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에 이르면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의 토대가 완전히 자리 잡게 됩니다. 특히 산업혁명의 아버지 나라로 불리는 영국은 강력한 선진기술과 자본을 바탕으로 ‘해가지지 않는 국가’를 건설합니다. 전 세계에 걸쳐 식민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어느 곳을 가든 영국의 영향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는 의미였죠.
하지만 마르크스 편의 말미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정점이 있으면 그 다음에는 몰락이 있는 법입니다. 영국도 이러한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 본격적인 몰락의 시작은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단순히 참전국들이 천만 명 단위의 사상자를 낸 것뿐만 아니라, 교전기간동안 전시체제로 인해 극단적인 보호무역이 이루어지고 금본위제가 무너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유럽 안의 약소국에게 큰 타격을 입혔지만, 당시 금본위제 질서를 주름잡았던 영국에게도 영향이 미쳤습니다. 우선 인플레이션이 불안하게 일어남과 동시에 실업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1921년 무렵의 영국에서는 전체 노동력의 1/7 규모에 해당하는 백만 여명의 사람들이 실업자가 되었으며, 1920년대 동안의 실업률은 10~25%에 육박했습니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전쟁후유증에 따른 국가의 긴축재정 유지와 꽉 막힌 소통체제로 인해 앞으로의 나날들도 결코 밝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간기에 나타난 시대의 아이콘
이렇게 1차 세계 대전 종전과 2차 세계 대전 발발사이의 기간을 전간기라고 부릅니다. 이 전간기의 기간은 1차 세계 대전이라는 큰일을 겪었음을 감안할 때 불과 30년도 채 안됐을 정도로 짧았는데요. 그만큼 전간기 동안 불안정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고, 이에 대한 수습도 미흡했기 때문에 2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의 특징 중 하나였던 참호전에 임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
그렇다면 전간기는 어떤 측면에서 침체기로 기억되고 있는 것일까요? 첫째로 전쟁의 피해가 패전국인 독일에만 있지 않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독일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였던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영국 또한 전쟁 중에 해외시장과 상선이 파괴됩니다. 둘째로 전후 수습과정에서 각국이 성숙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특히 승전국이었던 영국-프랑스의 역할이 중요했는데요.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에 따른 결정보다는 감정에 앞선 조약을 패전국인 독일과 체결하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게 됩니다. 주요 조약내용은 독일의 기존 식민지를 연합국이 모두 점령, 석탄산지로 알려져 있었던 노른자 땅 자르(Saar)지역을 프랑스가 15년간 점령, 20년 안에 1320억 마르크를 금 기준으로 배상, 연합국이 입은 모든 손실은 독일과 그 동맹국이 전부 책임을 진다는 것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독일이라는 국가가 처한 상황을 깡그리 무시하고 철저히 본인들의 입맛에 맞는 조약을 체결한 것이었습니다.
경제학에서 한계혁명에 이어 두 번째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케인즈 혁명의 장본인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바로 이러한 전간기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꿰뚫어보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미 해당 조약을 베르사유에서 맺을 당시 영국 재무성을 대표하여 참가한 케인즈는 독일의 지불가능금액이 약 100억 마르크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파한 뒤, 배상금을 탕감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필요 이상의 무리한 조약은 상대국의 증오와 복수심만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케인즈는 그 길로 사표를 내고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책을 냅니다. 이 책에는 각 연합국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독일이 해당 배상금을 절대 지불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오판과는 달리 이 책은 영국과 미국에서 인기를 얻어 케인즈의 명성을 한 층 드높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상적 패러다임의 전환
이미 [평화의 경제적 귀결]을 통해 대외적인 명성을 점점 쌓아나가던 케인즈였지만, 그가 경제학에 두 번째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이라는 책에서 말한 여러 주장들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은 1929년에 일어난 대공황이라는 전간기 최대의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저서였습니다.
당시상황은 국제질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던 영국 중심의 금본위제가 흔들리고 미국이 그 틈을 타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으로 변모해나가던 시기였습니다. 즉 영국이 1인자의 자리에서 내려가고 그 자리를 실질적으로 미국이 대신하게 되는 시기였죠. 그에 따라 각종 민간투자와 기업투자도 미국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비록 1920년~1921년경에 잠시동안의 위기가 있기는 했지만 이때에도 급속한 기술진보와 광대한 시장을 바탕으로 이내 극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1929년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터집니다. 모두가 미국의 장밋빛 미래를 예측할 때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해 여름경에 이미 유럽은 미국의 해외투자가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으며, 때마침 GNP도 1분기 최고점을 기록한 이후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인터넷도 없고 주식시장 자체도 초창기에 불과했던 상황에서 이러한 사실을 인지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결국 1929년 10월을 기점으로 미국의 주식이 대폭락하면서 인류는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경제대공황을 체험하게 됩니다. 19세기부터 실업현상은 이미 감지되고 있던 것이었지만 대공황에 의한 대규모 실업과 그에 따른 기업과 은행의 줄도산, 선진국의 환율시스템 마비로 인한 패닉상태는 유사 이래 인류가 모두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었죠.
당연히 사람들은 이 사상 초유의 사태를 해결할 방안에 대해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경제학에서는 기존의 이론들을 다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수요가 생겨났습니다. 시장에 맡기면 알아서 해결된다고 보았던 고전학파의 주장이 대공황이라는 특수한 상황 앞에서 들어맞지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케인즈의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은 바로 이러한 시대의 문제를 진단하고 극약처방을 내리는 책이었습니다.
혹시 KEEP!T History: 두 명의 아웃사이더가 세운 경제적 토대편에서 말씀드린 세이의 법칙기억하고 계신가요? 세이의 법칙은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주장으로써 시장에 흐름을 맡기면 알아서 공급과 수요가 조절된다는 고전학파의 사상을 수호하는 이론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 공급과 수요가 불균형하다 주장해도 ‘그건 일시적인 문제일 뿐 시간이 흐르면 자연균형 상태로 돌아갈 거야’라고 방어하면 무적이 되는 강력한 이론이었죠. 또한 20세기에는 대공황 직전까지만 해도 경제학 이론의 여러 모델들이 변수가 통제된 채로 도식화되었기 때문에 세이의 법칙이 한층 더 굳건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공황의 명분을 등에 업은 케인즈의 일반이론은 굳건했던 고전학파의 사상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 당시에는 수요와 공급에 더불어 이자율, 임금, 물가라는 변수가 추가된 상태였는데요. 고전학파들은 세이의 법칙에 대한 연장선으로 시장에 맡겨두면 이자율이 유연하게 움직여서 저축이 투자로 연결될 것이며 임금과 물가가 유연하게 소비감소에 대응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케인즈는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고 말하며 고전학파의 주장에 반박합니다. 첫째로 케인즈는 고전학파가 말하는 바와 같이 저축이 그렇게 쉽게 투자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자율만 적게 만들어서 투자가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투자의 요소에는 이자율뿐만 아니라 정치상황, 자본의 여부, 심리적 요인 등 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로 그에 따르면 임금과 물가는 애초부터 유연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경제적 주체가 자유로운 완전경쟁시장이 아니기 때문에 독점기업 등에 의한 인위적인 물가조절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는 계약으로 맺어져 있으므로 임금 역시 정해진 계약기간동안에는 유연하게 바뀌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는 말의 의미는 시장에 맡긴 채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가 보기에 고전학파에서 말하는 주장은 전염병에 걸린 마을을 내버려두면 저절로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는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전염병에 걸린 마을에 알맞은 처방을 내리면 죽는 사람 없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시경제학의 탄생을 알리는 정부의 개입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정부가 개입해야 대공황이라는 중증에 걸려있는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의 답은 간단했습니다. 공급이 수요보다 많아질 요소를 정부가 제거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대공황은 초과공급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하여 수요의 원동력인 소비가 급감한 상태였는데요. 케인즈는 이에 대해 ‘빈 병을 땅에 파묻고 정부가 사람을 고용해서 그 병을 찾아내게 하라’라고 말할 정도로 무조건적인 수요창출을 주문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이론이 경제사상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입니다. 한계혁명이 경제학의 첫 번째 혁명이었던 이유는 노동가치설의 틀에 갇혀있던 기존의 경제학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케인즈 혁명은 시장에 정부라는 새로운 주체를 도입하여 경제학에 제3의 관점을 열어주었습니다. 단순한 공급과 수요를 벗어나 이자율, 임금, 실업, 경기변동 등 다양한 변수에 대해 논의하는 것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죠. 실제로 케인즈의 일반이론은 고전학파의 기존 주장을 아예 새로운 관점에서 반박한 것이었기 때문에 기성학자들에게 배척당함과 동시에 당대의 젊은 경제학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신자유주의와 케인지언 이론에 모두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폴 사무엘슨의 말을 통해 일반이론이 당대 젊은 지식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었는지 확인해보시죠.
일반이론은 어느 군도 원주민들에게 들이닥친 무서운 질병처럼 엄습하여 35세 이하의 대다수 경제학자들을 감염시켰다. 50세가 넘은 경제학자들은 이 질병에 면역이 된 듯 초연한 반응을 보였다.
케인즈 이론이 시사하는 것
전간기에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도 나서지 않아 통화질서는 굉장히 불안정했으며 독일에서는 억압에 의한 일종의 반작용으로 파시즘이 등장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결과로 결국 세계 2차 대전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보통 어떻게 흐름이 전개가 될까요? 전쟁은 전쟁을 벌이는 해당 주체들이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 상대방을 재빨리 굴복시켜야 끝나는 문제이므로 개인의 자율성이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양차대전에서 나타난 양상이었던 총력전에서는 중앙화의 집체인 국가의 신속한 결정체제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러한 흐름들은 결국 정부의 개입을 반대하는 고전학파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이해관계와 부합하는 케인즈 이론이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때마침 2차 대전 종전 후 1950년대에 걸쳐 이루어지는 사상 유래 없는 눈부신 경제성장은 케인즈의 이론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드는데 충분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케인즈의 이론은 당대의 맥락을 정확하게 잡아낸 이론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한편 종전 무렵 말년의 케인즈는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다소 특이한 주장을 합니다. 금본위제에 의존하지 말고 금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국제통화 뱅코르(Bancor)를 만들자는 것이었는데요. 금과 유사한 가치를 지니게 하기 위해 세계 각국 통화의 상관관계를 계산해서 뱅코르의 포트폴리오에 넣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제안했던 이유는 금본위제를 유지할 때 한 나라에 금이 쏠리게 되면 국제적으로 균형이 깨져 금융시장에 혼란이 올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케인즈의 이러한 예측은 나중에 금본위제가 붕괴되고 국가의 신용에 의한 신용화폐사회가 정착되면서 들어맞게 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채택된 화폐시스템은 뱅코르가 아닌 금본위제 기반의 달러기축체제였죠. 물론 케인즈의 뱅코르 개념을 일부 차용해서 훗날 여러 나라의 환율을 계산한 SDR이라는 특별인출권을 IMF에서 만들긴 했으나, 이것은 언제까지나 IMF의 통제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또 다른 잠재적 기축통화에 불과할 뿐입니다. 애초에 케인즈가 주장한 뱅코르의 핵심개념은 각 나라의 이해관계가 들어가지 않은 공통화폐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암호화폐가 가져다주는 새로운 영감은 그가 말년에 주장했던 이론적 개념을 실체화하는 하나의 현상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케인즈 이론의 황금기
비록 케인즈의 주장이 당대의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다고 말하지만, 주류학계에서는 2차 세계 대전 무렵까지 철저히 배척받던 이론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공황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국가의 역할은 필연적으로 증대될 수밖에 없었고, 마침 이런 시도들이 여러 경제지표의 성장과 승전으로 연결되면서 1950년대 무렵에 케인즈 학파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황금기 뒤에는 언제나 내리막길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노동가치설의 틀이 가장 견고했을 때 한계혁명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듯, 공급과 수요의 논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었을 때 케인즈의 이론이 등장했듯, 이제는 그 누구도 케인즈 이론을 막을 수 없다고 여겼을 때 그의 사상이 지배하는 세계경제가 파열음을 내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역사라는 것은 아무도 그 현상을 믿어 의심치 않는 순간, 그 자리에 다시 새로운 현상이 들어서는 과정일지도 모를 일이죠. 다음 시간에는 이 파열음을 놓치지 않고 케인즈의 아성에 도전한 새로운 학파의 시사점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KEEP!T이었습니다.
SH
참고문헌
토드 부크홀츠 저, 이승환 역,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존 메이너드 케인즈 저, 이주명 역,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
존 메이너드 케인즈 저, 박만섭 역,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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