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여행기#4 출발: 여행을 시작할 때 기준이 되는 곳

나를 위해 남이 죽어줬다는 모티프는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희생 모티프는 간혹 미담으로 뉴스에 나타나기도 하지요? 자식이 부모를 위해 혹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뿐 아니라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은 이야기도 간혹 들을 수 있습니다. 특히나 이득이 없으면 남에게는 십 원짜리 한 장도 쓰지 않는 사화란 걸 체감할 때 남이 날 위해 희생한다는 이야기는 가슴 절절히 다가옵니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누가 저한테 밥을 산다고 하면 손사래 쳤을 텐데 지금은 참 고맙게 생각하고 얻어먹습니다. 내 돈 몇 푼 아껴서 고마운 게 아닙니다. 십 원도 남에게 쓰기 꺼리는 시대에 날 위해 무언가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좋고 고맙기 때문입니다.

제가 공항으로 가는 그날에도 우리 집은 썩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 경비로 들어간 돈이 절실하게 생각날 때도 있었지요. 마음이 편할 리 없는 상황에서도 자식내미 여행 간다는데 별말 없이 다녀오라고 하시고 용돈도 챙겨주신 제 부모도 참 어지간합니다. 같이 가자는 철없는 말에 집을 봐야 한다고 말한, 저보다 더 어른스런 동생도 있습니다. 아랫집 집사님은 윗집 청년이 여행을 간다고 하니 “좋은 추억 마니마니 담아오”라고 적힌 흰 봉투를 주셨지요. 내 주변에는 늘 고마운 사람 투성입니다.

범죄인을 숨겨주거나 도와주면 처벌받지만 범죄를 저지른 가족을 숨겨주는 건 일정 부분 형벌을 피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사람 새끼가 아닌 짓을 해도 부모에게는 귀하니 감싸 줄 건데 우리 사회는 이를 처벌하지 않는 거지요. 부모와 자식이 서로 감시하고 신고하는, 남보다 못한 가족을 전 생각하지 못하겠습니다. 서로 감시하는 가족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없진 않습니다. 남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냉랭한 가족 관계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는 영화에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사상에서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살 거면 굳이 가족이란 관계가 필요할까요?

저는 가족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신뢰 깊은 친구나 선생과 이렇게 든든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큰 실패를 해도 누군가 자신을 믿어주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실제로 실패를 하던지와 상관없이 중요합니다. 사실 실패라는 기준이 모호하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겐 실패이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실패가 아닐 수 있지요? 그렇다면 자신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모두가 실패라고 여기는 극단적인 상황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든든한 관계에서 오는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선택은 내가 뭔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데 기초합니다. 의미는 믿음과 큰 관련 있어요. 믿음의 종류는 많지요? 근거 있는 믿음도 있고 터무니없는 믿음도 있습니다. 근거가 있으면 더 든든한 믿음이 되어요. 그렇지만 터무니없는 믿음이 무의미한 건 아닙니다. 그냥 사본 과자가 맛있을 때도 있지요. 또 근거가 있는 믿음이라고 엄청 굳건한 건 아닙니다. 여러 숫자와 실험을 통해 안전하다고 확인한 화학 물질들이 사람 죽이고 환경 파괴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사회 제도도 우리가 선택한 겁니다. 우리가 사회 제도를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꼭 그대로 따라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원래부터 있던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사회에서 이렇게 해왔다는 말은 그 일이 앞으로 계속해야만 할 일이란 걸 설명하지 못합니다. 시신을 매장하던 나라에서 화장을 이렇게 많이 할지 누가 알았을까요? 정의롭게 집행되어야 하는 법률도 늘 다시 쓰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으론 정말 사악한 놈이어서 최고 형을 선고받은 사람도 진심으로 억울할 수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국민 다수가 동의한 법률이 나쁜 놈으로 낙인찍은 사람을 생판 모르는 남이 선입견 없이 받아줄까요? 되려 사회가 나쁜 놈이라고 하니 선고받은 사람이 스스로 나쁘다고 믿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억울한 사람이 자신에 대한 엄청난 신념이 있는 게 아니라면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믿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절 해로운 사람으로 보고 손가락질하면 제가 뭐라고 말한들 모두 공염불이 되지요. 남들이 손가락질해도 날 진실로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내 억울함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제 억울함을 들은 사람을 믿어주는 사람에게 전달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회로 치자면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이렇게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건 전혀 바뀔 수 없다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끝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도 희망이 있으니 살 수 있는 거지요.

이야기가 너무 돌아갔네요. 여행도 돌아올 곳이 있으니 하는 겁니다. 여행에서 낯섦은 부차적인 거고 방점은 돌아온 뒤에 찍혀 있지요. 여행은 도피가 아닙니다. 잠시 현실에서 멀어지는 건 단지 너무 꽉 막혀서 보지 못한 걸 볼 수 있게 한숨 트는 행동입니다. 제가 여행 뒤에 돌아올 곳은 가끔은 남이 날 위해 뭔가 해주기도 하는 우리 사회이고 그 안에서도 절 지지하는 우리 집과 같은 곳입니다.

집을 나섰습니다. 동생이 시외버스 타는 곳에 내려줬습니다. 가방은 학교 갈 때 맨 그 가방이에요. 떠나는 길과 학교 가는 길은 얼마간은 같습니다. 등굣길 중간에 공항으로 방향을 틀어야 해요. 여행을 가는지 학교에 가는지 잘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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