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스팀] 황현산과 마이클조던, <밤이 선생이다>

x9788954621496.jpg


황현산과 마이클 조던



십삼 년 전, 나는 위대한 화가의 꿈을 품고 노력 끝에 미대에 진학했다. 어찌 된 일인지 정작 입학해서는 캔버스 앞에서 붓 잡는 시간보다 바이엘 앞에서 하얗고 검은 건반을 골라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리고 그림과 피아노에 할애한 시간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농구 코트 위에서 보냈다.

아침에 등교하여 맨 처음 가방을 내려놓는 장소는 농구 코트였다. 수업을 잊고 한참 공을 튀기다 보면 어느샌가 우리의 학점도 제멋대로 튀어 다녔다. 그래도 신성한 지성의 터전인 대학에 들어와서 이렇게 농구만 하면 되겠느냐며 학점 관리에 신경을 쓰고자 강의실로 서둘로 발걸음을 옮기던 의식 있던 사람들도 출첵만 하고 다시 코트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 당시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뱀 같은 돌파 능력과 빨랫줄 같은 패싱 능력, 그리고 송곳 같은 슈팅 능력으로 코트의 마술사로 불리길 원했지만 사실은 그냥 겨우 팀에 민폐 끼치지 않는 평범한 플레이어에 불과했다. 군더더기 살도 없고 그렇다고 근육도 없는 빼빼로 체형이었던 나는 몸싸움에서 자주 밀렸다. 승부욕도 과한 편이 아니라 지면 지고 이기면 이기는 대로 게임을 즐겼다. 그러나 코트 위의 평범한 빼빼로 나에게도 승부욕이 끓어오는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1:1 게임이었다. 농구에서 1:1 게임은 한 쪽이 커다란 기술적 우위를 점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 신체적 우위로 승부가 판가름 나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서 좆밥싸움에서는 키 큰 사람이 장땡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실기실에서 컴퓨터로 농구 영상을 찾아보고 있었다. 손오공과 더불어 초등학생 때 나의 영웅, 농구계의 레전드, 마이클 조던의 영상을 봤다. 처음 보는 것은 아닌데도 새삼 보고 또 봐도 놀라운 플레이였다. 자신보다 체격이 훨씬 더 큰 상대를 농락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희열이었다. 그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입을 벌린 채 한 시간을 내리 보았다.


마이클 조던.jpg



창밖을 보니 어느새 코트에 슬금슬금 인원이 모이고 있었다. 나는 신발 끈을 동여매고 뛰쳐나갔다. 그런데 코트 분위기는 팀플레이보다는 한 명씩 1:1을 하는 분위기였다. 내 차례가 다가왔다. 상대는 덩치가 흡사 고릴라와 같고 키는 북한산 비봉처럼 큰, 게다가 체격에 맞지 않는 순발력까지 지닌 '채치수'라고 불리었던 학교 선배였다. 이렇게 체급 차와 실력차가 현저히 차이가 나는 대결 농구에서는 미스 매치(miss match)라고 한다.

평소 같았으면 나의 불타오르던 1:1 승부욕도 일 합을 넘지 못하고 수그러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이 날은 달랐다.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근자감이 심장 저 깊숙한 곳에서 나를 재촉했다. 가느다란 팔다리에 힘을 빠득 주고, 날 가소롭게 쳐다보는 선배를 향해 돌진하는 척하다가 크로스 오버(cross over)에 이은 스탭 백(step back) 기술을 이용해 득점 성공! 그다음에는 스핀 무브(spin move)에 이은 페이더웨이(fade away) 기술을 부려 득점 성공!

모두 조던의 기술이었고,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내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잠시 전성기 조던의 영혼이 나의 천한 빼빼로 육체에 빙의된 것이 아니었을까. 시합 직전에 봤던 조던의 영상이 내 몸속에서 끊기지 않고 플레이되고 있었다. 그때 난 깨달았다. 흔치 않지만 좋고 훌륭한 것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때론 마법처럼 내 능력을 바뀌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서두가 길었다. 이번에 황현산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읽었다. 깊은 사유와 함께 담백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문장의 경지는 글쓰기에 관심 있는 나로서는 마치 마이클 조던의 플레이를 보는 듯했다. 좋고 훌륭한 글을 감상한 직후라 그런지, 나도 뭘 막 쓰고 싶고, 빼빼로처럼 빈약한 지식의 나도 왠지 그처럼 잘 쓸 수 있겠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나도 <밤이 선생이다>를 읽었으니 혹시 아나.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코트에서 벌어졌던 마법처럼 내 손끝에서도 그와 비슷한 문장을 쏟게 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고이 접어놓은 페이지를 다시 읽으러 가야겠다.



ISBN : 9788954621496



@thelump


최근 포스팅

H2
H3
H4
3 columns
2 columns
1 column
22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