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 라다크] 마찬가지의 청춘


음악을 들으면서 읽어보세요. 라다크가 더 가까워질거예요.



여행사가 즐비한 레의 거리1.JPG


written by @zenzen25




오후 세 시 반. 약속한 시간보다 삼십 분이 지났지만, 델렉은 오지 않았다.

카페 손님으로 만나 친구가 된 델렉은 가수 뺨치는 노래 실력과 수준급 기타 연주로 ‘라다크 음악 강좌’의 강사로 전격 발탁되었다. 카페 두레의 야심찬 기획에 뜻을 함께하기로 한 뒤부터 델렉은 매주 한두 번 카페에서 라다크 음악을 가르쳤다. 델렉은 기타를, 지혜는 플루트를, 싱게는 하모니카를 연주하고 나와 같이 악기에 별 재주가 없는 보통의 다른 참가자들은 목소리를 악기 삼아 노래하곤 했다. 오늘이 그 약속된 강좌 날인데, 델렉은 올 생각을 않았다. 평소 수강생이 우리 둘뿐이라 델렉이 안 오거나 늦게 와도 개의치 않았는데, 오늘은 카페 손님 두 명이 참여한다고 같이 기다리고 있기에 초조하다. 멋쩍기도 하고 민망한 마음을 참지 못해 전화를 거는데 받지도 않았다.

“죄송해요. 일이 생겼는지 연락이 안 되네요. 다음에 함께해요.”

어쩔 수 없이 손님을 돌려보내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기가 직접 잡은 날과 시간인데, 이렇게 못 지키나 하는 원망이 섞여, 오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앙심까지 품었다.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난 저녁이 되어서야 델렉이 나타났다.

“델렉! 너 낮에 왜 안 왔어?”

나와 지혜는 눈을 흘기며 득달같이 달려들어 델렉을 공격했다.

“미안, 미안. 틱셰Thiksey(레에서 20km 정도 떨어진 마을. 벼랑 끝에 세워진 틱셰 곰파가 유명하다)에 다녀왔어.”

“약속도 어기고 띡세를 다녀왔다고? 아니, 대체 왜?”

“갑자기 일이 잡혀서, 가이드 하러.”

다른 일도 아닌 밥벌이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델렉을 비난할 수는 없기에 볼멘소리가 쑥 들어갔다.


오랜 세월 목축과 농경으로 삶을 꾸려왔던 라다크 사회는 개방 이후 산업구조가 철저히 개편되어 관광객이 그들을 먹여 살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라다크의 수도 레 인구의 90% 정도가 크든 작든 관광 산업에 종사한다. 그런데 문제는 기후적, 지형적 특수성이 이들 관광 산업을 기형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일 년에 4개월 정도만 육로 여행이 가능하기에, 결국 그들은 4개월 동안의 관광업으로 8개월을 먹고살아야 한다. 뛰어난 장사 수완으로 유명한 카슈미르 상인들과 제 2의 유대인으로 불리며 악착같은 생활력을 보이는 티베트 사람들이 레 시내 대부분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남은 일부의 기회가 라다크의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돈을 벌 수 있는 기간은 정해져 있고, 가진 건 몸뿐이기에 보통의 라다크 젊은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결국 가이드다. 델리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음악을 좋아하고,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선거 운동을 돕기도 했던 델렉도 결국 이러한 맥락에서 가이드 일을 하고 있었다. 교육열이 높아 중학교 때부터 잠무나 찬디가르로 유학을 가고, 웬만하면 대학교육까지 받는 라다크의 많은 젊은이들이 여행사에 소속되어 성수기에 바짝 가이드로 일하며 돈을 버는 것이다. 택시를 사서 몰거나, 마음 맞는 몇 명과 의기투합해 레스토랑이나 게스트 하우스를 빌려 운영을 하는 건 그나마 모은 돈이 꽤 있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사실 가이드라고 해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이드의 일만을 생각해선 안 된다. 여행객들을 이끌고 불교 사원 같은 관광지에서 가서 이것저것 설명해주는 사원 가이드는 양반이다. 라다크에 오는 많은 여행객(특히 서양인)들의 주목적은 트래킹이기에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일주일짜리, 열흘짜리 트래킹을 안내하러 신출귀몰 움직여야 했다.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에너지가 소모되는 듯한 고강도의 노동이었다.



트레킹.JPG


하루는 카페에 놀러 온 델렉을 비롯한 몇 명의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트래킹 가이드하면 돈 많이 받아?”

“하루에 800루피(한화로 2만 원) 정도?”

“하루 종일 걷는데?”

“응. 근데 중요한 건 일당이 아니야. 손님을 잘 만나면 팁이 어마어마하거든.”

“많이 줘봤자 100달러 정도 아냐?”

“아니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많이 받는 사람은 1000달러까지 받기도 해.”

“팁이? 그렇게 많이? 말도 안 돼!”

우리 둘은 팁의 액수에 경악하며 서로 마주보다 여행사를 운영하는 다른 친구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 친구는 뭔가 좋은 일이 생긴 듯 싱글벙글 웃으며 카페로 들어와서 이야기를 늘어놓았었다.

"뭐 즐거운 일이라도 있어?”

“오늘 유럽에서 온 트래킹 그룹 때문에 한몫 잡았거든.”

신이 난 친구는 원래 한 그룹 당 받는 돈에다 후하게 팁까지 받았다고 자랑을 했다. 지금은 기억도 안 나지만,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나는 바로 계산이 안 돼 손가락을 접어가며 얼마인지 한참을 헤아렸다. 각자 계산이 끝나자 우리는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믿을 수 없는 가격이었다. 이래서 다들 여행사를 차리는구나 싶은 생각에 멍하니 고개를 끄떡거렸었다.

“돈이 되는 트래킹 그룹을 많이 잡아야 해. 너희 카페 손님들 좀 소개해줘.”

우리 카페에 오는 손님들 중에는 트래킹을 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아니 트래킹을 하는 손님이 오더라도 그런 돈을 낼만한 사람들은 우리 카페에 올 리 없었다. 외지고 낡은 우리 카페를 알 수도, 찾을 수도 없을 테니.

만일 이 기억이 없었다면 트래킹 가이드를 하는 친구들에게 "일당은 적어도 팁이 많으니까 괜찮은 거 아냐?”라는 섣부른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팁을 많이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그것은 또 복불복이기도 하니) 실질적으로 트래킹을 이끄는 이들은 하루에 800루피 밖에 받지 못하기에 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여행사 사장은 그들은 연결해주는 것만으로도 돈방석에 오르는데 말이다. 심지어 트래킹 가이드는 짐을 싣고 다니는 ‘말’보다도 적은 돈을 받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말 주인이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겠지만 너무 당연해서 씁쓸했다. 최근에 트래킹을 다녀와 몰라보게 수척해지고, 검게 그을린 싱게의 자조적인 말이 날 더 착잡하게 만들었다.

“난 진짜 트래킹이 싫어. 가고 싶지 않아. 근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하는 거야.”

이들에게는 다양한 직업 선택이 불가능하다. 좋든 싫든, 작게든 크게든 관광업에 종사할 수 밖에 없고, 보통 가이드, 레스토랑, 택시 운전수라는 한정적인 범위 안에서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다시 친구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묻는다.

“너희들은 어때? 한국은?”

“우리도 다르지 않아. 겉으로 보기에는 너희들보다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아.”

내 능력과는 별개로 ‘글’에 대해 희망을 품던 시절, 나는 한 외주 프로덕션의 막내 작가로 일했다. 번번이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PD가 찍어온 테이프를 앞뒤로 재생하며 풍경 묘사를 하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게 받아 적었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동이 틀 무렵에야 밖으로 나와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어깨를 펴고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꼴딱 지새우는 이 밤들을 얼마나 높이 쌓아야 이 일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렇게 반복되던 어느 새벽, 문득 지금이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돈을 더 벌고, 일이 편해진들 그때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기설기 쌓인 밤들은 어느 날 와르르 무너졌다. 일을 관둔다고 하자 회사 대표가 만류하며 말했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 조금만 더 버티면 입봉시켜 준다니까?”

후회스럽지 않았다. 단지 관두겠다는 말이 힘들고 미안해 시기가 늦어진 것이 후회스러웠다.

“관둬봤자 결국 돌아오게 될걸? 별 수 있겠어? 결국 너도 역시 끈기도 인내도 없는 애였구나.”

같이 일하던 사람들에게 이 비슷한 말을 혹은 비슷한 눈빛을 받았다. 힘들지언정 한 번도 대충 일해본 적 없었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다면 그냥 그렇게 두는 수밖에. 그래서 난 안녕을 고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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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 시작된 그 여행의 끝자락에서 다시 당연하다는 듯 라다크로 돌아왔다. 방송 일과 안녕을 고한 이후로 나는 무엇인가 되려는 시도를 중단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되려는 욕망이 아니라 어떤 것을 하려고 하는 열망이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 하자. 글을 쓰고 싶으면 쓰고, 여행을 하고 싶으면 하고, 카페를 하고 싶으면 하자. 돈이 필요하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면 됐다. 그것이 더 사정이 나았다. 그렇게 나는 방송 작가가 되려는 삶에서 뭐든지 하고 싶은 것은 다하고 사는 삶으로 돌아섰다. 너무도 두렵고 망설여지던 걸음을 한 발짝 떼자 오히려 세계는 넓어졌다. 정답이 없었고 내 앞에 무수한 선택지가 놓였다. 그리고 그 시작이 카페 두레였다. 돈을 좇고, 목표를 좇고, 대가를 좇는 것에서 자유로워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카페 두레는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공간이었고, 나와 다른 이들의 삶의 지평이 맞닿는 곳이었다. 현지인들과 여행객들이 어우러져 자신의 삶을 나누고, 라다크 음악 교실이나 한국어 교실을 열어 서로의 문화를 나누었다. 손님에서 친구가 된 사람들은 우리의 부엌에서 다양한 음식을 만들었고, 술을 한잔 곁들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곳에는 들뜬 목소리와 웃음소리와 진지한 성찰들이 떠돌아 다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지만 아무것도 아니어서 행복했다.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될까 싶던 의아함은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희망으로 바뀌었다. 아직 내 삶은 미완성이다. 하나의 가능성은 또 다른 가능성에도 물꼬를 트게 했다. 내 삶을 조물조물 거리며 가끔은 이보다 더 허황되기도 한, 가끔은 현실적이기도 한, 가끔은 미친 짓 같기도 한 무수한 가능성들을 계속 좇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을 친구들에게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다. 라다크라는 사회에서 자라난 친구들에게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나의 삶과 우리 사회 저변에 깔린 맥락을 상세하게 이해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일반적인 사실들, 한국의 청년 실업이 얼마나 심각한지, 한국의 젊은이들이 공무원이 되기 위해 혹은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피 터지게 열심히 공부하는지에 대한 얘기들만 알려줬다.

그리고 각자 주섬주섬 하고픈 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꺼낸다.

누군가는 라다크에서 손꼽히는 사업가가 될 거라는 야망을 드러내기도 하고, 누군가는 파일럿이나 모델 같은 직업을 갖고 싶다고 수줍게 말하기도 하고, 누구는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고, 누구는 여행객을 혹하게 할 새로운 아이템을 구상하기도 한다.
사회적 기반과 산업적 구조가 다르기에 나와 라다크 친구들의 고민은 굉장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를 전공하고, 지금은 가이드를 하고 있지만 변호사를 꿈꾸며 델리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델렉과, 국문학을 전공하고 보조 작가 일을 하다 라다크에서 카페를 하는 나의 상황이, 노동으로 시작해 의미를 찾아가려는 우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이제야 이걸 알게 된 거지?

처음 라다크를 방문한 2007년 나는 40일 동안 라다크에 있었다.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만달라를 만들고, 기도를 드리는 스님들을 만났고, 호의를 베푸는 가족을 만났고, 내게 인사하며 밝게 웃어주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만났고, 붉게 튼 얼굴 때문에 부끄러움을 갖고 태어난 것 같은 귀여운 아이들을 만났다. 내가 보고 맺은 관계에 대한 이 짧은 설명은 레 시내 어디에나 볼 수 있는 관광 엽서 사진과 비슷했다. 다섯 가지 인물군이 활짝 웃으면서 찍힌 다섯 장의 엽서. 내가 만난 최초의 라다크는, 내가 라다크에서 맺은 최초의 관계는 그렇게 압축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살아 있는 사람은 없고 정지한 이미지만 있었다. 그 당시 내게 라다크 젊은이들이란 지워진 존재였고 사진 바깥의 인물이었다. 카페를 준비하면서 그들은 조금 조금씩 사진 프레임을 뚫고 들어오다가 현재의 생생한 고민들로 인해 ‘라다크’라는 사진의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젊은이들은 라다크 사회의 원동력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 존재가 부각되지 않았을까?


그 책임의 일부분은 [오래된 미래]에 있는 것 같다. 스웨덴 출신의 헬레나 호지가 쓴 이 책은 라다크를 여행하는 사람들의 필독서이자 생태주의자들의 교과서이다. 자그마치 40년 전에 라다크 지역으로 들어온 헬레나 호지는 십여 년의 연구 끝에 라다크 사람들의 삶과 생활이야말로 가장 생태적이고 인간적이라는 결론을 냈다. 하지만 오랜 전통을 그대로 지키고 살았고, 가난도 싸움도 몰랐던 라다크 사회는 외부 세계에 개방이 되기 시작하면서 변질되었고 자본의 위력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고 말한다.

그녀는 생태학자의 입장에서 그 변화에 대한 씁쓸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까지도 [오래된 미래]속의 라다크를 꿈꾸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책에서 본 모습들과 유사한 장면들만을 찾거나 변화한 모습을 보며 혀를 차기만 한다. 그들은 현재의 라다크를 보려고 하지 않고 40년 전의 라다크만을 보고 있다. 책에서 젊은이들은 현대적 삶을 좇으며, 전통을 버리고 청바지를 입고 콜라를 마시는 변절자처럼 그려졌다.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비난받는 젊은 변절자들이 여행객들의 눈에 들어올 리도, 그들의 사정이 궁금할 리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변화를 받아들이고, 현재의 삶을 사는 그냥 보통의 젊은이들일 뿐인데... 여행자들은 안정과 평화를 얻으러 온 아름다운 라다크에서 ‘불편한 진실’을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자꾸 변해만 가는 라다크의 현실만이 안타까울 뿐이니. 다섯 장의 엽서만을 마음에 두고 오랫동안 곱씹고 싶을 터이니. 예전의 내가 그랬듯이.



여행사가 즐비한 레의 거리2.JPG


스팀문학전집 첫번째 작품 - 「한 달쯤 라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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