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 라다크] 날이 맑을수록 판공초는 더 아름답다 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읽어보세요. 라다크가 더 가까워질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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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enzen25

처음 라다크 사진을 접한 것은 인도 여행 정보가 있는 카페에서였다. 우리나라의 서른 배에 달하는 넓은 땅덩어리의 지도를 펼쳐놓고 흐뭇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처음엔 대부분 여행자가 그러하듯 델리를 중심으로 삼각형 혹은 마름모를 그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가고 싶은 도시들은 계속 추가됐고, 지도 위에 그려진 도형은 점점 더 삐죽빼죽해졌다. 누군가의 여행기 속에서 만난 라다크 사진에는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저건 분명 포토샵의 힘을 빌린 걸 거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사진을 볼 때마다 의심부터 하고 보는 못된 버릇 때문에 처음 본 라다크의 풍경 사진은 ‘색 조정을 한 사진’으로 폄하되었지만, 라다크의 사진은 열이면 열 아주 진한 파란색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살면서 봐왔던 하늘과는 많이 달랐다. 어린 시절, 가장 빨리 닳던 물감은 흰색이었다. 풍경화를 좋아하던 나는 도화지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하늘을 채워 넣기 위해 엄지손톱만큼의 흰 물감과 새끼손톱만큼의 파란 물감을 썼다. 내가 아는 하늘의 색깔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흰색을 많이 섞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라다크의 하늘을 그려내기 위해서 흰색물감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진 속에 그 비현실적인 하늘은 에메랄드빛 호수를 품고 있었다. 호수의 이름은 판공초Pangong Tso였다.

한산한 카페에서 심심해하던 우리에게 판공초 여행을 제안한 것은 스탠진이었다. 스탠진과 촉제스, 지프를 운전해줄 미스터 차, 나와 지혜 그리고 밍, 이렇게 여섯 명이 이번 여행의 멤버였다. 갑작스러운 일정과 밍의 합류에 우리는 스탠진이 밍의 호감을 사기 위해 급하게 추진한 여행이라고 예상했다. 한국인 여자아이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줬다 거절당한 전적이 있던 터라 그 예상은 꽤 그럴싸해 보였다.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것이 남의 연애사 아니던가. 나는 혹시나 둘에게 생길지도 모르는 핑크빛 로맨스를 상상하며 조금 음흉한 눈빛으로 밍에게 말을 걸었다.

“스탠진이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우연히 알게 됐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가 판공초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그가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고.”

도와주겠다는 말로 밍의 환심을 사려는 스탠진의 속셈이 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난 시치미를 떼고 질문을 이어갔다.

“판공초 가는 게 뭐 어렵다고. 그냥 사람 모아서 가면 되는 거잖아.”

“나한테는 어려워.”

“왜?”

“나는 중국인이잖아. 중국 사람에게는 판공초 가는 허가서가 나오지 않거든.”

“허가서가 나오지 않는다고?”

“중국 정부와 인도 정부 사이에 국경을 둘러싼 분쟁 때문에. 중국 사람들 뿐 아니라 대만 사람들도 허가를 받지 못해.”

판공초는 인도와 티베트에 걸쳐 있다. 밍은 두 나라가 품은 하나의 호수, 그 두 가지 모습을 모두 보고 싶다고 했다. 둘의 모습을 지켜본 결과 로맨스는커녕 서먹서먹해서 말도 잘 나누지 않는 사이였다. 스탠진은 무심코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행자인 우리와 현지인을 적절히 섞어 관문소의 눈을 교묘히 피할 구성을 꾸린 거였다.

눈을 뜨자마자 올려다본 하늘을 더없이 파랬고, 공기는 선선했고, 컨디션도 최상이었으며, 지프는 넉넉하고 편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잔뜩 들뜬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드라마 <대장금>의 팬이라는 미스터 차의 요청으로 <대장금> 주제가 ‘오나라’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미스터 차는 장금이의 결혼 소식에 분개했고, 스탠진은 한국 여자들의 성형문화에 대해 궁금해했다. 대화는 이스라엘 여행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촉제스는 라다크에서 천덕꾸러기로 여겨지곤 하는 이스라엘 여행자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말 못 말려. 얼마나 개념 없는 짓을 하는지 모르겠어. 늘 약에 취해있고, 밤새 술을 마시고 소란을 일으키잖아. 밤에 경찰들이 창스파를 순찰하는 이유는 다 이스라엘 애들 때문이야.”

판공초에서 캠핑장을 함께 운영한다는 미스터 차가 끼어들었다.

“한번은 이스라엘인 무리가 판공초 캠핑장에서 하룻밤을 지냈어. 보통 캠프파이어를 하고 가볍게 술을 한잔 걸치곤 하지. 그런데 술과 약에 취한 이스라엘 애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모두가 갑자기 옷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하는 거야. 날도 굉장히 추웠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지. 그러다 결국 둘씩 짝을 지어 사라지더군.”

나는 말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득 드문드문 보이는 흙산과 이스라엘 여행자들의 벌거벗은 몸이 겹쳐 보였다. 민둥머리 흙산은 살아있는 생물체의 몸 같았다. 여성의 오므린 다리 같기도 하고, 코끼리의 코 같기도 하고, 흙을 잔뜩 머금은 악어의 머리 같기도 하고, 몸을 뒤틀고 누운 호랑이 같기도 했다. 모두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그 느낌이 야생적이며 원시적이라는 것만은 한결 같았다. 그것은 내게 관능적으로 다가왔다. 이스라엘 여행자들은 보통 군 복무를 마치고 떠나온 사람들인데, 알몸이란 옷을 입고 광대한 자연의 복판에서 본능을 좇는 그 모습이 내겐 퇴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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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진 길을 곡예 하듯 돌아가니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해발 5,360m의 도로 창라Chang La가 나타났다. 부옇게 흐려진 유리창을 소매로 닦고 밖을 바라봤다. 창라에 가까워질수록 눈발이 점점 거세져 하얀 비가 되었다가 쉭쉭 거리는 바람과 만나 결국 눈보라가 되었다. 미쳐 날뛰는 눈발이 거세게 뺨을 때렸다. 눈은 금세 발목까지 쌓였다. 쨍쨍했던 아침 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잿빛으로 물든 불투명한 하늘만이 눈을 토해내고 있었다. 가진 옷 중 가장 두꺼운 옷을 입고 왔는데도 온몸이 시렸다. 눈보라가 얼마나 망나니처럼 몰아치는지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이쯤 되니 날씨가 안 좋아 맑고 투명한 호수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앞서, 눈 때문에 길이 막혀 판공초 근처에도 못 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오색 룽따 앞에서 다시 날이 맑아지기를 바라며 라다크 사람들의 기도를 따라서 읊조려 보았다.

지그재그 길을 돌아 내려오니 날씨는 다시 맑아져 있었다. 파란 하늘, 유목민과 양 떼, 달뜬 여행객들의 마음에 부응하듯 전형적인 라다크 땅의 풍광이 펼쳐졌다. 창라에서 마주한 눈보라 때문에 사그라들었던 기대는 점점 더 커졌다.

날이 맑을수록 판공초는 더 아름답다 했다.

드디어 판공초에 도착했다. 날은 맑았지만 내가 봐왔던 사진들만큼 하늘이 파랗지는 않았다. 그래도 판공초는 파란 하늘을 제 몸에 가둬 그 푸르름을 정성껏 표현하고 있었다. 멀리서 본 호수는 옥빛이었지만, 가까이서 본 호수는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에 가까운 색이었다. 각도와 해의 위치에 따라 호수는 다른 색으로 시시각각 변하며 온갖 종류의 푸름을 담아냈다. ‘눈’에 대한 풍부한 어휘를 가진 에스키모인들처럼, 라다크 사람들도 이 다양한 호수의 색을 표현할 다양한 단어들을 갖고 있을까? 나무가 없는 산은 해의 움직임으로 다양한 그림자 그림을 그렸다. 가파르지도 않고 완만하게 호수를 둘러싼 심심한 흙산들을 풍만하게 만든 것도 그림자였다. 쓱쓱 덧칠한 명암은 산의 질감을 살려줬다.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하염없이 풍경을 바라보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듯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베트 국기를 꺼냈다. 우리는 판공초를 배경으로 하여 티베트 국기를 펼쳐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밍이 물었다.

“그게 뭐야?”

“티베트 국기야. 저쪽으로 가면 티베트잖아.”

“중국이지.”

침묵이 흘렀다. 묘한 긴장감이 우리 사이에 머물렀다.

“저쪽으로 가면 티베트야.”

밍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발끈했던 나는 어쩐지 멋쩍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배를 채우기 위해 근처 게스트하우스 겸 식당으로 들어갔다. 밥과 달 짜파티, 소박한 점심을 먹는데 한 할아버지가 우리 곁에 앉았다. 느닷없는 이방인의 등에 조금 불편해졌다. 식사 중에 모르는 사람과의 어색한 대화 때문에 내 위를 언짢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으나, 접시 위에 여전히 밥이 수북했다.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벽에 걸린 달라이라마 사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달라이라마는 내 히어로야. 부모님을 두고 혼자 히말라야산맥을 넘었어. 돌아가시기 전에 다시 뵙지 못한 게 평생의 한이야.”

회한이 담긴 할아버지의 회상은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라다크에서의 삶은 어떠세요?”

“이곳은 티베트와 참 비슷해. 가끔은 티베트라고 착각할 때도 있지. 그렇지만 내 고향이 될 수는 없어.”

“티베트가 자유를 되찾으면 고향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아무렴. 가고말고.”

당연하다고 몇 번이나 읊조리던 할아버지의 눈은 저 너머의 티베트를 향해 있었다. 꾸들꾸들하게 마른 눈에 흐느낌이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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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공초 주위를 다 같이 산책했다. 호수에 발을 담그니 온몸이 쨍하고 깨질 것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들다 못해, 혼미해질 정도로 차가웠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호수에서 도망 나오자,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낄낄대며 웃는다. 짜이를 걸고 물수제비 뜨기 내기도 했다. 통통통 작은 돌은 곡선을 그리며 경쾌하게 춤을 춘다. 통통통통, 통통, 통통통, 통, 결국 짜이를 산 사람은 ‘통’ 한번 밖에 하지 못한 나였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작은 돌이 켜켜이 쌓여 있는 돌탑이 눈에 띄었다. 낡은 카메라를 꺼내 돌탑을 찍었다. 돌에 담긴 바람들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고개를 들어 호수를 바라봤다. 조금 흐렸지만 아름다웠다. 할아버지는 이곳에 와 고향 땅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호수를 바라보며 그 그리움을 달래곤 했을까.

“먼저 들어가서 쉴게요.”

밍은 미스터 차가 저녁으로 만들어 준 덴툭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숙소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까부터 줄곧 굳어있던 표정이 고산병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와 티베트 할아버지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 온 밍의 마음을 언짢게 한 것은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거 알아? 중국이 라다크 땅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거. 우리도 언젠가 프리 라다크를 외쳐야 할지도 몰라.”

밍이 사라지자마자 촉제스가 말했다. 이 말을 어지간히도 하고 싶었나 보다. 우린 말 없이 캠프파이어의 불을 쬐고 있었다. 밍의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했지만, 그녀는 별말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늘을 봐봐.”

판공초에 와서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짓는 우리가 안쓰러웠던지 미스터 차는 자꾸 분위기를 바꾸려 애썼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쏟아질 듯 촘촘하게 박힌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파아란색에 검정을 섞은 밤하늘은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나는 숨을 훅 들이마시고 밤하늘로 뛰어들었다. 아무리 깊이 파고들어도 끝은 보이지 않았고, 밝은 별빛은 광채를 더해갔다.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자연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고개를 들어 별똥별을 기다리다, 이내 목이 뻐근해져 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어가는 별을 보며 환호했다.

그러다 문득 이쪽에 있는 티베트 사람들과 저쪽에 있는 티베트 사람들이 같은 하늘을 보고, 같은 별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티베트 사람들 모두가 같은 하늘을 보고, 같은 별을 보며, 함께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침 일찍 돌아오는 길에 밍은 말이 없었다. 모두 말이 없었다. 서로 아무것도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이른 아침이라 하늘은 아직 맑게 개지 않았다. 창밖으로 빼꼼하게 보이는 판공초는 여전히 조금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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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문학전집 첫번째 작품 - 「한 달쯤 라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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