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보다는 비극을_ 폴오스터<뉴욕3부작>


안 생겨요



종종 밤 산책을 나선다. 가벼운 차림을 하고 건물을 나오자마자 술집이 몇 개 들어서 있는 길을 지난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가게 안쪽으로 향한다. 술잔과 안주를 가운데 놓고 이야기하는 이들의 표정을 힐끗 훔쳐본다. 나를 둘러싼~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즐겁다~.

앗, 그런데 술집에 앉아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 자세히 보니 졸업 후에 수년간 못 봤던 대학교 동문이다. 이런 우연이 ! 그녀는 손짓을 하고 나는 합석한다. 그녀와 동석했던 큐레이터와도 안면을 트게 되고, 서로 만취해서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다가 스마트폰에 있는 내 작업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그게 인연이 되어 나는 내년 5월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할 예정이다. 그뿐이랴, 첫눈에 반했던 아름다운 그 큐레이터는 현재 내 애인이 되었다.

뻥이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안 생긴다. 절대로 안 생겨요. 1시간 산책 코스를 걷는 동안 나는 아무런 일도 당하지 않고 언제나 무사하게 집에 도착한다. 디비 잔다. 다음 날은 스케줄이 딱히 없다. 방바닥을 굴러다니다가 집어 든 책,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이 다행히 읽을만해서 시간을 때우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심심하다. 아, 이럴 때 어떤 사건 나한테 안 일어나나? 이럴 때 예기치 않은 전화 한 통 ! 문을 두드리는 낯선 방문자 !! 삶을 송두리째 바꿀만한 어떤 소식 !!! 그 거절할 수 없는 제안 !!!!

지루함보다 차라리 비극을



인생에 그런 건 없다는 사실을 깨우친 때는 스무 살 여름, 충북 제천에서였다. 여름방학을 틈타 전 재산 15만 원을 들고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홀로' 여행한다는 것, 그 낭만이 중요했다. 앞으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상상만 해도 두근두근 ! 캬.. 벅찬 기대를 안고 새벽녘 햇살을 맞으며 집 밖을 나서는 기분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아니 왜 영화나 소설을 보면.. 홀로 여행을 떠난 주인공이 이 사건에 우연히 휘말리고, 저 사건에 의도치 않게 가담하면서 한바탕 룰루랄라 우여곡절 활기찬 스토리들이 펼쳐지지 않는가!

실제로 어땠냐고? 여행 중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제천의 어느 소나무 숲에서 지독한 고독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맛보았을 뿐이다. 아, 딱 한 사람만이 내게 말을 걸었다. 긴 대화 끝에 차비가 없다고 해서 오만 원을 제공했다. 나는 멍청이었고 그놈은 사기꾼이었다.

방바닥을 굴러다니며 폴 오스터의 <뉴욕3부작>을 아주 재미나게 읽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아주 사소하고도 우연한 사건에 의해 자신의 온 삶을 내던지게 된다. 저자는 인생의 중요한 일들은 순전히 우연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고 지속적으로 말한다. 잘못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사소한 제안 하나에 주인공의 삶은 그 이전과 180도 바뀌게 된다.

나는 내 산책과 스무 살 여행을 떠올리며 주인공들이 부러웠다. 그들에게 찾아온 우연이 부러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인이 의도치 않았더라도 인생 자체가 뒤흔들만한 스펙터클한 사건이 그 앞에 놓인다는 것이 부러웠다. 앞뒤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 무엇이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광기의 순간을 갈망하는 마음이 한켠에 도사리고 있다. 심지어 그 우연한 사건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파멸로 나를 이끈다고 해도 말이다. 행복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라 지루함이다. 비극이 아니라 권태다.





ISBN : 9788932909554

@thel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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