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說 스팀시티 영웅전] 80. 두 사람, 상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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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라총수와 나의 첫 해외여행은 33일간의 유럽 일주였다. 내비게이션이나 구글지도 같은 건 있지도 않은 때라 손으로 적어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쫙쫙 펴서 게스트하우스를 찾곤 했다. 카페, 혹은 블로그에서 얻은 그 정보는 우리를 늘 헤매고 만들었고, 11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다리에 쥐가 날 때쯤 우리는 늘 블로거들에게 쌍욕을 해댔다. 가장 많이 준비했고, 가장 많이 돌아다녔고, 가장 많이 헤맸던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우리는 대부분의 여행을 함께 했다

_ [위즈덤 레이스 + BOOK 100] to 라라님 (feat. 80일간의 세계 일주) / 이오



이오는 라총수의 친구이자 동창이자 동료입니다. 두 사람은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을 뿐만 아니라, 모험과 도전의 지난 시간을 언제나 함께했습니다. 두 사람은 열심히 세상을 돌아다녔습니다. 아시아, 유럽뿐만 아니라 터키, 시리아와 같은 중동지역과 발칸반도의 마케도니아, 코소보, 몬테네그로, 심지어는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 파키스탄, 티벳, 인도의 라다크에까지.. 둥근 지구를 열심히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인도의 라다크에서는 아예 카페를 차려버렸습니다.


"너희는 왜 자꾸 라다크에 오는 거야? 지겹지도 않아?"

"좋으니까, 한국에 있으면 자꾸 생각이 나."

"그럼 라다크에서 언제까지 여행만 할 셈이야? 놀러 오는 건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아?"

"그게 무슨 뜻이야?"

"라다크에서 뭔가 해보라는 거야. 너희에게도, 라다크에도 의미가 있을 만한 무언가를 말이야."

그의 말을 곱씹으며 라다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할 수 있는 일들은 동시에 '하고 싶은 일'이어야 했다. 앞으로도 계속 여행자의 신분으로 라다크를 찾고 싶지는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라다크 사람들이 사는 공간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싶었다.

우리는 여행자도, 현지인도 제 집처럼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공간을 만들어 보기로 결정했다. 그 공간이 현지인과 여행자에게 서로 의미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지인들에게 여행자들은 돈벌이의 수단이며, 얼마 동안 머무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나버리는, 낯선 것들을 소비하기에 바쁜 사람들이었다. 여행자들에게 현지인들은 돈에 혈안이 된 사기꾼이거나, 카메라 렌즈 저편의 피사체이거나, 엽서 속의 이미지로 남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때때로 특별한 인연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각자가 속한 세계가 너무 달랐다.

그래서 우리는 카페를 열기로 했다. 이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은 함께 먹고, 쉬고, 가진 것을 나누며 서로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서로 배우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에게 가치가 있을 만한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 말이다. 가진 것은 무엇이든, 누구와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우리나라 농촌 공동체 '두레'에서 이름을 따왔다

_ 한달쯤 라다크 / 라총수, 이오



그렇게 3년간 라다크에서 카페를 열고, 두 사람은 그 기록을 묶어 <한달쯤 라다크>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정식으로 작가로 데뷔한 것이죠. 지구를 열심히 돌아다닌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이 머무는 곳에서 현지인들과 직접 상호작용하고 여행자들과 교감하며, 서로 돕고 가르치는 공동체를 직접 시도해 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스팀시티 커뮤니티 센터]를 위한 연습게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남들은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을 하고, 두 사람은 서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와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 같습니다. 라총수는 자신만의 노마드 라이프를 구축해 갔고, 이오는 직장생활을 선택하여 5년여간 조직 사회를 경험했습니다. 전처럼 일상과 목표를 함께 공유할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의 오랜 관계는 여전히 단단하고 끈끈하게 묶여 있었고,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총수는 자신이 구축한 노마드 라이프의 확장을 위한 기회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스팀시티]의 총수 말이죠.



"물론 두 사람 모두 마냥 순조롭고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 거예요. 30대의 한국 여성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결혼과 진로에 대한 갈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무거운 짐이었겠죠. 주위에서 들려오는 말과 시선은 그렇더라도, 지속적으로 자신이 선택한 삶의 가치를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해야 하는 일은, 낯선 곳에서의 창업보다 더 무겁고 어려운 일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라다크 이후의 시간 동안 상실의 경험을 해야 했어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가슴 아픈 이별을 경험해야 했죠. 잠 못 이루는 밤들이 계속되고 있었어요."



상실의 시대


2015년과 2016년에는 유난히도 안 하던 짓을 많이 하였다.

2015년 처음 하기 시작한 안 하던 짓은 오늘 하루 수고가 많았던 나에게 꽃을 선물하겠다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는 길 꽃집에 들러 사 들고 온 미니 화분에서 시작되었다.

그날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함께 올린 글에는 '불면의 밤을 쌓으며 힘들어하던 나의 몸과 마음에 꽃과 풀을 선물함'이라고 쓰여있다. 쨍한 아침이 방 안에 새어 들어올 때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날들이었다. 나쁜 일들은 이날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몰려와 낮에도 밤에도 나를 울게 만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지내시던 할아버지를 구정 연휴가 지나면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기로 했는데 새해 인사를 드릴 틈도 없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다음 달엔 내가 몹시 아끼고 사랑하던 어린 사촌 동생이 긴 시간 지독한 병과 싸우다 죽었다. 아프지 않았다면 그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그 애가 갑자기 떠난 그 날은 3월 1일이었다. 나도 견디기 힘들 만큼 슬펐지만, 아버지를 잃은 나의 아버지와 어린 아들을 잃은 나의 외삼촌, 그들의 슬픔을 헤아리느라 나의 슬픔을 다독일 겨를이 없었다. 그해 봄, 나를 위로하는 과정을 미뤄둔 대가로 조금씩 우울이란 것의 실체를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다.

_ 안녕하세요. 여기, 흔적을 남기러 왔습니다. :-) / 라총수



라총수의 스팀잇 첫번째 글입니다. 라총수는 이별의 아픔을 글로 승화시키려 스팀잇에 찾아들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는 [스팀시티]의 총수가 되었으니 가슴 아픈 이별은 그만 놓아주고, 새로운 만남의 설레임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구는 둥글고 우리의 꿈은 여전히 달리고 있으니 말이죠. 그것이 아직 생을 더 이어가야 할 이들의 의무입니다. 안타깝게 떠나간 이들의 몫까지 대신해서..



"이오 역시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중이었죠."


지는 해는 사라진 것, 사라질 것들,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는 힘들어진 조금 더 높은 온도의 웃음이라든지, 생각하면 가슴이 뭉글뭉글해지는 이름이라든지, 반짝임이 사라진 과거의 기억이라든지. 그러다 보면 가슴이 아릿아릿해지며 감당할 수 없게 슬퍼진다. 혼자 여행을 하니 필연적으로 장착되는 이 빌어먹을 감성에서 도저히 달아날 수가 없다. 그래서 지난 태국 여행에서는 지는 해를 보며 감정의 밑바닥까지 치닫곤 했다.

아니, 단순히 혼자여서 때문이 아니었다. 연이어 상처받는 일로 극도로 무너져 있어서 그랬다. 석양을 좇으며 내가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석양이고 싶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는 것도 싫었고, 쓰면 쓸수록 내 글이 미웠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무기력한 나날이 이어졌다. 무언가 애써 하고 싶지 않았고, 애를 쓸 에너지가 전혀 없었다. 그저 가라앉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며 이따금 숨을 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_ 스팀잇! 이제 시작합니다. / 이오



"이오의 스팀잇 첫번째 글이에요. 두 사람이 동시에 스팀잇을 시작한 것도 아닌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그 시작은 상실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로 부터였어요. 그랬습니다. 희한하게도 그때의 스팀잇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아픔을, 열어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스팀잇의 글쓰기에 무슨 마력이 있는지, 사람들은 깊은 사이에도 좀처럼 하기 힘든 속마음, 상처들을 풀어놓고는 했죠. 누구도 섣불리 위로하지 않고 다들 그냥 끄덕이며 읽어주었어요. 그래서였던 것 같아요. 마법사도 이곳에 참 많은 속마음들을 풀어 놓았던 것 같네요."



상실의 시대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디선가 모여들고, 하나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상처는 어느새 아물어 가고, 슬픈 마음, 아픈 가슴이 조금씩 나아지고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그때의 스팀잇은 그런 무장해제의 마법을 부리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연약해진 마음은 더욱 쉽게 상처받고,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었다는 건, 무엇에도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 단단해지지 못한 마음이 부주의한 반응과 오해에 얽혀들면, 그 마음은 더더욱 산산조각이 나고 상처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해와 물의를 양산하고, 상처받은 마음은 갈등으로 전환되어, 죽자고 덤벼드는 위험한 상황을 야기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보호해 줄 장치도 마련되지 않은 채로 스팀잇의 마법은 너무 빨랐습니다. 사람들의 기대치는 스팀잇의 공적이고 안정적인 컨센서스가 마련되기도 전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위험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법사는 그즈음에 발을 빼려고 했습니다.



"기대치가 높아져 버린 거예요. 상실의 감정을 내어놓고 위로받는 일은 매우 귀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높아진 기대치는 과잉된 행동과 불필요한 논쟁으로 이어지기 쉽지요. 보호받아야 할 마음이 오히려 전장의 한복판에서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오히려 위로가 폭력으로 전환되기도 하지요. 서로 예민해지고 민감해집니다. 별거 아닌 말에도 상처를 받고. 글로만 소통하는 것의 한계는 오해와 루머를 거듭하며 부풀어 오른다는 거예요. 오해를 기반으로 사람들은 무리를 짓기 시작하고, 편이 갈라져서 다투다가, 지쳐서 모두 떠나버리게 되지요. 커뮤니티의 전형적인 악순환이에요. 그때의 스팀잇은 그러한 갈등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고 있었어요. 그런 것이 감지되자 마법사는 이만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아무리 마법사라도 그런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요. 상처받은 영혼들이 폭주하기 시작하면 그것만큼 무서운 게 없죠. 그런데 덜컥 [스팀시티]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뭔가에 홀렸는지, 정신 차리고는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어쨌든 만나야 할 인연들이 있었던 거죠. 여기 스팀잇에서, 상처와 상실의 기억을 딛고 미래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운명들, 인연들이 있었던 거죠."



이오 역시 상실의 격랑으로부터 헤엄쳐 나와, 앞으로 나아가라는 운명의 부름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스팀시티]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라총수의 친구로서가 아닌, [스팀시티]의 첫번째 투자자로서, 자신의 새로운 운명의 대양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이른 것입니다.



그의 상실의 기억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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