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아동미술 교육을 하면서 느꼈던 것 중 하나는 - 아이들은 대개 색칠을 싫어한다 - 였다. 왜일까? 다들 스케치는 재미있게 한다. 하지만 색칠하는 단계에서는 지루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아래 그림을 보자.
윗그림의 경우 색칠하기 싫은 아이의 기분이 반영되어 있다. 분노와 짜증의 크레파스 스트로크.. 아래 그림을 그렸던 아이도 스케치는 단번에 끝냈다. 그러나 스케치했던 선을 넘지 않으려 조심조심 배경을 칠하느라 수업의 모든 시간을 다 할애해버렸고, 아이는 진이 빠져버렸다. 생동감 넘치는 스케치의 순간이 지나가버리면 급격하게 그림에 흥미를 잃고야 만다.
이는 모두 선 스케치 - 후 색칠 방식의 미술 교육과 관련이 있다. 흰 종이에 연필로 스케치를 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없던 세계가 창조되는 순간이다. 선 하나를 그을 때마다 공간이 하나씩 생성된다. 스케치는 당연히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스케치 과정에서는 모든 선이 종이 위에서 독립적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 배웠던 기억을 떠올려보자.색칠을 대했던 방식은 어떠했나? 색은 그저 스케치했던 선 안을 채우는 역할 뿐이었다. 철저히 보조적인 역할이었다. 때문에 색칠할 때 더이상 세계는 생성되지 않는다.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끝이 빤히 보이는 지루한 과정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한 번도 '색'을 독립적인 영역으로 생각해보지도 못한채 생의 짧은 미술교육을 다 허비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스케치까지만 재미있다면, 굳이 색칠을 권할 필요가 있을까? 스케치 자체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아이들에게 먹, 화선지, 붓을 쥐어줬다. 색칠에서 해방된 아이들은 정말 전혀 망설임 없는 일필휘지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흰 여백을 다 칠하지 않아도 되고, 한 장 완성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단축되었다. 아이들의 손끝에서 정말 자유롭고 흥미로운 형상들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드로잉쇼의 관객이 된 기분이었다. 그들이 쏟아내는 에너지를 넋놓고 구경만 하다가 집으로 왔던 기억이 난다. 지금 봐도 너무 흥미로운 형상들이다. 아이들을 왜 그림의 대가라고 하는지 알 것만 같다. 재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주려고 했다가, 관뒀다. 왜냐? 어차피 아이들은 알려준대로 하지 않는다. 또 알려주지 않아도 이미 직관적으로 어떻게 사용하는지 다 알고 있는 것만 같다. 혹은 모르기 때문에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
여기 7살 아이의 그림을 보자. 수채화라는 것을 이 날 난생 처음 경험한 아이였다. 워낙 내 말을 안 듣는 아이였던지라 수채화에 대해 설명을 하기도 전에 이미 종이에 뭔갈 그리고 있었다. 본인이 좋아하는 포켓몬스터를 그렸단다. 정말 이 그림을 보고 놀랐다. 물 농도를 조절하며(의도하진 않았겠지) 회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아동미술이고 뭐고를 떠나서 그냥 훌륭한 드로잉 작품이다.
스케치를 극대화시키는 교육을 했다면, 이번에는 색칠을 극대화시키는 제안을 해봤다. 다만 조건은 한 가지였다. 절대로 스케치를 하지 말 것. 물감으로 색을 칠하는 동시에 형태를 만들어 볼 것. 그러니까 색칠과 스케치를 나누지 않는 동시다발적인 그림을 그려보라 했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9살짜리 한 아이의 그림이다. 이 아이는 끔찍히 그림에 자신감이 부족했던 아이이다. 말은 잘 들었지만 항상 의욕이 없었고 뭘 해도 재미를 못 느낀 아이었기 때문에 나 역시 반 자포자기 상태였다. 어느날 종이를 주고 색연필로 니 맘대로 아무렇게나 채워보라고 했더니 최초로 '즐겁게' 그렸다. 오호라?
다음에는 반 고흐의 그림을 보여줬다. 스케치는 하지 말고 색깔정도만 사용해서 따라그려보되, 그리다가 니가 하고싶은게 생기면 마음대로 변형해도 된다- 라고 주문해다. 반년동안 의욕과 자신감이 없던 아이가 매번 즐겁게 그리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불행히도 아이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한 아이의 부모님께서 수업이 끝나면 그 그림들을 어김없이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이것은 불행한 문화수준의 현실)
그림에 자신감 없었던 다른 7살 아이도 자유 주제로 오로지 색만 이용해서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역시 거침없었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이 때가 가장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본인도 그림의 끝이 어떻게 완성될지 모르는 상태로 색을 칠해나간다. 선 스케치, 후 색칠에서는 전혀 느껴볼 수 없었던 색칠의 방식이다. 공연장의 관객이 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흰 종이에서 색 덩어리들이 생성되고 있다.
좋은 그림의 감식안이 없는 어른들 아래에서 아이들은 이런 그림을 그리고도 칭찬을 못 듣는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 없음을 재빨리 규정한다. 사물을 최대한 닮게 모방하는 스킬만이 대우받는 미술의 세계에서 이런 아이들은 열외로 빠지게 된다. 우리는 위대한 색채화가를 이런식으로 잃어간다.
@thel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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