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의 재해석] 신데렐라 외전; 유리공 존 그라스 (3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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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음 날 낮에 우린 숲에서 만났습니다. 루시는 축제 참가 건으로 의논할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곤 집에서 나왔습니다. 노랗게 물결을 이룬 은행나무 아래서 우린 재회했습니다. 우린 나무 아래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습니다. 루시는 전날의 질문을 반복했습니다. 존 그라스, 왜 그렇게 갑자기 사라졌던 거야? 난 구두 가게에서 쫓겨난 그날 밤부터 지금까지의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루시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처음에 널 잠시 원망했어. 네가 떠나고 나니,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날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더라구.

 루시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이 그때보다 사정이 더 나빴습니다. 루시의 아버지가 2년 전에 돌아가신 후로, 루시는 아예 하녀들의 숙소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루시의 새 엄마는 루시를 하녀 중 하나로 취급했고, 가문의 공식적인 행사 때만 루시를 저택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새 엄마는, 라수스 남작의 전갈을 받고, 루시를 왕비 생일 축하연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루시의 새 엄마는 라수스 남작의 먼 친척이었습니다. 사실상 눈에 가시 같은 루시를 처분할 기회였던 것입니다. 라수스 남작과 루시의 새 엄마는 정치, 경제적으로 꽤 얽혀 있는 관계였습니다. 루시는 집을 방문한 남작을 여러 번 본 적 있고, 루시의 아름다움을 눈여겨 본 남작이 남작의 계획에 루시를 포함시켰던 것입니다. 루시는 남작의 구체적인 계획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축제에 들러리로 참석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요.

“그거 알아?” 루시가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습니다. “그들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내 처지에서는 시키는 걸 해야 하니까. 난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걸 할래. 이렇게 널 똑바로 쳐다보는 거지. 정든 친구의 눈을, 검은 머리칼을, 나를 들어주는 귀를 말이야.”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그들은 무서운 사람들이야.”

 난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루시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을 어떤 걱정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옛날 13살 때와 똑같은 눈으로 루시가 나를 바라봤습니다. 서로의 삶에 생긴 생채기를 이해하는 유일한 친구, 그때처럼 서로의 삶에 한 조각 온기라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오고 갔습니다. 전 진심을 다해 말했습니다.

“루시, 내 온 힘을 다해서 널 지킬게. 네가 위험에 처하도록 그냥 두지 않을게.”

 루시는 내 말에 활짝 웃으며, 힘차게 고개만 아래위로 흔들었습니다. 우리 둘 다 알고 있었습니다. 루시는 제가 도달할 수 없는 높이의 위험 속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요. 그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전 루시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구두 가게에서 쫓겨났던 밤에 전 한 가지를 느꼈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도, 나를 지켜보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는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을 때도 내 행복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저 느낌일 뿐이지만, 불에 덴 상흔처럼 아직까지 제 마음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유리 구두를 제작하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다섯 개의 구두를 만드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습니다. 유리 구두를 다 만든 다음 날, 그 집사와 마부가 찾아왔습니다. 전 집사와 마부가 또 건질만한 말들을 내지 않을까 싶어서 부엌 마루바닥 아래에 숨어 있었습니다. 태미 영감은 작업장에서 다섯 개의 구두를 포장해서 부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오기 전에 태미 영감은 저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띄지 말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을 찾아 나서지 말라고 말입니다. 전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건지 몰랐습니다. 그저 단순히 저의 안전을 걱정해주는 말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구두를 만드는데 어려움은 없었소?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든가….”
“뭐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또 당부하신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의뢰인이 무척 흡족해할 거요. 앞으로도 입 밖에 내선 안 됩니다.”
“네 명심하지요.”
“여기 의뢰비요. 꽤 큰 돈이지요. 당분간 멀리 여행이라도 떠나는 게 어떻겠소? 여행 경비도 따로 챙겨 넣었습니다만.”

 난 마루바닥의 틈새로 집사의 망토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아래에서만 보이는 위치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대롱대롱 매달려 망토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검이었습니다. 보통의 집에서 사용하는 칼이 아니라, 기사나 군인들이 쓰는 양날 검 말입니다. 그자는 집사가 아니었던 겁니다. 전투의 현장도 아닌데 검을 들고 온 까닭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도 답은 한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 검을 사용하기 위해 갖고 온 것입니다. 난 태미 영감이 어서 그들이 원하는 답을 말해주기 바랐습니다. 태미 영감이 입을 열었습니다.

 말씀 참 감사합니다. 전 지금 일감이 밀려 있습니다. 벌여둔 일도 있고요… 난 집사의 손을 주시했습니다. 손이 망토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기운이 달려 일을 좀 쉬려던 차였습니다. 이웃나라도 방문하고 싶었고요. 집사의 손이 다시 망토 밖으로 나왔습니다. 전 안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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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미 영감은 그들과의 약속대로 다음 날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가기 전 저에게 말했지요. 그들에게 말한 것은 진실이며, 오래 전부터 생각해오던 거라고 말입니다. 이제 이 작업장을 잘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길로 은퇴한다고도 했습니다. 우린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부둥켜안았습니다. 전 그에게 꼭 돌아오라고 당부했습니다. 전 늘 이곳에 있고, 이곳은 당신의 집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하고는 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감과의 마지막이었습니다. 17년 동안 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전 지금도 어두운 밤, 바람이 매섭게 부는 밤이면 태미 영감을 떠올립니다. 그가 저를 막아서 무서운 바람을 막아주고 감싸주던 모습을 말입니다.

 왕비의 생일 축하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날은 온 왕국의 축제였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축제를 벌이고, 초대받은 귀족들과 사교계 인사들, 그리고 왕족들은 왕궁에서 열리는 성대한 잔치에 참여합니다. 지난 번 재회 이후 일주일 동안 루시와 저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숲에서 만났습니다. 감시하는 눈을 염려해 오래 만나진 못했습니다. 그간 살아오며 겪은 일들과 앞으로 다가올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늘 대화의 매듭을 짓지 못하고 헤어지곤 했습니다.

 삼일 째 되는 날 루시는 새로운 얘기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습니다. 그것은 루시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도시의 거부였던 그가, 왜 오랫동안 외국으로 떠돌며 무역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루시는 말해주었습니다. 루시는 하녀 숙소에서 지내면서 하녀들 사이에 알려진 많은 비밀들을 듣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왕국의 실세인 라수스는 도시의 거부이자,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은 루시의 아버지를 경계했다고 합니다. 라수스 가문 출신인 새 엄마와 루시 아버지의 재혼도 라수스의 정치적인 압력이 작용했다고 합니다. 결혼 이후에도 꾸준히 부와 명성이 높아지던 루시 아버지를 라수스는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라수스는 정치적으로 수를 써서, 루시 아버지의 무역 회사 하나를 위기에 빠뜨렸고, 그 수습을 위해 루시 아버지는 외국으로 나가야했습니다. 그 후 루시 아버지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전 그 날 알았습니다. 루시가 예전에 내가 알던 그저 순진하고 따뜻하기만 한 소녀가 아니라는 것을요. 루시는 이미 라수스 남작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위험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습니다. 루시는 그걸 이용할 생각이었습니다. 라수스 남작의 바람대로 왕자를 만나고 결혼하여,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루시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전 루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전 언제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웃는 얼굴 아래에 감추어진 고통과, 그 순진무구한 눈빛 속에 숨겨진 지혜를 말입니다. 그녀는 마냥 웃기만 하는 부잣집 딸이 아니었습니다. 전 그녀가 위험한 선택을 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제 곁을 영영 떠나갈 것 같은 예감이 서늘하게 저를 통과해 지나갔습니다.

 축제가 다가오자, 라수스 남작은 그의 계획에 동참할 처녀들을 그의 저택으로 불러 모았고 축제 때까지 저택 안에서 거사를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처녀들은 옷차림과 외모를 꾸미는 한편, 라수스 남작은 행여나 그 처자들이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까 하여 회유하고 협박하며 자신을 따르도록 세뇌 시켰습니다. 루시가 저택으로 들어가고 난 후 전 루시를 볼 수 없었고, 안절부절 했습니다. 가만히 있을 순 없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루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섯 명의 처녀들 중에서 성공하는 1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계획의 비밀을 알고 있는 실패한 여자들을 살려둘 리는 만무합니다. 전 루시가 살아남기 위해 성공하기를 바랐지만, 제 심장은 그걸 바라지 않았습니다.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루시의 안전과 우리 관계의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매 순간이 고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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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일이 되었습니다. 왕궁에서의 잔치는 저녁 무렵 시작될 것이었고, 거리의 축제는 점심때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폭죽을 터뜨리고, 길거리 음식을 사먹고, 왕비의 탄생을 축하하는 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 전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침부터 유리병을 만들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전 마냥 앉아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왕궁으로 향했습니다. 왕궁의 호위병들이 있는 곳까지 최대한 가까이 가서 루시를 기다릴 생각이었습니다. 루시가 만약 임무에 실패한다면 그들은 왕궁 근처에서 루시를 해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전 그걸 막기 위해 왕궁 근처에 머물러 있을 생각이었습니다. 사람들 이목 끌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루시가 나온다면 아마도 왕궁의 다섯 번째 후문으로 나올 거라고 전 생각했습니다. 그 문은 숲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거리로 이어지는 다른 문보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일이 없었습니다. 전 그 곳에서 기다렸습니다.

 제가 왕궁의 다섯 번째 후문 근처에 숨어서 기다리던 그 시각에, 루시는 라수스 저택에서 유리 구두를 신고 화려한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각각의 처녀들은 다른 마차를 타고 따로 움직였습니다. 루시의 행적은, 그 이후에 간단히 전해들은 내용을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루시는 사교계의 환영을 받으며 왕궁에 들어섰습니다. 연주자들이 왕궁의 흥겨운 레퍼토리를 끝없이 연주하고 있었고, 거대한 왕궁 연회장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서로 정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무대 앞에선 남녀가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고, 처음 보는 진귀한 음식들과 술이 연회장 벽을 따라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루시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긴 나팔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왕족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무대 반대편 입구로 주세페 4세와 그의 왕비, 그리고 노바 왕자가 등장했습니다. 주세페 4세가 손짓을 하자, 연회장은 일시에 잠잠해졌습니다. 왕이 왕비의 생일 축하하는 간단한 말을 하고 왕족은 무대 위 왕족의 자리로 이동했습니다. 노바 왕자는 왕족의 자리로 가지 않고, 연회장의 여러 무리 속에 섞여 들었습니다. 루시가 넋을 놓고 서 있을 때, 신사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다가오더니, 루시에게 속삭였습니다. 날 따라와. 루시는 정신을 차리고 그 남자를 따라 갔습니다. 남자는 왕자가 있는 근처로 루시를 이끌었습니다. 그곳엔 이미 유리 구두를 신은 다른 처녀 셋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한참 후에나 볼 수 있었습니다. 처녀들은 귀족과 담소를 나누는 왕자 근처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돋보일 기회, 눈을 맞출 기회 말입니다. 루시 역시 주스를 홀짝이며 처음 보는 귀족 여자와 인사말을 나누면서 왕자의 동태를 주시했습니다. 귀족 여자와 대화가 끝났을 때, 왕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자는 유리 구두를 신은 세 명의 처녀에게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짙은 눈썹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왕자는 시원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녀들과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루시는 한 발 늦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순간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차라리 그 쪽을 바라보지 않는 편이 편할 것 같았습니다. 루시는 돌아서서 음료를 서빙 하는 하인을 불렀습니다. 하인이 루시에게 잔을 건네는 순간, 다른 손이 불쑥 나오더니 그 잔을 잡았습니다. 루시가 그 손의 주인을 바라보자, 왕자가 루시를 보고 환하게 웃었습니다.

“줄곧 내 쪽을 봤으면서 왜 돌아서버렸지? 이 축제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하고는 말이야.”
“네 폐하. 저는….”
“거짓말을 못하는 군. 당신은 말이야. 그렇게 생겼어. 거짓말은 어울리지 않게.”
“저하는 사람 마음을 다 아시는 것처럼 생기시진 않았는데, 다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흠. 그런가. 역시, 거짓말은 못하는 성격이군. 내가 잘 봤어.”


To be continue. 마지막 편으로 이어집니다.


작가의 변

아아. 쓰다보니 계속 길어지네요. 벌여놓은 이야기 장치가 많아서 수습하기 바쁩니다. 다음 4편에선 확실히 마무리를 지으려고 합니다. 부족한 이야기지만 즐겁게 봐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이틀 동안 이 이야기를 붙잡고 원고지 100매 이상 분량의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특별한 경험이네요. 읽는 분들과 소통하면서 쓰는 일 말입니다. 혼자 썼다면 그렇게 못했을 겁니다. 격려와 기대를 보내주셔서 이게 가능합니다. 마지막 4편을 들고 내일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Soulmate writer by your side.


*신데렐라 외전 1편 - @kyslmate/49rqc7
*신데렐라 외전 2편 - @kyslmate/7ejexh
*신데렐라 외전 4,5편 - @kyslmate/4th-5th-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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