마음은 날카롭게 깨어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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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임계점에서부터 의식의 깨어있음이 날카로워진다고 한다면, 그만큼 분석할 수 있는 의식의 범위가 확대되어진다. 여기서부터 창조의 행위가 무궁무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마도 역사의 족적을 남긴 예술 작품들은 이러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몰입의 길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몰입의 몰입만을 계속 이어나갈 것인가? 아니면 몰입의 임계점에서 날카로워진 의식과 함께 분석하고 관찰하는 몰입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나아가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전문용어로 이야기하는 지관쌍수止觀雙修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주 어려운 곡을 연습하는 피아노 연주자라고 하자. 그 연주를 잘하기 위해서는 매일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이 반복적인 연습이 바로 행위이다. 그러나 그 행위를 몰입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몰입이 잘 안 된다. 그만큼 그 행위가 나에게 있어서 익숙하지 않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복잡한 행위를 계속 연습해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행위가 편안해지고 단순해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의 행위에 대한 몰입의 정도도 함께 증가한다. 그리고 숙달의 정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면서 이것저것 관찰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 관찰은 산만함이 아니라 내가 하는 행위(연습) 속에서 일어나는 관찰의 연속밖에 남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희열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고 바로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상태Now & Here/충만한 삶/mindfulness가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행위에 대한 주제자인 의식의 관찰깨어있음/알아차림/awakening/awareness이 행위를 또 이끌어 가는 것마음챙김/mindfulness이다. 여기서 부터는 새로움의 창조행위가 시작되겠지. [180823 연습 일지] 포기와 완성, 피아노 연주자의 연주 연습 속에서 의식의 흐름 관찰을 어떻게 서술하였는지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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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한 지관쌍수의 키워드는 이렇다. 내려놓고 힘을 빼고 관찰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하는 것이다. 이것이 행위의 포기이자 완성으로 향하는 요가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에 그곳에 도달하겠지. 그 상태에는 희열이 있고 행복이 있고 행위에 대한 몰입이 있을 뿐이다. 그 몰입 속에서 새로움의 새로움을 계속 이어나가는 새로움만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의 요가란 나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 몰입과 분석을 함께 수행하는 것이다. 꼭, 내가 명상을 한다고 시간을 내서 명상센터나 요가 학원에서 죽자사자 폼 잡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이해한 행위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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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일상생활에서 명상수행의 재료를 찾는 것은 무궁무진하다는 이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전문용어와 이웃의 글을 끌어다가 포스팅 뻘짓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의식의 흐름을 통한 받아쓰기를 하는 지금까지 나의 포스팅 뻘짓 동안에도 오만가지 잡생각들이 오고 나갔다.
시바, 나는 졸라리 노력해야한다.
그래서, 시바피터이고 졸라피터이다.
영원한 미완성의 완성으로
ps. 대문의 하늘이 맑다. 맑고 청명한 하늘에 구름의 흔적이 약간 남아 있다. 흰 구름마저도 없는 푸른 하늘을 불교에서는 유리광琉璃光이라고 표현한다지? 하늘색은 치유를 상징한다고 한다. 내 마음의 치유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치유가 될 수 있는 그날까지 가즈아! (마음의 치유는 번뇌의 소멸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