뙤약볕이 내리쬐는 7월. 우리는 한국의 여름으로 돌아왔다. 연일 열대야가 이어지는 여름은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더웠다. 비가 내리는 날에 거리를 걸으면 어항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좀처럼 서울의 온도와 습도에 맞춰지지 않았다. 서울의 박자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삐거덕 거리며 멍하니 지냈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6개월 어치의 이야기들이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좀처럼 그럴 만한 힘이 생기지 않았다. 늘 마지 못해 여행 이야기를 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라다크에 두고 온 기분이었다.
2주가 지났을 때, 스피툭 곰파Spituk Gompa(곰파는 수도원과 사찰 역할을 하는 티베트 불교 건축물을 가리킨다. 스피툭은 지명이다)의 승려인 친구 롭상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같은 곰파에서 승려 생활을 하는 소남의 누나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한국에서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소남에게 전화를 걸어 다소 뻔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전화를 끊고 나자 무중력 상태의 우주 공간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제멋대로 움직였다. 매일 밤 라다크에 가 있는 꿈을 꾸었다.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때, 일단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갑자기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하게 되자 제멋대로 움직이던 몸과 마음은 긴장을 되찾는 듯 했다. 반복되는 일상이 가끔은 지겹고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몸과 마음은 그제야 서울의 박자에 맞추어 움직였다. 아스팔트 바닥에 구두굽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내가 속한 곳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늘 라다크 생각이 났다. 몸이 아프다고 했던 양첸 건강은 좀 나아졌는지, 여자 친구랑 사이가 안 좋다고 늘 울상이던 푼촉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즐겨 찾던 티베트 식당의 주방장인 왕축 아저씨가 만든 뚝바가 먹고 싶었다. 아저씨에게 한국에도 뚝바와 비슷한 음식이 있다고 떠들어대곤 했는데, 한국에서 먹는 칼국수는 뚝바와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다. 스피툭 곰파의 스님들이 따라주던 밀크티가 그리워서 카페에 가면 커피 대신 밀크티를 시켰다. 역시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서울에서는 라다크 비슷한 것을 단 한 가지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해 겨울, 그러니까 라다크를 떠난 지 정확히 6개월 만에 결국 다시 라다크를 찾았다. 라다크를 떠날 때 스피툭 곰파의 스님들에게 가면 축제 보러 겨울에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었는데 그 약속을 지킨 셈이었다. 스피툭 가면 축제날에는 함박눈이 내렸다. 라다크 친구들은 가면 축제에 눈이 오는 것은 아주 좋은 징조라며 흥분했다. 겨울의 라다크는 끔찍하게 추웠지만, 난로에 구운 감자를 이불 속에서 까먹다 입천장이 홀라당 다 까져도 마냥 좋았다. 얼어붙은 라다크 땅은 온통 건조한 흙색이었지만, 살얼음이 낀 인더스 강의 생기 넘치는 빛깔은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아름다웠다. 몇 날 며칠을 샤워도 못하고 고양이 세수만 하고 지냈다. 아침이면 건조한 공기 탓에 코가 막혀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고, 밤이면 추위를 피해 방안에 들어온 쥐들 때문에 비명을 지르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다크가 좋았다. 라다크를 떠나며 나는 이전처럼 슬프지 않았다.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할 때도 아쉽지 않았다. 그때쯤이었나 보다. 라다크를 저 멀리 히말라야 산자락에 틀어박힌 오지가 아닌, 언제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내 고향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다시 짐을 싸기로 결정한 것은 한국으로 돌아온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라다크로 돌아 가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배낭을 매고 ‘여행’을 하고 싶었다. 낯선 사람들, 낯선 거리, 낯선 냄새가 그리웠다. 모든 것이 낯설어서 사방을 두리번거릴 때 느껴지는 긴장감이 그리웠다. 낯선 것들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여유를 되찾아 자유롭게 움직이던 나를 사진 속에서 마주할 때마다 그때의 내가 못 견디게 부러웠다. 결국 라다크의 첫 여행을 함께한 재은이와 터키에서 시작해서 불가리아, 아라비아 반도, 이란과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로 돌아와 라다크에서 여행을 마무리하는 기나긴 여정을 계획했다.
우리는 느릿느릿 정성을 들여 여행했다. 한여름의 아라비아 반도는 너무 뜨거워서 태양 아래 서있다 보면 이대로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여행을 하면서도 줄곧 라다크 생각을 했다. 라다크를 찾은 여행자들이 라다크를 떠나면 그곳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여행 중 부정선거로 이란 주요 도시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바람에 터키에서 인도까지의 육로이동은 포기해야만 했다. 결국 우리는 터키에서 인도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고, 아름다웠던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시끌벅쩍한 2009년 여름의 시즌이 끝나갈 무렵, 라다크에 도착했다. 친구들은 다시 돌아온 우리를 보며 반가워했지만 동시에 조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2년 사이 세 번이나 라다크를 다시 찾은 것이다.
“너희는 왜 자꾸 라다크에 오는 거야? 지겹지도 않아?”
“좋으니까. 한국에 있으면 자꾸 생각이 나.”
“라다크에서 언제까지 여행만 할 셈이야? 놀러 오는 건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아?”
“그게 무슨 뜻이야?”
“라다크에서 뭔가 해보라는 거야. 너희에게도, 라다크에게도 의미가 있을 만한 무언가를 말이야.”
스탠진은 바이크 여행자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라다크를 찾는 바이크 여행자들이 늘고 있는 추세였기 때문이다. 스탠진은 라다크를 처음 찾았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인데, 라다크 곳곳의 공사 현장에 건축 자재를 대는 사업을 하고 있지만 시즌이 되면 여행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항상 바쁘게 이곳저곳에서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친구였다. 그는 우리에게 한국 식당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여행 중에 직접 요리한 음식을 먹어보며 요리에는 재능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우리는 스탠진의 여러 가지 제안들을 그냥 웃어넘겼다. 그는 사뭇 진지했지만 당장 머릿속에 무언가 그려지는 것은 없었다.
우리는 라다크에서 두 달을 머무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와서도 스탠진이 던졌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말을 곱씹으며 라다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할 수 있는 일들은 동시에 ‘하고 싶은 일’이여야 했다. 앞으로도 계속 여행자의 신분으로 라다크를 찾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라다크 사람들이 사는 공간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싶었다.
우리는 여행자도, 현지인도 제 집처럼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공간을 만들어보기로 결정했다. 그 공간이 현지인과 여행자에게 서로 의미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지인들에게 여행자들은 돈벌이의 수단이며, 얼마 동안 머무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나버리는, 낯선 것들을 소비하기에 바쁜 사람들이었다. 여행자들에게 현지인들은 돈에 혈안이 된 사기꾼이거나, 카메라 렌즈 저편의 피사체이거나, 엽서 속의 이미지로 남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때때로 특별한 인연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각자가 속한 세계가 너무 달랐다. 한걸음 빠져 나오기를 머뭇거리는 사이 나를 기다리던 친구는 저 멀리 가버리고 없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카페를 열기로 했다. 이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은 함께 먹고, 쉬고, 가진 것을 나누며 서로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서로 배우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에게 가치가 있을 만한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 말이다. 가진 것은 무엇이든, 누구와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우리나라 농촌 공동체 ‘두레’에서 이름을 따왔다.
카페 두레!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 따위를 가늠해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럴수록 대책 없이 용감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예측 불가능성과 싸워보기로 했다. 일단 스탠진에게 전화를 걸어 임대료의 시세에 관해 물어보았다. 다행히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이후의 과정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먼저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입해서 당장 실전 연습에 돌입했다. ‘거의 모든 것의 매뉴얼화’가 이루어진 대한민국에서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블로그를 뒤져 괜찮아 보이는 각종 레시피들을 수집했다. 자신감이 붙은 우리는 급기야 제빵기까지 구입하여 시간이 날 때마다 빵 굽는 연습을 했다. ‘맛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했기 때문에 메뉴를 정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 밖에 필요한 물품들의 리스트를 뽑아 인도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한국에서 하나씩 사들였다.
비자와 비행기표를 준비하고 떠날 날이 한달 앞으로 다가오자 미루어두었던 걱정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냥 마음 편히 여행이나 하고 온다면 차라리 걱정하지 않을 거라는 부모님을 안심시키는 것은 내 몫이었다. 떼돈을 벌어올 테니 어디 좋은 땅이나 알아보라며 허풍을 떨었지만,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 이미 벌여놓은 일이 너무 많아 수습할 수도 없었다. 답은 하나였다. 일단 상황 속에 모든 것을 맡겨보는 것. 늘 설레기만 했던 출국 당일의 아침에는 어쩐지 눈물이 났다.
“도착해서 전화할게요. 나오지 마세요.”
결국 밖으로 따라 나온 엄마는 덤덤하게 말했다.
“조심해. 걱정 안 할게.”
이제는 정말 모든 것이 우리 손에 달려 있었다. 모든 것을 우리가 결정해야 하고, 결정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우리에게 있었다. 델리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것들’을 최대한 예측 가능한 것들로 만들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회의를 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밤새 짐 싸느라 잠을 한숨도 못 자서 비행기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을 터였다.
델리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믿을 만한 커피 원두 공급처부터 찾기 시작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델리에 왔기에 일단 발로 뛸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여행할 때 가보았던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서 팔고 있는 원두를 살펴보았지만 소량씩 판매하는 데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다른 통로가 필요했다. 인터넷을 통해 델리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원두를 구하는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대한민국 네티즌의 ‘탁월한 검색능력’을 발휘하여 델리에 거주하는 유럽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놓은 관련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점에서 질 좋은 커피 원두, 홍차와 녹차 등을 구입했다.
델리에서 지내는 2주 동안 여기저기서 사들인 물건들로 방 안은 발 디딜 틈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기오븐, 전기포트, 그릇, 숟가락, 포크, 나이프부터 시작해서 얼음틀, 양념통, 도마까지. 덕분에 델리에서 레로 가는 항공사에 한화로 10만 원 가량의 추가 운송비를 지불해야 했다.
가까스로 레에 도착하고 난 뒤에는 가게 자리를 찾기 위해 레스토랑, 여행사 등을 운영하는 친구들에게 찾아갔다. 이미 가게 자리 선점이 끝나갈 무렵이었기 때문에 다들 가게를 구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 몇몇 자리를 소개받기도 했지만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운명에 가까운 이끌림’ 따위를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치하지만 우리에겐 이런 것이 필요했다. 주변 상권과 유동인구 따위를 면밀하게 분석하는 사업가의 마인드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런 분석 능력 따위는 갖고 있지도 않았다.
결국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버린 우리는 마지막으로 한 친구에게 다시 한 번 부탁을 했다. 시즌 장사를 위해 후다닥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보다는 전통 가옥이면 좋겠다는 것, 시장에서 떨어져있어도 괜찮으니 조용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친구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한 군데 떠오르는 곳이 있다고 했다. 지인이 오랫동안 방치해둔 전통 가옥인데 너무 오래 되었고, 영업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당장 가보자.”
친구는 우리에게 건물 주인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의 이름은 아룬이었다. 아룬은 이곳이 자기가 나고 자란 집이라며, 레 시내에는 이런 전통 가옥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카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세 개의 나무문에 걸린 세 개의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야 했다. 낡아빠진 자물쇠를 철컥철컥 세 차례나 열어야 하는 이 과정은 조금 과장하면 천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비밀의 방을 ‘봉인 해제’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카페 두레와 만났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그 공간이 천년 동안 우리를 기다려왔다고 느꼈고, 그 공간을 갖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 천지에 우리밖에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할게요. 더 둘러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그때쯤 아룬은 아마 우리를 상당한 괴짜라고 생각하며 의아해하거나, 물정 모르는 외국인 여자 두 명으로부터 한몫 잡을 생각으로 설레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며칠 뒤, 계약금을 미리 주고 아룬으로부터 열쇠를 건네받았다. 그가 나의 손바닥 위에 열쇠 꾸러미를 살며시 놓아주던 그 순간을, 그 순간에 손바닥에 느껴지던 감촉을, 감촉과 함께 울리던 짤랑거리는 소리를 잊을 수 없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온전하게, 그대로 나의 것인 공간을 가지고 살아간단 말인가? 내 방 한 칸도 온전히 ‘내가 가진 것’이었던 적이 없었던 나는 아룬으로부터 열쇠를 건네받던 그 순간, 앞으로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제야 안심하고 몸도 마음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스팀문학전집 첫번째 작품 - 「한 달쯤 라다크」
- 다음 이야기 - 또 다른 우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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