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 라다크] 재난


음악을 들으면서 읽어보세요. 라다크가 더 가까워질거예요.



홍수피해_17.JPG


written by @roundyround




라다크의 큰 승려인 바쿨라 린포체Bakula Rinpoche(티베트 불교에서 환생한 승려를 가리키는 말이다. 라다크를 대표하는 큰 스님이었던 바쿨라 린포체는 2005년 입적하여 이듬해인 2006년 누브라 지역의 한 마을에서 환생했다)가 스피툭 곰파로 거처를 옮기는 기념으로 대규모의 법회가 열리기로 되어있는 날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느지막이 일어나 스피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메인 바자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쩐 일인지 모든 상점의 문이 닫혀 있었다. 큰 행사가 있는 날이면 으레 있는 일이었다. 그날도 바쿨라 린포체를 환영하기 위한 휴업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침 먹기는 글렀다고 툴툴거렸다. 은행 앞은 간밤에 내린 비가 수로 위로 흘러넘쳐 온통 물바다였다.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카페 손님 조디가 보였다. 어제 이야기한 대로 라면 지금쯤 카르둥라 패스를 지나고 있어야 했다. 그는 길이 위험해서 누브라 계획이 취소되었다며 허탈해했다. 조디를 위로하고 서둘러 버스 스탠드로 향했다.

어딘가 이상했다.

눈앞에 어딘가 달라진 풍경이 펼쳐졌다. 늘 지나던 길인데 여느 때와 다르게 무언가가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들이 원래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 산은 무너져 내렸고, 건물들은 저만치 흘러가 뼈대만 겨우 남아 있었다. 그제야 간밤에 일어난 일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빗물은 나무 없는 민둥산의 흙을 모두 쓸고 내려와 마을을 덮쳤다. 간밤에 내린 폭우로 라다크의 마른 땅이 초토화가 된 것이다. 우리는 레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상황을 파악했다. 발이 묶인 여행자들은 거리마다 삼삼오오 모여 해결책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창스파 입구에 들어서자 짐 보따리를 바리바리 인 사람들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배낭을 짊어진 여행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불이며, 주전자며 살림살이를 싸 들고, 한 손에는 징징거리는 아이의 손을 붙잡아 끌며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라다크 사람들의 모습은 ‘피난 행렬’ 그 자체였다. 나는 지나가던 여행자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지금 이 사람들 다 어디 가고 있는 거예요?”

오늘 밤 비가 오는데 레 시내 전체가 물에 잠길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라며 레 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인 샨티 스투파로 피신하는 중이라고 했다.

고개를 들어 샨티 스투파를 올려다봤다. 멀리서 봐도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이 샨티 스투파 위에 바글거리고 있었고, 개미 떼 같은 피난 행렬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 양첸의 식구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숙소 앞에는 동네 아낙들이 빨래를 하는 개울이 있는데, 이곳 역시 금방이라도 넘칠 듯한 회색의 물줄기가 콸콸 흐르고 있었다.

”너희들도 빨리 짐을 싸! 오늘 밤 요 앞 개울이 흘러넘칠지도 모른대. 우리는 저 옆 명상센터로 피신할 거야. 너희도 우리를 따라오든지, 샨티 스투파나 남걀체모 곰파로 피해! 서둘러!”

양첸이 이토록 당황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양첸을 보자 덜컥 겁이 났다. 우선 중요한 물품들과 옷가지, 갖고 있던 먹을 것을 모두 배낭 속에 쑤셔 넣었다. 나와 보니 창스파에는 더 많은 사람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대부분이 무표정한 얼굴들이었지만 개중에는 1박 2일 캠핑이라도 떠나는 듯 설레는 표정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미 어둑하니 땅거미가 내린 가운데 샨티 스투파로 오르는 길은 매우 위험했다. 비가 와서 이미 물렁물렁해진 돌산은 내딛는 발걸음마다 부서졌다. 발밑에 굴러다니는 돌맹이 때문에 길은 더욱 위험했다. 우리는 다시 생각을 바꾸어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샨티 스투파에서 내려와 저녁을 사 먹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양첸네 집에는 우리 둘과 2층에서 머물고 있던 이스라엘 여행자 둘만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당분간 카페 문을 닫고 힘을 보탤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다음 날 창스파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타시가 자원봉사자들에게 제공할 점심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기에 그를 방문했다. 그는 LBA의 회원으로 LBA에서 꾸린 자원봉사 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휴가차 라다크를 찾았다가 홍수 때문에 발이 묶였다는 한 스웨덴 여행자는 갓 구운 로티를 차곡차곡 쌓아 실어 나르고 있는 타시 옆에 붙어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홍수와 관련한 기사를 써서 스웨덴 사람들에게 구호 자금을 요청해보겠다고 했다. (그는 기자였다)

”현재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 단체가 구호 활동을 조직하고 있는데, 어려운 점은 없습니까? 예를 들어 갈등 같은 것 말이죠.”

우스운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피해 상황을 전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과연 타시는 질문에 대해 다소 불쾌하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런 것이 지금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한마음이 되어 일하고 있어요. 불교든, 이슬람교든, 기독교든 말이에요.”

타시의 한마디에 머쓱해진 남자는 말했다.

"물론 그렇죠. 하지만 워낙 다른 성격의 단체들이 같은 지역에서 각자 구호 활동을 조직하다 보면 으레 알력 다툼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허허.”

이에 대해 타시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런 건 없습니다. 불교 신자든 무슬림이든 크리스천이든 모두가 같은 라다크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요.”


우리는 서둘러 복구 현장으로 가봐야 한다는 타시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 창스파의 모라비안 학교 앞에는 체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자원봉사 팀을 꾸리고 있었다. 타시는 메인 바자르에 위치한 불교 곰파 앞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곰파 앞에서는 LBA 회원들이 구호 모금을 진행하고, 피해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알리며, 모여드는 자원봉사자들을 나누어 피해 지역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LBA라고 커다랗게 쓰인 노란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곰파 앞으로 모여든 자원봉사자들에게도 같은 조끼를 나누어주었다. 조끼를 받아 들고 우리는 한참을 의아해했다. 도대체 왜 이 조끼를 입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맞은편 이슬람 사원 앞에도 성금 모금과 자원봉사자 모집에 대한 내용을 담은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모여든 각국의 자원봉사자들은 대기하고 있던 작은 승합차에 올라탔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색깔의 조끼를 손에 들고 있었다. 서로의 손에 들린 같은 색깔의 조끼를 쳐다보며 우리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다들 같은 생각인 듯 보였다. 노란 머리의 한 남자가 먼저 조끼를 걸쳐 입었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도 마지못해 조끼를 입었다. 우리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버스 터미널의 상황은 여전히 최악이었다. 있던 땅은 사라지고 새로운 모양의 땅이 만들어져 있었다. 복구 현장에는 일을 하는 사람들보다 구경꾼들이 더 많아 보였다. 이곳 역시 LBA 노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차는 촉람사르Chogramsar(레의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라다크 사람, 티베트 사람, 다른 지역에서 올라온 인도 사람 등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아 꽤 큰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홍수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마을 중 하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차 안에 있던 사람들 입에서는 저마다 탄식이 흘러나왔다. 촉람사르 쪽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다. 산사태로 사부 마을의 모든 것을 휩쓸고 내려온 진흙이 촉람사르 마을을 덮쳐 건물 높이로 다시 만들어진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른 라다크 땅 위에 떨어진 물 폭탄이 새로운 강줄기를 만들어 흔들리는 땅 위로 무섭게 흘러넘쳤다.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벽은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상점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었던 마을 중심부에 들어서자 자원봉사자들과 주민들이 일렬로 죽 늘어서서 건물 안에 들어찬 진흙을 퍼다 나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건물 내부에서부터 바깥까지 족히 20m는 되어 보이는 긴 줄이었다. 이곳 역시 노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차에서 내려 손이 부족해 보이는 줄을 찾아 곳곳에 섰다. 왼쪽 사람에게 진흙이 든 바구니를 이어받아 오른쪽 사람에게 전달해야 했다. ‘이쯤이야’라고 생각했지만, 물을 잔뜩 머금은 진흙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고, 양어깨는 곧 욱신욱신 저려왔다. 놀랍게도 주민들의 표정은 밝은 편이었다. 어떤 아주머니는 연신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의 사기를 돋우고 있었다. 내 왼쪽의 라다크 비구니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주었는데, 바구니에 담긴 진흙이 아무리 무거워도 그녀의 웃음 때문에 나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건물 안에 가득 찬 진흙을 한 바구니씩 퍼다 없애는 이 광경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작업 속도는 의외로 빨랐다. 한 시간 간격으로 라다크 아주머니들이 한 주전자 끓여오는 밀크티를 나누어 마셨다. 힘이 달릴 때쯤에 맞는 티타임은 꿀맛 같았다.

점심 식사를 나누어주는 일은 인도 군인들의 몫이었다. 밥, 달, 짜파티, 채소반찬에 아짤(인도식 피클)까지 더해진 꽤 근사한 탈리였다. 연신 맛있다고 재잘거리며 숟가락을 움직이고 있다가도 사람들 뒤편의 살풍경이 눈에 들어오면 목구멍이 컥 하고 막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다. 길 위의 진흙은 기계가 치울 수 있다 해도 건물 안에 들어찬 진흙은 순전히 사람 손에 달려있었다. 또다시 같은 움직임을 되풀이했다. 팔이 길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오후 세 시가 넘어가자 뜨거운 태양 아래 달궈진 지열이 우리들의 몸을 더욱 지치게 했다. 모두 벌게진 얼굴로 웃는 낯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무리 중 몇 명과 함께 레로 돌아가기로 한 우리는 LBA에서 준비해 둔 차를 타고 이동했다. 우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흙 범벅이 된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레 시내에는 현장 곳곳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다가 돌아온 여행자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당분간 낮에는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여섯 시쯤 레로 돌아와 카페 문을 열기로 했다. 그리고 2주 동안의 수입은 성금으로 기부하기로 했다. 우리는 촉람사르와 소남 노르부 병원 등지에서 주로 활동했다. 의료 캠프가 곳곳에 차려졌지만, 부상자가 워낙 많아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상태로 병원을 빠르게 복구하는 일이 시급했다. 병원에서 해야 하는 일도 같았다. 부상자들을 수용할 병실부터 진흙을 거두어 내고, 살수차가 들어와 물을 뿌리면 그 뒤를 다시 정리했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어디선가 진흙은 또 들어왔다. 지독한 작업이었다.
저녁이 되면 갈 곳을 잃은 여행자들이 카페에 바글거렸다. 끔찍한 참사에 대한 안타까움과 라다크 여행을 포기해야만 하는 아쉬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레를 빠져나가는 비행기 표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여행자들이 전부 빠져나간 후 홀로 남아 상처를 쓰다듬고 있을 라다크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쓰려왔다.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라다크에 남아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도 정부도 피해 복구 작업에 사활을 건듯 상황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전되어갔다. 레로 들어오는 육로가 완전히 차단되어 생필품 부족으로 아비규환이 될 것이라는 예상도 빗나갔다. 홍수가 난 다음 날 ‘샨티스투파 대피 소동’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침착했다. 마날리로 가는 길이 열리기까지 적어도 3개월은 걸릴 것이라고들 이야기했지만 20여 일이 지나자 마날리 길이 다시 열렸다.

우리는 모아둔 돈을 손에 쥐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이 돈을 전달해야 할지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스웨덴 기자의 질문에 대한 친구의 대답대로 홍수로 피해 입은 사람들을 돕는 일에 종교의 차이가 무슨 상관이냐 싶지만 막상 한 군데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종교를 갖지 않은 우리에게 이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LBA 측에 성금을 낸다고 해서 부처에 귀의할 것을 선언하는 것도 아니고, 이슬람 사원에 낸다고 해서 샤하다Shahada(이슬람의 신앙 고백)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라다크 사회가 굉장히 종교적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이질감이기도 했다. 내가 어떤 종교를 가졌느냐는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앞서 말했듯이 국적을 묻는 말 다음으로 많이 받는 질문이 종교를 묻는 말이었으니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돈을 세 등분해서 모라비안 학교, 이슬람 사원, LBA에 각각 전달하기로 했다. 우리로서는 나름의 중립선언이었다. 평화로워 보이기만 하는 라다크 사회에 도사린 종교적 갈등에 대해서 알아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1989년 여름에 있었던 무슬림과 불교도 사이의 충돌 이후, 불교도들은 오랜 시간 동안 라다크 사회 내부에서 지켜왔던 입지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1989년 충돌의 주요 원인은 무슬림이 주도하는 주 정부가 불교도들을 차별한다는 인식이 불교도들 사이에 자리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라다크 사회 내부에 무슬림 인구가 늘어가면서 그들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이슬람교는 개종을 허락하지 않지만, 불교에서는 ‘개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에 불교를 믿던 라다크 여자가 무슬림 남자와 결혼하여 무슬림이 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슬림 여자들은 종교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며 괴로워했지만, 부처를 따르던 라다크 여자들이 사랑을 좇아 기꺼이 히잡을 쓰는 일은 점점 잦아졌다.

라다크 사회 내부에서 무슬림들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자 불교 협회는 이탈하는 불교도들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라다크 여자와 결혼하려는 무슬림 남자에게 린치를 가하거나, 라다크 사회 내부로 흘러들어오는 기독교 선교 단체에도 날을 세웠다. 구호 활동을 빌미로 기독교 단체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자원봉사자들에게 ‘LBA’라고 커다랗게 쓰인 조끼를 나누어주던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재난의 상황 속에서도 누가 더 많은 돈과 자원봉사자를 모으는가는 곧 누가 더 큰가, 누가 더 강력한가의 문제였다. 말하자면 재난 상황은 제 세력의 범위를 확실하게 증명할 기회였던 것이다. 또 동시에 세력을 넓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메이저’가 되는 편이 밥그릇을 차지한다는 지구상의 모든 사회와 조직을 꿰뚫는 간단한 원칙은 라다크 사회 내부에도 정상 작동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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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문학전집 첫번째 작품 - 「한 달쯤 라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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