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전쟁] 서평3. 숫자싸움: '시민'의 등장과 일부 족장이 제국을 이루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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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논지는 심플하다.
갈리아 오르게토릭스, 이스라엘 다윗 등, 일부 빅맨이나, 족장, 비적들이 세력을 이루는 과정은 많은 문헌들이 증명한다.
그들이 국가로 발전하고, 다시 제국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라.
아자가트가 집중하는 것은 완벽하게 힘의 논리이다.

  • 그 힘은 곧 사람의 수이다.

얼마나 많은 무사를 고용했는가, 무사집단을 압도하는 시민의 호응을 얻어 내는가.
다른 부족을 말살해버릴 동맹국들을 이끌어내는가.
호전성과 전투력은 그 완충기에서만 잠시 의미가 있다.-
단, 이번 제국형성기까지만 이후 다음 서평엔 무시무시한 것들이 나타난다.

국가의 등장/--> 국민군과 요새화 /-->
시민병 중장보병이 기병을 대체하다./-->
부의 탄생과 용병 / --> 제국화/
(핵심 관전 Tip. 시민들을 어떻게 동원하여 목숨걸고 전투에 임하게 할 것인가)

1. 국가의 등장- 문자 VS 전쟁

농업성장과 문자의 사용으로 권력의 집중이 제도화 되면서 축적과 집중되면서 사적 종사들은 상비군이 되었고 부족은 징집되었다. 세력의 범위는 이웃 부족에까지 넓혀져 ‘선물과 조공’이 요구되었고 곧 세금이 되었다. 위계와 통치가 정치,제도화 되면서 국가가 발생했다. 종주국의 왕은 친족유대와 제도의 확대를 통해 통치를 강화하고 군대,사법,종교의 권한을 장악했다.
근동,중국,아즈텍,안데스에서 처음 국가가 시작되었다.

  • 농업성장의 정점인 ‘국가의 등장’에 문자는 필요조건이었지만 전쟁은 필수조건

성공적인 전쟁에서의 군사지휘권은 왕권으로 이어지는 탄탄대로였다.
오르게토릭스도 카이사르에게 저항하는 명분으로 다른 부족들과 많은 종사와 피호민을 획득하고 그들을 엄격한 제도로 통제하고자 했다.

BC4000년 나일강 유적들은 다양한 족장 사회들이 소규모 지역 정치체제들과 합쳐졌음을 보여준다.
황허강 유역의 농업은 아시아의 서쪽 끝보다 1000년 늦게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BC1800년~1200년의 상 왕조는 왕가출신의 왕이 수도에서 지역 씨족 성곽도시에 네트워크를 통해 종주권을 행사했다. 제후국과 지역 씨족은 정복,강압,포섭 그리고 꾸준한 일부다처제 혼인으로 다져졌다.
아나톨리아도 BC3000년 말부터 족장사회들이 요새화된 국전 도시를 중심지로 (트로이) 소국가로 진화했다.
그리스에서 BC1200년 미케네 문병은 멸망하면서 대화재 속에서 문서보과서의 점토판들이 구워져 BC1700년 말부터 관료적 소국가로 발전했음을 남겼다. 미케네, 아테네, 터베, 보이아티아에 거석 성벽 궁전이 나타난 것은 BC1400년이다.
일본열도의 정치적 진화는 중국에 2000년 뒤져 발달한다. 모든 국가는 시기는 다르지만 저마다 다양한 요인으로, 그리고 매우 비슷한 과정을 통해 통합되어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엘리트전사들의 무덤들은 초기 청동기 무기와 흉갑등으로 가득하다. 초기의 싸움은 습격과 결투 수준이었을 것이며, 군주와 왕의 등장으로 조직화된 군대를 거느리고 지켜야할 재물을 축적해야할 필요가 생긴 것이 후기에 성벽궁전이 나타난 이유일 것이다. 미케네의 소국 중 하나인 필로스는 인구 5만, 수천 제곱킬로의 면적에 수 백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BC1200년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력적 파괴를 겪고 그리스는 4세기에 걸친 국가이전의 암흑기에 빠진다.

비적집단(하비루)과 국가

국가형성기에도 국가에 소속되지 않는 무장집단은 항상 존재했다. 소국가는 작았고 거대국가도 권력이 분산되어 있어서 이런 집단들도 나름 일정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자유 동지’들, 비적들이 때론 국가에 영향을 끼치거나 스스로 국가가 되기도 했다. 비적집단에 대한 언급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처음 등장한다. 마리, 가나안 지역에 등장했던 입다(사사기), 다윗등의 무리들은 때로 다른 국가체제에 복무하다가 나중에 스스로 정권을 잡기도 한다 무장집단이 국가단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제도, 사법 그리고 특히 ‘종교’가 이용된다. 예를 들어 –예수냐, 바울이냐( 문동환)에 따르면 성경의 [열왕기, 시편]은 다윗이 여호와를 다윗왕조 지키는 신으로 변모시킨다. 대체로 저자의 의견에 일치한다.
. 가나인 지역의 비적을 ‘하비루’라 불렀는데 히브리의 어원이다.

2. 도시국가의 요새화

콜롬버스 이후 마야, 아메리카의 문명이 도시성벽이나 요새가 없었으므로 평화로운 문명? NONO! 이자가트는이런 논점을 비판한다.

모든 도시들은 도시로 발전한 이후 수 세기가 흐른 후에야 도시를 아우르는 방어 성벽을 갖게된다.
그 이전의 도시국가들은 성벽이 없어도 도시의 지형과 모여 사는 사람의 ‘숫자’가 많음이 큰 방어요소가 되어 스스로 보호되었다고 생각되었다. 이전의 침략들이 대부분 군소적이고 전면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테네도 아크로 폴리스 성벽외에 외곽 성곽을 쌓은 것은 5세기 페르시아 전쟁 이후이다. . 15세기의 마야가 완전한 성벽을 갖지 못한 것은, BC5세기의 아테네가 Bc 30세기의 수메르만큼 도시를 발전시키지 못한 과정에서 페르시아의 침입을 받은 것과 같은 이유이다.

3. 시민병 중장보병의 등장

일리아스에서는 대규모 보병대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민인 농민과 직공 보병들이 팔랑크스 밀집방진을 갖춘 것은 기원전 7세기의 일이다. 시민보병은 곧 기마 귀족을 대신하여 그리스 전투를 지배했다.

시민병과 시민의 등장

농노제가 납세와 군역으로 대체되고 자치도시제도가 마련되자 도시는 집중되었고, 농민과 직공들이 자신감과 공동체에 관심이 높아졌다. 도시국가와 그 가까운 주변의 밭과 목초지에 살고 있는 시민들은 쉽게 동원되어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대규모 보병대로 구성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조직되어 통제 지휘를 받는 독특한 조합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민병대의 전투력이 부족시기 소수 기마귀족은 당해내지 못했다.

기마귀족-시민병으로의 변화는 중세 말에도 반복된다.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국가 정치체들도 대규모 보병대가 지역 귀족을 쫒아냈고, 밀라노의연합시민군은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의 군대를 물리쳤다.(레냐노전투 1176년) 스위스 지역에 세 농민공동체도 독일 귀족을 물리쳤다. BC2450의 라가시,움마 전투의 독수리비석에 6열 밀집대형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런 밀집대형은 그리스의 창조물이라기 보다는 여러세대에 걸쳐 도시국가들이 고안해 낸 것이다. 심지어 637년 이라크 알카디시야를 침략한 무슬림의 전술을 보면 그들 역시 빽빽한 보병대형으로 적 기병을 물리쳤다.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참주-독재정 역시 민중들의 인기를 의존하여 만든 팔랑크스 대형으로 귀족들의 기마전사를 대체하며 귀족들의 불만을 통제했다.
로마 왕 세르비우스 톨리우스는 막강한 귀족들의 친족기반을 약화시키고 군단에 시민 팔랑크스를 만들고 시민 중장보병 민회를 설립했다.

이런 현상은 모든 국가에 시민병의 필요를 불러왔고 모든 맹아적 도시국가는 민중과 화합할 필요가 생겼다. 기원전 510년 로마도 왕이 쫒겨났을 때, 귀족은 민중과 긴 타협 후에 귀족-민중 공화정이 되었다.

로마 평민들은 농성을 통해 부유한 귀족들을 대신해서 누리는 것도 없는 본인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거부했다. ( 그래서 민회도 생기고 호민관도 생겼다.)

한편 도시국가의 진화는 일부에서 중상주의와 함께 성장했다.

페니키아,카르타고,이오니아,토린토스, 아테네,피렌체,밀라노 등과 그 주변 국가들이 무역을 통해 성장했다. 든든한 농업배후지가 없거나 해양지향적 도시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곳 부유한 도시들의 노동자들은 해양, 선박, 수공업에서 일했고 자영농 공동체적 응집력과 시민군의 자립정신이 없었다.
* 부유함은 곧 시민군역량에 역효과로 나타났는데 심지어 제국을 꿈꾸는 스파르타조차 부가 귀족에게 몰렸다.

4. 부유함과 용병

기원전 4세기 시민군의 부족은 곧바로 용병의 시대를 열었다.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분쟁에서 경험을 쌓은 그리스 병사와 장군들은 직업군인으로 남았다. 이들은 주로 페르시아 대왕 군대에 복무하거나 그 적수들에게도 고용되었다. 본토 그리스에서 조차 용병이 고용되었다. 아테네조차 4세기가 되자 시민들이 징집을 꺼려 용병에 의존해야했다. 스파르타도 참주 나비스가 용병을 등에 업고 정권을 잡았고 에투루리아도 당시 켈트 용병으로 로마 시민병과 싸우고 있었다로마에 정복당한다. 용병들은 대체로 시민병보다 유능했다. -스파르타 용병 크산티프스, 를 보라- 곳곳에서 용병은 권력의 수단이 되었고 때로는 중세 밀라노 비스콘티와 스포르차처럼 용병이 코뮨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도시국가는 이렇게 다양하게 확장되어 일부는 다른 도시를 병합하면서 제국주의 적으로 확대되기도 했지만 수 백년 이상 유지된 예는 거의 없다.

5. 제국의 등장 -많은 부와 거대한 동맹국들

아테네, 스파트타, 터베는 주변 도시국가들에 패권적 동맹을 확립했고, 기원전 4세기까지 제국건설에 성공했다. 로마 역시 이시기에 병합과 동맹으로 제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연방들은 점차 민족-국가가 되었다. BC2000년기 아시리아가 주변을 병합하여 제국이 되었고 무엇보다 로마는 BC218년부터 50년만에 국내 인력을 기반으로 모든 지중해 강국들을 제압했다.

로마의 성공의 진정한 원인은 시민군단과 동맹병력의 수이다. 외부공동체 전체를 시민으로 통합하는 개방성, 속국 동맹에서 양도한 땅에 이주하여 늘어가는 시민들, 독립지위를 인정받은 동맹에서 제공하는 군사력 등이 군단을 채웠다. 로마가도를 타고 흐르는 통치 안에서 거대한 시민층은 더욱 확대되어갔다. 2차 포에니 전쟁의 첫 3년에 시민군 10만을 잃고도 다시 25만을 보충했다. 아테네, 스파르타, 카르타고를 돕는 연맹국들이나 피지배 민들의 연합고리는 불안한 것이었고 종주국이 약해지면 쉽게 끊어졌다.

전쟁은 변했다. 오랜 작전, 장기간의 포위, 수비대의 복무, 병참, 재정은 표준이 되었다.

다음편 예고 : 유라시아의 선봉 스텝- 기마민족의 충격!
이 책의 핵심일 듯. 아자가트가 볼 때 세계 발전과 주도권의 모든 원인과 격차가 스텝지역의 기마민족에게서 발생한다. 유럽의 유전자 지도가 그것을 일부, 말한다.

그림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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