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가지감天歌之感] 바가바드기타 2장 삼캬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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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탈의 고요 속에 두려움을 버리고
브라마차랴의 맹세에 굳게 서서
마음을 정복하고
생각을 내게 맡기고
정신을 통일하고 앉아
나만을 지상으로 전념하라.
-바가바드기타








들어가기 전에


 바가바드기타 감상평 릴레이를 제안해주신 @peterchung님의 제안글을 본 순간, "이건 안내키는데." 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 안에는 두 개의 의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의식에 젖은 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근원에 닿아있는 참나=아트만입니다.


 읽기 싫은 마음을 살펴보니 사회의식에 젖은 내가 보내는 목소리더군요. 바가바드기타인지, 바가다드기타인지 제목부터 헷갈리고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이 힌두교 경전이 어려울 거라고 미리 예단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한 번 정복해보기로 했습니다.
 이 경전이 말하는 신, 아트만은 제가 환희에 차서 열 번이나 읽고도 늘 읽고 있는 [화이트북]에서 묘사된 신과 같음을 알게 되었고, 한 문장씩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보았습니다. 저의 감상평은 경전의 원뜻과 다를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2장 삼캬요가에 들어가기에 앞서 @bobo8님의 [천가지감天歌之感] 바가바드기타 1장을 읽으시면 고뇌에 찬 아르쥬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bobo8님의 요약]

판다왕이 죽고난 후 그 동생 드리트라슈트라가 왕이되고 판다왕의 다섯형제들을 거둬 자신의 100명의 아들들과 양육하게 됩니다. 그러나 드리트라슈트라의 맞아들인 듀료다나가 이들 판다바스(판다왕의 오형제)를 시샘하여 죽이려는 계획을 짭니다. 판다바스들의 어머니 쿤티는 그것을 알고 피해 살아납니다. 그리고 이웃나라의 국왕이 사위를 고르는 시험에 지원자를 받고 브라만으로 변장한 판다바스 오형제와 사촌인 듀료다나도 참가하게 되는데, 판다바스중 셋째인 아르쥬나가 이기어 공주와 결혼하게 됩니다. 여기서 어머니 쿤티가 좋은 것은 나눠가져야지 하고 말실수를 하여서 어머니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라 오형제와 공주가 결혼하게됩니다. 드리트라슈트라의 명으로 국토의 절반중 강유역 황무지를 판다바스들에게 주게되고 사촌 듀료다나는 역시 시샘하여 땅을 빼앗으려는 계략을 꾸밉니다. 판다바스들은 땅을 모두 빼앗기고 결국 친지들을 등에 진 채 전쟁을 하게 됩니다.






2장 샴카 요가



 아르쥬나는 싸움터에서 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존경하는 스승들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이 세상에서 빌어먹는 게 소원이라고 고백합니다.

 아르쥬나의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존경하는 스승을 죽이는 것도 슬프고, 스승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거나 싸움에서 도망쳤다는 오명을 남기는 상황도 슬프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기쁨이라는 종착지는 없는 것처럼 보이는, 꼬여있는 우리의 인생처럼요.



너는 슬퍼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지혜의 말을 했다. 어진 이는 죽은 자를 위해서도 슬퍼 않고 산 자를 위해서도 슬퍼않는다.





 그런 아르쥬나에게 크리슈나는 어진 이는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 문장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몸의 주인은 여기서 어린이와 청년과 어른의 시대를 지내듯이, 또 다른 몸을 가지는 날이 온다. 어진 이는 그 때문에 당혹하지 않는다.


이것을 죽이는 자로 생각하는 이도, 이것을 죽임을 당한는 자로 생각하는 이도, 다 같이 참을 모르는 이다. 이는 죽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느니라.





 이 대목은 윤회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영혼은 불멸하며 스승이 죽든, 아르쥬나가 죽든 또 태어나서 새로운 육체를 입을 것이 분명한데 왜 슬퍼하냐고 크리슈나가 반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자신을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이 실체이고, 몸으로 느끼는 오감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자신의 외부에 있는 그 사건과 배후의 등장인물들이 그 사람에게 주는 감정에 집중하게 됩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임사체험을 한 분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분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죽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본 순간, 마치 20년 전에 버렸던 386컴퓨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글을 읽은 후, 문득 그런 의문이 떠오르더군요. 만약 내가 수천 번 윤회를 했다면 그 수많은 나의 죽음의 원인이 된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분노할 수 있을까? 그건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할 때처럼 내 아바타가 다른 아바타를 죽이고, 다른 아바타가 내 아바타를 죽였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분노하거나 죄책감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화이트 북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살인자를 무서워하고 심판하거나 저주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그 존재를 사랑한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신의 섭리와 생명 그리고 신의 경이로움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는 제외되지 않았다."

"죽임을 당한 사람은 다시 그리고 또다시 돌아올 것이다. 생명은 영속하기 때문이다."

-화이트북



 크리슈나는 아르쥬나를 설득합니다.



네가 죽으면 천당을 얻을 것이요, 네가 이기면 이 땅의 즐거움을 누린다. 쿤티의 아들아, 싸우기를 결심하여라.





 이 문장은 참 명쾌합니다. 네가 적들에게 죽임을 당해도 천당을 얻고, 적들을 이기면 지상의 기쁨을 누린다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마음껏 싸워도 될 것 같습니다.



네 할 일은 오직 행동에만 있지, 결코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마라. 그러나 또 행동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마라.

쿤티의 아들아, 감관이 대상과 접촉하면 차고 덥고 즐겁고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것은 오고 가는 것이어서 덧이 없다. 그것을 견디어라. 오 바라타의 족속아.

오, 사람 중에 으뜸인 사람아, 그런 것들을 견디어내고 쾌락과 고통을 꼭 같이 보는 사람, 그런 어진 이는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이이다.





 여기에서 "견디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감정에 푹 젖어 있으라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견디는 것"은 수동적으로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고 휘둘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정복하고 생각을 내게 맡기고 정신을 통일하고 앉아 나만을 지상으로 전념하는" 삼캬요가를 통해 마음을 정복하라는 것으로 들립니다. 크리슈나는 쾌락과 고통을 같이 여기면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쾌락과 고통은 같은 상태라고 말할까요?




사람이 감각의 대상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대한 집착이 생긴다. 집착에서 애욕이 일어나고 애욕에서 분노가 나온다.

고통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쾌락속에서도 애착이 없으며, 애욕도 공포도 분노도 다 벗어버린 사람, 그 사람을 일컬어 생각이 결정된 성자라고 하느니라.




 위의 두 문장을 놓고 보니 쾌락과 고통은 한 쌍의 콤비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느끼는 쾌락과 고통은 뇌세포가 인지하는 호르몬의 작용일 뿐이죠.



영원불멸이요,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이가 몸을 쓰고 와 계시는 이 몸들은 끝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바라타의 족속아, 싸워라.





 이 문장은 우리가 몸이 아니라 영혼이며, 바로 아트만이라고 말합니다. 영원불멸의 아트만이 잠시 머물러서 경험하기 위한 도구로 쓰고 있는게 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르쥬나처럼 자신이 몸이라고 여기고 몸이 죽으면 의식이 사라질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우리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길 꺼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항상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의 원인은 죽음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야말로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어떤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당신 존재를 사랑하라, 마스터. 당신은 영원하며 당신은 신이라는 것을 알라. 오랜 세월에 걸쳐 당신을 보호해온 본능적인 유산이 당신은 죽는 것이 아니라 진정 불멸의 존재이며, 제한된 인간이 아닌 무한한 신이라는 앎과 직면하면, 당신의 혼은 육체의 세포구조에 이러한 무한한 생각을 전달할 것이다."
-화이트북





 바가바드기타를 읽으면서 크리슈나가 말하는 신과 화이트북에 묘사된 신이 절묘하게 닮았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칼이 그것을 찍을 수 없고, 불이 그것을 태울 수 없고, 물도 그것을 적실 수 없으며, 바람도 그것을 말릴 수 없다.

찍을 수 없는 것이 이것이요, 태울 수 없고 적실 수도 없으며 말릴 수도 없는 이것이 이것이다. 그것은 영원이요 두루 차 있음이요 불변이요 부동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이다.





"맥동하고, 확장하는, 진화하는 신은 영원으로 나아가는 생명 전체이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것을 허용하는 있음이며, 모든 만물에 스며들어 있으며, 앞으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한 약속이다. 신은 항상 변하고 항상 창조하고 항상 확장하며 항상 존재하는 의욕적인 힘 안에 있는 모든 것의 본질이다."
-화이트북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보셨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바가바드기타의 3장 감상평은 @nabinabi님을 지목하며 마지막으로 크리슈나의 말을 음미해봅니다.




네가 할 일은 오직 행동에만 있지, 결코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마라. 그러나 또 행동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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