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22. 파랑 채집가 by 로이스 로리 - 사는 게 다 그런 거라고? 아니, 우리가 바꿀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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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 전에 저자인 로이스 로리가 그리고 있는 이 미래 시대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해둬야 할 것 같다. 모든 것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난 후 다시 재건된 먼 미래. 살아남은 사람들은 곳곳에 모여 각각의 사회를 건설해서 살아가게 된다. 그중에는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사회도 있고, 마치 원시 부족처럼 퇴화된 사회도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각 사회들 간에는 생활수준, 법, 과학 기술, 의술 등 많은 부분에서 크나큰 격차가 있다. 들리는 풍문으로 다른 사회는 어떻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떠돌지만 지리적, 사회적, 법적인 여러 여건 때문에 막상 다른 사회를 서로 오가며 소통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 책은 <기억 전달자> 4부작 중 2편이다. 1편 <기억 전달자>에서는 발전된 과학기술로 완벽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디스토피아 사회를 다뤘는데, 2편 <파랑 채집가>에서는 기술이 그다지 발달되지 못한, 부족사회 같은 곳이 배경이다. 동시대이긴 하나 공간적 배경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후속 편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시간 배경만 공유할 뿐, 1편의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1, 2편의 등장인물들은 3편과 4편에 다시 나온다.)

전작 1편에 대한 독후감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글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21. 기억 전달자 by 로이스 로리 - 내 인생의 주인이 된다는 두려움


출처: 교보문고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삶


사냥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곳은 매우 살벌한 세상이다. 이곳이 살벌한 곳이라는 것을 주인공 키라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병으로 죽은 엄마를 묻고 돌아오자마자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마을 밖으로 – 야수가 살고 있다는 숲 속으로 – 내쫓고, 그녀의 집을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을회의 재판에서 지게 되면 그녀는 영락없이 마을 밖으로 쫓겨나게 될 신세다.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다리를 절었던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었다. 이곳에서는 장애가 있는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내다 버리기 때문이다.

키라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리를 절었던 그녀는 이곳의 법대로 라면 아기 때 죽었어야 했지만, 다행히 그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마을에서 숭상받던 사람들이라 특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이어 이제 엄마까지 돌아가신 마당에 더 이상 키라를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키라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온전한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다는 걸, 남들처럼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내야 했다. 다행히 그녀에겐 자수를 아름답게 놓는 특출난 능력이 있었고, 그 덕택에 지금까지 무탈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

그녀의 그 특별한 능력이 이번에도 그녀를 살려주었다. 마을 연례행사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외투를 수선하는 조건으로, 지도부는 그녀를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전보다 더 좋은 거처를 – 방 옆에 화장실과 욕실이 딸려 있는 - 제공해주었다. 도대체 어떤 외투이기에 키라에게 이런 대우를 해주었느냐고? 그건 보통 가수가 아니었고, 보통 외투가 아니었다. 그 가수는‘역사 전달자’였고, 그의 외투와 지팡이는 ‘역사책’이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일, 새로이 써가는 일


이곳에서는 지도부 사람들만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당연히 책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곤 1년에 한 번 있는 연례행사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그 행사에서 가수가 부르는 긴 노래를 통해 지난 역사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가수는 몇 백 년, 몇 천년 전부터 인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문명이 어떻게 발전하고, 어떻게 폐허 속으로 사라졌는지를 노래했다. 몇 천년에 걸친 인류의 역사가 담긴 터라, 노래는 하루 종일 이어질 정도로 길었지만 그 노래 가사(역사)를 적어 놓은 책은 없었다. 가수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기억력, 그리고 연례행사에서 입을 외투와 들게 될 지팡이뿐이었다. 그 외투에는 오랜 인류의 역사가 깨알 같은 그림으로 꼼꼼하게 자수로 새겨져 있었고, 지팡이의 손잡이에는 조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키라는 바로 그 외투의 자수를 손질, 보수하고 새로운 그림을 수놓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즉, 역사를 기록하고 새로이 역사를 쓰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자신을 친누나처럼 따르는 동네 꼬마 맷과 가수의 지팡이에 그림을 새기는 일을 하는 토머스뿐이었다. 누구 하나 기댈 사람 없는 이 곳에서 마을 밖으로 쫓겨나지 않고 살아남게 된 것만도 다행으로만 여겼던 키라는, 그러나 이상한 일들을 겪으면서 지도부와 이 사회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된다. 과연 이곳은 어떤 추악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자수를 놓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키라, 멋진 조각을 새길 줄 아는 토머스. 가수의 외투와 지팡이를 책임져야 하는 이 두 사람이 모두 고아가 됐다는 건 우연이었을까?


미래를 써가는 건 우리니까


대의를 위해서라면, 마을 전체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희생은 반드시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왜 그런 ‘희생’은 항상 못 가진 자들의 몫인 것일까? 그런 결정을 하는 건 왜 항상 권력과 부를 다 가진 지도부인 것일까? 절름발이 소녀 키라는 이 무서운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살벌한 곳 말고 더 따뜻한 사회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녀는 이 헬조선을 아니, 자신의 고향을 떠날 수 있을까? 아니면 남아서 이곳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까?

삭막하고 잔인한 이 세상.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이 세상. 원래 사는 게 다 그런 거라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다들 그냥 숨 죽이고, 적응해서 살아가는 거라고? 아니, 우리가 바꿀 수 있어. 미래를 써가는 건 우리니까.


책을 읽다 보면 이야기의 결말이 황급히 매듭지어져서 (그렇다기보다는, 매듭지어지지 않아서)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자, 이게 결말이야.”하고 보여주는 책이 아니라 자신이 키라의 입장이 되어서 이후에 나(키라)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보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책의 묘사가 탁월해서 정말로 이런 세계가 고개만 돌리면 바로 옆에 있을 것만 같다. (진짜로 바로 옆에 있을지도 모르고.) 또한 스토리의 흡입력도 상당하다. 1편 <기억 전달자>를 재미있게 봤다면 2편도 권해주고 싶다.

제목인 <파랑 채집가>는 염색 염료에 대한 이야기다. 자수를 놓는 키라에게는 실을 색색깔로 염색하는 것도 무척 중요한 일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이 마을에서는 더 이상 파란색 염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세상 어딘가에는 파란색으로 물들인 실이 있다는데.. 과연 키라는 그 파란색을 찾을 수 있을까?


나를 깨우는 책 속 몇 마디

1.
다리를 저는 키라에게 엄마는 늘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Take pride in your pain,” her mother had always told her. “You are stronger than those who have none.”

“네 고통에 자긍심을 가져도 돼.” 엄마는 항상 말씀하셨다. “넌 아무런 고통도 겪지 못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하단다.”

2.
야수의 공격에서 겨우 살아남은 여자는 꽤 오랫동안 상처들 때문에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사람들은 그 고통 때문에 그녀의 성격이 잔인해졌다고 말한다. 키라는 자기 다리의 고통을 떠올린다.

“Pain be making her cruel.”
Pain made me proud, Kira thought but didn’t say.

“그 고통 때문에 그녀는 잔인해졌어.”
내 고통은 내게 자긍심을 줬는데, 키라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누구는 고통을 겪은 후 잔인해지고, 누구는 고통을 겪은 후 자긍심을 가지게 된다. 고통은 당신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3.
가수의 외투에 새겨진 자수그림을 본 키라는 마치 역사책을 읽은 것처럼, 과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었는지 알게 됐다. 과거엔 달랐다. 원래부터 그런 건 아무것도 없었다.

“Why do people have to live like this?”
”It’s how it is,” he replied, frowning. “It’s always been.”
A sudden vision slid into Kira’s mind. The robe. The robe told how it had always been; and what Thomas had said was not true.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거지?”
“원래 그런 거야.”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항상 그래 왔어.”
키라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외투. 그 외투는 예전의 삶이 어땠었는지 알려줬었다. 토마스가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항상 그래 왔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하는 걸까?

4.
가수의 외투에 자수를 놓게 된 키라는 마을의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좋은 집에서, 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지내게 된다. 우연히 그녀와 다시 마주친 예전 마을 사람들이 이제 키라는 잘 사니까 자신들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말을 듣고 키라는 속으로 되뇐다.

“She don’t need us no more!” the woman had called.
It’s not true. I need all of you. We need each other.

“쟤는 이제 우리가 필요 없어졌어!” 그 여자가 외쳤다.
사실이 아니에요. 난 여러분이 필요해요. 우린 서로가 필요하다고요.

우린 서로가 필요하다.

5.
가수의 외투와 지팡이에는 아직 빈 곳이 많이 남아있다. 즉, 그 말은 새로이 키라가 자수를 놓고, 토머스가 그림을 새겨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를 새로 기록해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키라는 토머스에게 말한다.

“We’re the ones who will fill in the blank places. Maybe we can make it different.”

“저 빈 곳을 채우는 건 바로 우리잖아. 우리가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저 빈 곳을 채우는 건 우리다. 새로이 역사를 써나가는 건 우리다. 어쩌면, 우리가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역사를. 우리의 미래를.


한국어판 제목: 파랑 채집가
원서 제목: Gathering Blue
저자: Lois Lowry (로이스 로리)
특이사항: '기억 전달자(The Giver)'의 후속작. 총 4부작 중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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