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 라다크] 장 보러 갑시다


음악을 들으면서 읽어보세요. 라다크가 더 가까워질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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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enzen25

거울을 보며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짚으로 촘촘히 엮인 큼지막한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장 보러 가?”

“응.”

“지난번처럼 놀다가 늦게 오지 마.”

“늦을 거야.”

“왜 또?”

“가스 실린더 찾아야 하잖아. 너무 머니까 천천히 다녀올게.”

“그래도 일찍 들어와.”

장을 보러 갔다 동네 친구와 차를 마시며 노닥거리는 걸 본 후로 지혜는 나를 줄곧 의심스러워했다. 토스트를 주문받고 나가 시내의 온갖 슈퍼와 빵집을 삼십 분 동안이나 뒤져 가까스로 식빵을 사서 돌아왔을 때도 지혜의 눈초리는 심상치 않았다. 억울함에 방방 뛰며 결백을 호소했지만 글쎄. 별로 먹히는 것 같진 않았다. 장을 보는 것은 늘 나의 몫이었다. 평소에는 가까운 가게에서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물품을 샀지만, 가끔은 이렇게 작정하고 나와서 몇 시간이고 쏘다니며 장을 봤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ATM이다. 가게 주인 아룬이 갑작스럽게 세를 내라고 해서 구시렁거리며 돈을 찾으러 왔다. 처음 레에 왔을 때 하나뿐이던 ATM이 지금은 마을 곳곳에 생겼지만, 여전히 줄은 길다. 그늘 한 조각 없는 길 위에 줄을 서있으니 여름 한낮의 뙤약볕이 듬성듬성한 밀짚모자 사이로 들어와 현기증을 일으켰다. 밀짚모자의 챙을 더 끌어내려 보아도 따가운 태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ATM 앞에 줄을 서는 일은 지루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는 대신 줄을 서주는 아르바이트도 있다고 하던데, 실제로 본 적은 없다. 라다크 아줌마들이 새치기하려고 자꾸만 몸을 옴질옴질 거리며 틈을 보고 있다.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기에 철벽 수비로 그들을 막고 무사히 돈을 뽑은 다음 향한 장소는 과일 시장이다. 과일 시장의 상권은 수염이 덥수룩한 카슈미르 사람들이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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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6개, 망고 1킬로그램, 오이 반 킬로그램, 토마토 반 킬로그램 주세요.”

“오늘은 망고가 안 좋아. 다른 데서 사.”

“그럼 망고 빼고 다 주세요.”

아저씨들은 물건 상태가 안 좋으면 팔지 않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권했다. 그들은 정직한 상인의 모범답안이었다. “이런 물건은 절대 팔 수 없어”라고 외치며 망고를 집어 던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흡사 시장판 독 짓는 노인 같다고 생각하고 속으로 낄낄거렸다.

그들은 전형적인 카슈미르 사람들과 달리 호객을 하거나 사람을 속이지도 않았고, 조르면 흔쾌히 고추고 마늘이고 덤을 한 움큼씩 줬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능글능글하게 구는 번화가의 상인들과 달리 매일 보는 내게 친한 척하는 것도 영 어수룩했다. 단골 가게 주인은 수줍은 사람이었는데 번번이 옆집 상인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보채자 자기 손님에게 치근덕거리는 친구가 부끄럽다는 듯 날 보며 얼굴을 찡그리고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물론 장을 보러 오는데 카메라를 가지고 나올 리가 없기에 그 부탁을 한 번도 들어준 적은 없다. 아저씨가 맛보라고 건네준 자두를 한 입 베어 먹으며 시장을 나와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자 맞은편 티베트 난민 마켓 앞에 선 한 젊은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도 나를 보더니 알은체를 하며 다가왔다.

“안녕. 나 기억나?”

다행히 기억이 났다. 2007년 라다크 여행 때 출근 도장을 찍던 식당에서 일하던 티베트 사람이었다. 축구선수 이천수를 닮아 이름 대신 이천수라고 부르곤 했다.

“응, 물론이지. 요즘은 식당에서 일 안 해?”

“여기서 보석을 팔아. 좀 구경할래?”

“아냐. 지금은 일이 있어서.”

“너와 네 친구, 작년에도 본 것 같은데. 라다크에서 뭐 해?”

“그냥, 조그만 카페. 시간 있으면 놀러 와.”

얼굴도 알고 인사도 자주 했지만, 딱히 대화를 나눠보지 않은 우리 둘은 어색한 안부만 주고받으며 자꾸만 시선을 허공에 던지다가 허둥지둥 대화를 마쳤다. 라다크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는’ 사람이 늘어갔다. 아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작고 폐쇄적인 사회에 조금씩 속하기 시작하면서 라다크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길 왼편에 있는 마켓에 들려 물품을 구경했다. 2층으로 된 소피 마켓은 라다크에서 제일 크고 다양한 물품을 갖춘, 말하자면 대형 마트급의 슈퍼마켓이다. 원하는 물건을 이야기하면 주인이 찾아서 가져다주는 라다크의 다른 가게와 달리 직접 물건을 보고 선택할 수 있어 매력적이었다. 필요한 생활용품과 몇 가지 요깃거리를 바구니에 담았다. 계단을 내려와 다시 타오르는 태양에 몸을 담그니 갈 길이 멀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다. 모자를 벗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는데 바로 옆에 와인 가게가 보인다. 장보기를 마치고 카페에서 투명한 컵에 시원한 맥주를 따라 마시는 상상을 하니 힘이 불끈 났다. 가게에서 파는 맥주는 미지근했지만, 얼음을 타면 될 일이었다. 침을 삼키며 맥주를 한 병 사서 메인 바자르로 올라갔다. 도보 한편에 라다크 아줌마들이 쭉 늘어서서 채소를 팔고 있었다. 그늘을 쫓아 움직이는 아줌마들은 오전에는 왼쪽에 오후에는 오른쪽에 기찻길을 만들었다. 매일 가지고 나오는 채소의 종류도, 그 신선도도 다르기에 찬찬히 살펴야 한다. 감자와 양파, 당근, 시금치는 기본으로 언제나 나와 있지만, 호박이나 상추, 배추 등의 채소는 아주 가끔씩 눈에 띄었다.

“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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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내쫓으려는 듯한 할머니의 손짓에 짐짓 당황해 멈춰 섰는데 갑자기 옆에서 뭔가 쑤욱 나오는 것이 보였다. 소다. 소는 막무가내로 얼굴을 채소에 파묻고 주린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짜증이 난 할머니는 대파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어대며 소를 내쫓는데 소는 ‘내가 뭘 잘못했어?’라는 표정으로 유유히 걸음을 떼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가 찝쩍거린다. 채소를 다 골라서 값을 치르고 가방에 넣는데 할머니가 내 장바구니 안의 맥주를 발견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할머니는 맥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니, 이 계집애가 낮부터 웬 맥주야?’라는 표정이다. 나는 라다크 말로 어눌하게 대답했다.

“스꼼싸락(목 말라서요).”

“츄퉁(물 마시면 되지)!”

짧고 명쾌한 지적에 머쓱해진 나는 덜 떨어진 웃음을 헤헤 짓는다. 여자가 술을 마시는 게 문제인 건지, 낮에 술을 마시는 게 문제인 건지, 여자가 낮에 술을 마시는 게 문제인 건지, 할머니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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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드 레의 뒷골목을 좋아했다. 촌스러운 그림과 컬러풀한 간판이 영화 세트장을 연상시킨다. 그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다른 시공간에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우선 옷부터 그랬다. 나는 라다크 전통 옷을 입은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평범한 옷을 입은 라다크 젊은이들과는 사뭇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허리를 끈으로 여미는 통이 넓은 형형색색의 바지, 기하학적 무늬가 프린트된 티, 엉덩이가 축 처진 알라딘 바지 등은 인도를 여행하는 배낭여행자들의 전형적인 옷차림새였다. 그 옷을 입어야 비로소 ‘인도 여행자’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듯 모두가 그 옷을 입었다. 하지만 정작 인도인들은 아무도 입지 않는 옷들이 언제부터 인도를 대표하는 옷이 되었는지는 언제나 의문이었다. 갑자기 평범한 티셔츠를 사고 싶어졌다. 근처에 있는 바쉬르 아저씨네 중고 옷가게에 들렸다. 2010년에 알게 된 바쉬르 아저씨는 우리를 자신의 여동생이라고 부르고 언제나 대접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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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살람알라이꿈(안녕하세요).”

무슬림식 인사를 하며 가게에 들어가니 바쉬르 아저씨와 아리프가 반겨준다.

“와알리꿈살람(안녕).”

“틱페쭉쿠(잘 지냈어)?”

“부쳐스 틱펄트(잘 지냈어요).”

힌디어와 우르두어를 쓰는 그들과 약간의 라다크어, 영어, 한국어를 쓰는 나에겐 언어의 접점이 없었다. 티셔츠를 구경하는데 바쉬르 아저씨가 짜이를 주며 이것저것 묻는다.

친구는? 카페에 있어요. 밥은 먹었어? 네. 내일 점심 먹으러 올래? 에그 파티하자. 안 돼요. 카페에 있어야 해요. 스리나가르 우리 집에 놀러 안 올 거야? 아직 잘 모르겠어요. 친구랑 얘기해볼게요. 내 딸들이 너희를 정말 보고 싶어 해.

과연 대화가 통할까 싶을 정도로 짧은 단어와 몸짓, 손짓, 표정과 그들이 알려준 약간의 우르두어만으로 우리는 꽤 다양하게 대화를 한다. 물론 한계는 있지만.

말린 살구를 사기 위해 일렬로 줄지어 있는 가판으로 향한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보통 할머니들은 신선한 채소를 팔고 할아버지들은 마른 과일과 견과류를 판다. 머핀에 넣을 살구와 살구씨를 조금 사고, 군용 립밤을 하나 샀다. 할아버지들은 군용 립밤을 어디선가 구해 와 견과류와 같이 팔곤 한다. 라다크가 군사지역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슬슬 지치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가스 충전소는 멀다. 보석과 생활용품을 파는 모띠 마켓에 가서 귀걸이를 구경하고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다시 힘을 냈다. 올드 버스 스탠드가 보인다. 버스 스탠드 뒤쪽에 호텔이 하나 있는데, 그 바로 옆에 가스 충전소가 있다.

“어제 충전 맡긴 가스 실린더 찾으러 왔어요.”

“아, 그거 오늘 안 돼. 내일 와.”

“뭐라고요? 어제 분명 오늘 오라고 했잖아요?”

“가스가 없어.”

한두 번도 아니고 언제나 이런 식이다. 오라고 한 시간에 가면 그때야 가스 충전을 하고, 해준다고 했다가 가스가 없다고 해서 허탕 치게 만들고, 빨리 해달라고 조르면 순순히 해주기도 한다. 가전제품을 같이 파는 가게는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바빠서 내일로 미루는 듯했다. 오늘 가스를 충전하지 않으면 저녁 장사는 공치는 거였기에 어떻게 해서든 충전을 해야만 했다. 나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가스 이네 똥. 굑스빠 굑스빠 살레(여기에 가스 주세요. 빨리빨리 주세요).”

아는 라다크 말을 다 동원해 애원했다. 매번 다니던 가게지만 라다크 말을 쓴 건 처음이었다. 아저씨는 신기해하며 못 이기겠다는 듯 흔쾌히 가스를 충전해준다. 작전 성공! 충전을 기다리는 동안 주인아저씨는 내게 라다크 말로 계속 이런저런 것을 물어봤다. 어디에서 왔냐, 라다크에 언제 왔냐, 라다크는 처음이냐. 기본적인 것들에 대답하다가 점점 질문이 어려워지자 알아듣기 힘들었다.

“하마고(잘 못 알아듣겠어요).”

대화는 끊겼다. 가스를 충전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 나는 가게 한구석에 뻘쭘하게 앉아 있었다. 오로지 라다크 사람들이 오고 가는 가게 안에서는 라다크 말만이 들렸다. 그 가운데서 나는 영락없는 이방인이었다. 대화의 바퀴가 맞물리지 않고 자꾸만 엇나갈 때, 이해한다고 말하고 뒤돌아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을 볼 때, 알 수 없는 힘에 이방인이 되어 자꾸만 변두리로 밀리는 것 같았던 한국에서의 날들을 떠올렸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외로움이 나를 덮쳤다. 그리고 문득 카페를 홀로 지키고 있을 벗이 생각났다.

지혜는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열두 살 때였다고 했지만 난 기억나지 않는다. 같은 문예부이긴 했지만, 왕래는커녕 인사 한번 나눈 적 없는 나를 지혜가 기억하는 건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라 했다. 또래에 비해 큰 덩치에 양 갈래 머리를 곱게 하고 다소 엉뚱한 질문을 하던 것이 내 첫인상이었다고. 중학교 일학년 때 다시 만난 지혜와 나는 친구가 되어 그때부터 단짝이 되었다. 모든 친구의 부모님에게 모범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지혜가 우리 부모님에게 낙인찍힌 것은 라다크에서 카페를 한다고 결정한 때였다. 그 이후로 우리는 서로의 부모에게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혼자서라면 할 수 없을 일을 둘이 똘똘 뭉쳐서 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부모님들이 보기에는 친구 따라 강남 가는 형국이었을 테니 눈엣가시일 수밖에.

하지만 함께이기 때문에 든든했다. 티베트에서 원치 않던 트래킹으로 두 발이 부르텄을 때, 파키스탄 파수에서 빙하를 보겠다고 산을 오르다 죽는 줄만 알았던 때, 터키 반에서 마을 사람들과 어깨동무하고 춤을 추던 때, 라다크에 와서 경이로운 만달라를 처음 봤을 때, 많은 여행의 순간을 함께했다. 그리고 함께이기 때문에 카페 두레를 시작할 수 있었다. 경계심에 무엇 하나 마음 놓고 할 수 없던 혼자일 때와는 달리 함께하면 거리낄 것이 없었고, 거리낄 것이 없으니 모든 것이 즐거워 소리 내어 웃었고, 소리 내어 깔깔 웃으니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우리는 라다크 사회에 섞일 수 있었다.

해는 져서 종적을 감추고, 한결 선선해진 거리를 걸어 돌아오는 길은 낮보다 수월했지만, 양손 가득 든 짐 때문에 남은 길이 천 리 같았다. 아등바등 짐을 짊어지고 걷는데 자동차 경적이 울리더니 창문 밖으로 낯익은 얼굴이 씨익 웃었다.

“카페로 가는 거지?”

“응, 근데 네하 스낵 앞에서 내려줘.”

“알았어. 뭐 사게?”

“알루 띠끼.”

알루 띠끼는 감자 크로켓과 비슷한 음식이다. 신선한 스낵을 위해 오전에는 재료 준비만 하고 저녁에 딱 몇 시간만 영업하는 네하 스낵은 현지인에게도 여행자에게도 인기가 많다. 친구의 차에서 내려 알루 띠끼를 포장하고 카페로 향했다. 몇 발자국 떼니 멀리 카페 창밖으로 따뜻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고작 반나절이지만 혼자 긴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행여나 뾰로통해져 있을 지혜를 웃게 할 알루 띠끼 봉지를 꽉 쥐고 카페 계단을 두 개씩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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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문학전집 첫번째 작품 - 「한 달쯤 라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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