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 라다크] 우리가 그린 지도


음악을 들으면서 읽어보세요. 라다크가 더 가까워질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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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roundyround




제아무리 해발 3,500m가 넘는 고산지대라도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한여름 뙤약볕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라다크는 높은 곳에 있는 사막인지라 여름에도 습하지 않아서 그늘 밑으로 숨어들면 그나마 서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지만, 라다크의 여름도 과연 여름답게 무더웠다. 하늘과 가까운 만큼 태양이 뿜어내는 열기도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다. 카페 두레 위층은 바로 옥상이었는데, 거대한 불덩어리가 머리 위에서 활활 타오르는 동안, 카페의 천장은 한낮 내내 그 열기를 모두 머금고 있다가 초저녁이 되면 다시 내뿜곤 했다.

덕분에 여름 내내 우리는 얼음을 입에 달고 살았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더워지면 그대로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일이 잦았다. 손님이 기척을 내며 들어오면 그제야 침을 닦고 일어나서 “줄레"하며 손님을 맞곤 했다. 기나긴 한여름의 해가 빨리 산등성이 뒤편으로 넘어가기만을 바라며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기도 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모습을 관찰하는 일도 즐거운 놀이였다.

하늘이 너무 파랗고, 해가 눈부시게 쨍쨍해서 머릿속이 아득해져 오는 어느 날이었다. 펼쳐놓은 책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인지, 책이 나를 읽는 것인지 알 수 없어질 때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무 더워. 카페 두레는 불타고 있어. 도움이 필요해!”

“이런 날에는 수영하러 가야지. 인더스강에 가볼래?”

“나는 인더스강에 몸을 던질 만큼 수영을 잘하지 못하는걸.”

“문제없어. 근처에 저수지가 있거든. 수영복 있지?”

라다크에서 수영이라니! 정신이 번쩍 드는 제안이었다. 우리는 부랴부랴 집으로 가서 목이 늘어진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챙겼다. 어딜 여행하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수영복을 챙기곤 했었는데 라다크만큼은 예외였다. 남들은 숨도 쉬기 힘들어서 골골거리는 곳에서 수영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물안경과 핑크색 비키니를 챙겨오지 않은 것이 진심으로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빠갈징, 크레이지 레이크!”

“왜 크레이지 레이크야?”

“글쎄? 우리처럼 미친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인가?”

우리는 온갖 먹을거리를 그득하게 챙겨 빠갈징으로 향하며 남부 유럽의 근사한 바닷가로 떠나는 바캉스를 상상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하얀 파도, 시원한 맥주와 신나는 음악, 흔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찬 눈부신 해변 말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물놀이 계획에 우리는 극도로 흥분했다. 다들 수영선수라도 되는 양 백 스트로크니, 버터플라이를 선보이겠다며 떠들어댔다. 얼마 후 상카르 마을에 도착했고, 친구는 개울이 흐르는 좁은 골목 입구에 차를 세웠다. 개울가에는 아낙들이 옹기종기 모여 한창 빨래를 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개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대체 이런 곳 어디에 저수지가 있을까 싶었지만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웬만한 수영장 크기의 저수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세상에. 정말이네!”

“준비됐지?”

그곳은 이스라엘 여행자들과 라다크 동네 청년들, 그리고 벌거벗은 꼬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동네 사람들만 알고 찾는 곳이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여행자들은 이런 곳은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 또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이스라엘 여자들은 화끈한 비키니 차림으로 뜨거운 태양 아래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들이 몸이라도 뒤집을라치면 동네 청년들의 뜨거운 눈빛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지곤 했다. 과연 진풍경이었다. 해발 3,500m 히말라야 자락 어딘가에서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을 즐기는 금발의 처녀들과 반대편에 죽 늘어서서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 까무잡잡한 라다크 청년들이라니. 한쪽에선 노랑머리 총각들이 웃통을 훌떡 벗고 캐치볼을 즐기고 있었다. 이쯤 되자 이곳이 히말라야 산자락인지 남부 프랑스 근사한 해변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같이 간 라다크 친구는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탄탄한 근육질 몸매의 노랑머리 남자를 가리켰다. 우리는 마주 보고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거벗은 라다크 꼬마들은 물 만난 물개처럼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라다크 친구들이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강물에서 헤엄치며 놀았던 이야기가 빠짐없이 등장하곤 했다. 맨몸으로 제 키보다 깊은 인더스 강물에서 헤엄을 쳤다느니 하는 무용담들이었다. 겁도 없이 물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아이들을 보니 그 이야기들이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었구나 싶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물가로 다가가 대충 팔과 다리를 휘둘러 준비운동을 하고 발을 살짝 담가 보았다. 온몸에 전기가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음물’이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이 차가운 물에 온몸을 담그고 첨벙거리고 있는 라다크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입이 떡 벌어질 일이었다. 그들의 몸이 벌게진 것이 뜨거운 볕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물 때문이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안 들어올 거야?”

“물이 너무 차가워! 심장마비 걸릴지도 몰라!”

“약한 소리 말고 어서 들어와. 덥다고 할 때는 언제고.”

발끝부터 서서히 물에 담가보았다. 종아리까지 10초 이상 발을 담그고 있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머리 위에는 커다란 태양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눈을 감았는데도 눈앞이 훤하게 밝았다.

“그냥 몸 전체를 담그고 기다려봐. 곧 괜찮아져. 사람 몸은 생각보다 훨씬 뜨겁거든.”

친구들은 망설이고 있는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꽥꽥 소리를 지르며 물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나를 구경하던 라다크 청년들이 깔깔 웃으며 손뼉을 쳤다. 물은 꽤 깊어서 바로 턱 밑까지 차올랐다. 턱이 덜덜 떨렸다. 귓가에 찌잉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소리가 머릿속까지 울렸다. 거대한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조금씩 팔과 다리를 움직이니 온몸의 피부에 느껴지던 냉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여기 정말 굉장하다. 라다크에서 수영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내가 말했잖아. 우리들은 어렸을 때부터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다고.”

“너희들은 산에서만 놀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물론 산에서는 더 잘 놀지!”

한참을 첨벙거리다가 밖으로 나와 타는 태양 아래 뜨겁게 달구어진 모래밭 위에 엎드려버렸다. 몸에 남아 있던 차가운 물기는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덕분에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차가워진 몸은 이내 따뜻해졌다. 어린아이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저수지 저쪽 끝에서 다이빙을 해서 이쪽 끝까지 헤엄쳐 와서는 다시 저쪽 끝까지 달려가서 다이빙을 했다.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아이들의 몸이 단단한 차돌 같았다. 허여멀건한 내 다리가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우리는 뜨거운 태양 아래 손바닥만 한 그늘 조각을 겨우겨우 찾아 들어가 미지근한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켰다. 어느새 얼굴이 새빨개져서 화끈거렸다. 친구들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한국 노래도 부르고, 라다크 노래도 불렀다. 빨개진 얼굴은 돌아올 생각을 안 하고, 바람에 머리카락은 헝클어져서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후로도 우리는 종종 빠갈징으로 바캉스를 떠났다. 그리고 카페를 찾는 손님 중 오랫동안 라다크에 머무르며 약간의 지루함을 느끼고 있는 이들에게 빠갈징을 소개시켜 주었다. 라다크에 물놀이 할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비밀스럽게 공유할 때면 그곳이 우리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장소처럼 여겨져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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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드라마를 보고 있었던 어느 밤이었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뭐해?”

“드라마 보고 있어.”

“인도 드라마?”

“아니, 한국 드라마.”

“라다크까지 와서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그럼 이 밤에 샨티 스투파Shanti Stupa(창스파에 위치한 곳으로 일본인이 세운 절로 유명하다)라도 올라가서 놀라는 말이야?”

“당장 나와. 갈 곳이 있어. 재미있는 곳이야.”

보통 밤이 되면 침대에 누워 잠이 올 때까지 수다를 떨거나, 한국에서 가져온 드라마를 봤다. 한국에서는 잘 보지도 않던 드라마들이었다. 레에서는 밤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밖에 나가면 사방이 어두컴컴해서 벽 너머의 나무 그림자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게다가 한낮에는 길바닥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던 개들이 떼를 지어 어슬렁거리며 컹컹 짖어대는데 개가 아니라 늑대 같았다. 모든 상점은 문을 닫고, 그나마 여행객들이 찾는 바나 레스토랑은 몇몇 문을 연 곳이 있기도 했지만, 모닥불을 피워놓고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하고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여행자들이 경험하는 낭만은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재미있는 곳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우리는 재빨리 옷을 꿰어 입고 밖으로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다.

“준비됐지?”

"무슨 준비 말이야?”

"가보면 알아. 일단 차에 타.”

친구들은 가끔씩 이런 식으로 대책 없이 카르둥라 방향으로 향하다가 체크포인트에서 차를 돌리는 등 엉뚱한 모험을 감행하곤 했다. 외국인이 카르둥라 패스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해당 기관에서 받은 여행허가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가끔 우리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듯했다. 또 가끔은 허허벌판 한가운데 차를 세워두고 덩실거리며 춤을 추기도 했다. 마을을 지나다가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오면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며 무작정 찾아가기도 했다. 친구들은 어디서나 춤추고 노래하기를 즐겨 했다. 약속 장소도, 만나서 하는 일도 이미 정해진 선택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서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는 샨티 스투파 쪽으로 향했다.

“설마 샨티 스투파 가는 것은 아니지?”

“샨티 스투파보다 더 굉장한 곳이야.”

친구는 공터에 차를 세웠다. 가까이에 샨티 스투파가 보였다. 레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주변에서 흘러드는 빛이 거의 없었다. 본능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더욱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이런 하늘이라면 UFO가 떼로 나타나고도 남겠다고 생각했다. 라다크에서 UFO를 떠올린다는 것은 전혀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콘택트>의 유명한 대사, “이 넓은 우주에 지구에만 생명체가 산다는 것은 공간 낭비이다”, 뭐 이런 것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라다크의 밤하늘은 충분한 근거가 되어주었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에 지구과학 교과서에 실려 있는 성운이니 성단이니 하는 것들을 찍어놓은 알록달록한 천체 사진들을 곧잘 들여다보곤 했는데, 그러다 보면 내가 가진 시간과 공간이 사진 몇 장에 순식간에 일그러지곤 했다. 나에게 우주는 무엇 하나 예상할 수 없는 괴상한 공간이었다. 예상은커녕 털끝만큼도 경험할 수 없는 세계였다. 지구가 초속 470m/s의 속도로 자전하고 있고, 초속 30km/s 정도의 속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고 배웠지만, 서울에서는 핸드폰 알람을 통해 아침이 왔음을 알고, 인터넷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소식들을 보고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태양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하며 살기에 나는 너무 바빴다. 하지만 라다크에서 나는 우주와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우주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별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밤하늘을 보고 있으면 지구 바깥 저기 어딘가에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별은 실제로 반짝거리고 있었고, 은하수가 내가 속한 은하계 일부의 모습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별똥별이 여기저기서 휙휙 떨어질 때면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로맨틱한 간절함보다는 우주의 모든 것이 엄청난 속도로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에 온몸이 짜릿해졌다,

“여기가 어디야?”

“티스루. 비밀스러운 곳이지. 저길 봐.”

친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조물이 어둠 속에 내려앉아 있었다. 구조물은 겨우겨우 달빛을 반사하며 제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대충 살펴보기에도 적잖이 큰 규모였다. 라다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탑의 기단 구조와 비슷했지만, 몸통 부분은 없었다. 층층마다 곳곳에 출입구로 추정되는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었다.

“도대체 저게 뭐야?”

“오래전에 악령들을 모아 가두어 두었던 탑이래. 지금은 저렇게 기단 부분만 남아 있지만.”

“악령이라고?”

“응. 저 구멍으로 들어가면 미로 같이 연결된 통로들이 있는데, 그 안에서 길을 잃으면 절대로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대. 악령들과 같이 저 안에 갇히게 되는 거야. 굉장하지 않아?”

“그래, 굉장하긴 한데 여긴 왜 온 거야? 설마 저 안에 들어가자는 건 아니지?”

“왜 아니야? 모험이라고! 너희들 모험 좋아하잖아!”

“아니, 이런 모험이라면 난 싫어. 안 갈래. 무섭단 말이야. 우리 그만 돌아가자.”

“무섭긴 뭐가 무서워. 한번 들어가 보자. 혼자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설마 길을 잃겠어? 나만 믿어. 내가 앞장설게.”

도대체 저 쓰러져가는 건물은 뭐고, 악령과 비밀 통로는 또 뭐란 말인가?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떠들었을 법한 이야기들을 상기된 얼굴로 늘어놓고 있는 친구들을 보고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달빛이 제법 환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건물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한밤의 침입자들의 소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티스루는 악령인지 뭔지를 제 안에 품어두고 달빛 아래 그렇게 홀연히 서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좋아. 가보자. 그 대신 절대로 혼자 움직이지 않기!”

“당연하지. 참, 소문에는 티스루 지하에 사부 마을까지 통하는 지하 터널이 있대. 길을 잃어도 정신만 차리면 사부 마을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는 각자 갖고 있던 휴대폰 플래시를 켰고 입구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드나들기에는 통로가 매우 좁고 낮아서 고개를 잔뜩 숙여야만 겨우 지나갈 수 있었다. 통로는 여기저기로 연결되어 있는데 기어올라야 하는 길도 있었다.

“지하 통로는 어디에 있는 거지?”

“난 지금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서 집에 가서 두 발 뻗고 자고 싶거든?”

“정말 지하 터널이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얘들아, 적당히 하고 이제 나가는 길을 찾자.”

굉장한 작전이라도 수행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작전을 함께 수행하는 조직원들을 챙기며 나는 조금 흥분해 있었다. 역사를 전공한 나는 대학 시절 우리나라 곳곳으로 답사를 떠나곤 했다. 유적지나 박물관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하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기에 바빴는데, 유독 폐사지에만 가면 마음을 뺏기곤 했다. 아무것도 없고 건물의 주춧돌만 남아있지만, 과거에는 굉장한 ‘무언가’ 였던 폐사지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실이 나에게는 수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다른 유적지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얘들아, 우리 그냥 나가자.”

제법 자신 있게 앞으로 나아가던 우리를 붙잡아 세운 건 좀 전까지만 해도 집에 가자는 우리를 비웃던 띨레였다.

“너 겁먹었구나?”

“이건 바보 같은 짓이야.”

“바보 같은 짓인 거 이제 알았니? 이제 와서 딴소리하지 말고 어서 따라오라고!”

띨레는 잔뜩 울상이 되어 마지못해 따라왔다. 악령을 가두어두었던 곳이라는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었지만 사실 핸드폰 불빛 하나에 의지해서 어둠 속을 헤매다 보니 악령의 존재 따위를 머릿속에 떠올릴 여유도 없었다. 끝내는 오히려 뭔가 덜컥 나타나 주기를 내심 기대하게 되었다. 얼마나 헤매었을까? 드디어 바깥으로 통하는 출구가 보였다. 들어올 때는 1층에 난 입구를 통해 들어왔는데 나와보니 2층이었다. 제법 비밀 통로답다고 생각하면서도 고작 이 정도를 가지고 악령 운운했다는 것이 우스워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게 뭐야! 시시하잖아.”

“그러게, 다시 들어갈까?”

“됐어!”

사부 마을까지 통하는 지하 터널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하고 끝나버린 모험이었지만 달빛 아래 홀연히 서 있던 정체불명의 티스루는 나에게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이후로 우주의 에너지(?)가 필요하다거나, 볼륨을 잔뜩 높여 음악을 듣고 싶을 때면 종종 이곳을 찾았다. 낮에 찾은 티스루는 초라하고 흉물스러웠다. 한밤 달빛 속에 서 있어야 제 정체를 온전히 드러내는 곳이었다.

라다크 친구들이 소개해준 비밀 장소들은 볼만한 유물, 유적도, 끝내주는 경관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빠갈징의 풍경은 에메랄드빛 인더스 강보다 사랑스러웠고, 버려진 티스루는 웅장한 레 궁전보다 감동적이었다. 우리만의 라다크 지도는 그렇게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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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문학전집 첫번째 작품 - 「한 달쯤 라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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