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다닐 적 내 소원은 ‘일만 하고 싶다’였다. 이미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고 있지만, 무의미한 회식이 너무 많았다. 업무의 연장이라고 말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회식은 모두가 힘들어하고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끝없이 이어졌다. 이 정도면 회식이 아니라 얼차려였다. 그 덕에 가뜩이나 바쁜 일을 처리할 시간과 정신은 사라져 버렸다. 모두들 입만 열면 바쁘다 말했지만, 그 이유는 늘 새벽까지 술 마시고 다음날 기운을 차리지 못하기 때문인 것만 같았다.
그 상황에서도 같은 부서 동기 한 명은 회식이 끝나고 꾸역꾸역 사무실로 돌아가 다시 일을 했다. 눈은 풀리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저는 일을 덜 끝내서 사무실에 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를 부장은 “야 좀 살살 해!”하며 핀잔주듯 칭찬했다. 행여나 부장의 눈에 들지 못하는 날이면 그 동기는 새벽 4시에 회사 메일로 부장에게 굳이 안 해도 될 밤사이의 업무 보고를 하곤 했다. ‘남들 없을 때 회사에 출근해 일하다 메일로 보고하기’는 주말에도 이어졌다. 곁에서 지켜보면 처절한 그 모습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납득할 수 없었지만 욕할 수도 없었다. 그래야만 부서 동기인 나를 이기고 인정받아 ‘평범한 삶’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그도,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듯 그것이 사회생활이고, 조직생활이니까.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동이 텄다. 눈물이 났다. 방금 전에 퇴근했는데 다시 출근해야 했다. _본문에서
_김보통,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웹툰 ‘아만자’의 김보통 작가의 에세이다. 사실 이 책은 지금 열심히 공부 중이신 @vimva님이 진행하셨던 kr-bookclub의 10월 선정도서였다. 10월에 썼어야 하는 글이었지만 여기엔 나름 사연이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데 세 번이나 방문해서 겨우 빌릴 수 있었던 것.
책을 확인하고 처음 도서관에 갔을 땐 가는 사이 누군가 책을 대출해 가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한 주 뒤 다시 찾은 도서관. 그런데 이번에는 책이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사서 분과 함께 찾아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전화번호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삼고초려 끝에 겨우 책을 읽어볼 수 있었다. 다행히 읽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책은 작가가 웹툰 작가가 되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작가가 되기 전 대기업에 다니는 평번한 회사원이었다. 남들 보기에는 부족함 없는 삶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건 작가가 원한 삶은 아니었다.
잦은 야근 그리고 이어지는 회식. 쓸 때 없이 긴 회의와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직장 상사. 대기업에 가야 사람답게 산다고 말했던 그의 아버지 말을 뒤로하고 작가는 4년 뒤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작가가 다녔던 회사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었다. 이 책 전체가 회사 이야기로만 적혀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작가의 회사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힘들어하는 작가의 감성이 그대로 드러난 글은 오히려 읽는 내내 불편했다.
새벽 6시 50분에 회의를 하는 부장. 회식에서 빠졌다고 쌍욕 하는 차장. 매일 있는 야근과 이어지는 회식. 어느 하나 편한 얘기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회사생활을 계속 알고 싶었던 건 읽을수록 안도하고 있는 나를 봤기 때문이다.
자신이 불행하다 느끼는 작가를 보며 동정이나 안타까움이 아닌 ‘나는 그나마 괜찮구나.’라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그가 불행해질수록 나는 더 안심했다.
책에서 많은 사람들은 작가에게 말했다. 힘들어질 거라고. 안정된 회사를 그만두니 불행해질 거라고. 예전 직장에서 한 동료도 내게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 있다.
대책 없이 그만두면 힘들다고. 그러면 안 된다고. 큰일 난다고.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퇴사 후 내게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에게 직장이라는 건 인생의 한 조각일 뿐이지 전부는 아니다. 불행해질 것도, 큰 일 날 것도 없었다.
책은 대기업 퇴사를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적어 놓은 몇몇 책들보다 더 교육적이고 훌륭하다. 자랑처럼 늘어놓는 무용담보다 힘들어서 그만뒀다는 작가의 솔직함이 몇 곱절은 더 멋지게 느껴졌다.
열공 중이신 @vimva님을 응원하며. :)
||북끄끄 책장||
#14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15 최은영, 그 여름
#16 릴리 프랭키, 도쿄 타워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