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자비 관음상이 모셔있는 길상사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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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이곳저곳 누비는 것 자체가 몸을 지치게 할 뿐이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다. 젊었을 때 유명하다는 곳을 꼭 찾아서 보아야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떠나기 전에 미리 학습도 하곤하였다. 부질없었다. 시험보기전의 초치기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실재로 가보면 기대감을 채워줄 정도로 만족한 경우가 없었다. 여행뿐이겠는가? 모든 것이 그렇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연애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랑하는 이성이 생기기 전에는 그 사람과 만들어갈 모든 분위기가 최고의 쾌락을 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실제 그 분위기를 체험하게 되면 생각보다 별로인 경우가 많았다. 나의 성격이 이상한 탓일까? 잘 모르겠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 회사에 들어가기 전, 결혼? 결혼은 못했으니까 그냥 스킵하자. 앞으로 펼쳐질 내가 경험할 세상에 대한 이상이 막상 현실로 다가왔을 때 생각보다 시시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런가?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내가 욕심이 아주 많아서 만족을 모르는 탐욕덩어리였던가?

왜였을까?

아마도 나는 단 한순간도 내가 경험하는 바로 지금 이곳, 바로 이 시간 순간순간에 현존하는 연습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 과거와 미래에 대한 탐욕, 분노에 덮여져 있으니 바로 지금 여기를 온전하게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여행이라는 물리적 이동보다는 과거와 미래로부터의 생각여행을 바로 지금 이 순간 ‘현재로의 여행으로 옮기는 여행’에 더 충실하고자 한다. 이것이 내가 물리적인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나 일상에 찌들고 고단한 삶에서 탈피하는 여행은 내 생활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따지고 보면 쓸데없는 생각들(돈, 여자/남자, 명성) - 사실은 잡생각들-을 현재의 삶에 온전하게 집중할 수있도록 만들어주는 육체적 공간 이동이랄까?

이런 표현이 있지 않은가?

Out of Sight Out of Mind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여유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이 필요할 것도 같다. 나는 돈, 명예, 이성 같은 것을 획득하려는 욕심이 다행히도 백수?라는 상황으로 강제 압축되어져 있는 상태이다. 그렇지만 언제든지 용수철처럼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길상사(吉祥寺)는 대한민국의 서울, 성북동에 자리 잡고 있다. 법정스님의 글들을 너무나 좋아했고 그분의 삶이 맑고 향기로웠기 때문에 그리고 길상사가 생긴 유래, 성모마리아를 닮은 자비 관음상 때문에라도 언젠가는 가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성북동 길이 아주 운치있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에게 들어서 궁금했다.

1987년 공덕주 길상화(吉祥華) 김영한님이 법정스님께 음식점이던 대원각을 청정한 불도량으로 2월 14일 만들어주시길 청하였다. 1995년 법정스님께서 그뜻을 받아들이셔서 6월 13일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말사 ‘대법사’로 등록을 하고 주지에 현문스님이 취임했다. 1997년에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등록하고 같은 해 2월 14일에 초대 주지로 청학스님 취임 및 1차 도량정비불사회향을 했다. -길상사연혁에서



[21세기 時景] 광석이 법정을 노래하다 / 맑고 향기롭게(淸香)



성모마리아를 닮은 자비 관음상

나의 모태신앙은 카톨릭이다. 어려서부터 할머니, 어머니께서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왔기에 나에게 성모마리아는 어머니와도 같은 푸근함이 느껴진다. 지금은 특정 종교를 신앙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교 신자에 가깝다. 그런데 나는 불상에서보다는 십자가나 성모마리아 앞에서 편안함을 더 느낀다. 이생에서 자라온 습기 때문일까?

길상사의 자비관음상을 조각한 최종태 교수님은 카톨릭 신자라고 한다. 남양주의 봉선사에도 같은 조각가에 의해 조성된 자비관음상이 있다. 그래서 여기에 모셔왔다.


봉선사의 자비관음상

길상사의 자비관음상은 갸름하고 도시적인 미인형이라면 봉선사의 자비관음상은 후덕한 맏며느리같이 복스럽다. 자비스러움의 표현에도 개성이 있을 것이다. 세련된 자비와 투박한 자비? 나는 어느 쪽을 선호할까? 30대까지는 세련됨을 쫓아다녔다. 40대에 넘어서면서 덤덤한게 좋아지고 있다. 그런데 길상사 자비관음상이 더 좋다. 아직도 세련된 도시미를 무의식 중에 선호하는가보다. 봉선사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과거에 회사 동료들이 나를 서울깍쟁이라고 부르긴 하였다.


관세음(觀世音)에 대한 생각


관세음(觀世音)이란 ‘세상의 소리를 보다’는 의미가 있다. 소리는 듣는 것인데 왜 보는 것이라고 표현했을까? 불교의 유식론(唯識論)이나 아비담마(Abhidhamma)에서 강조하는 것이 청정(淸淨)한 마음이다. 깨끗한 마음이란 번뇌가 없는 마음인데 그 마음이 작용하여 듣기도 하고 보기도하고 먹기도 하고 느끼기도 하는 등 인식작용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요한 상태에 자리 잡으면 듣는 것, 보는 것 등의 차별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감각작용이 연결된다고 한다.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만지는 것이 듣는 것이 되기도 하고 보는 것이 듣는 것이 되기도 하듯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관자재(觀自在)자재하게 본다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염불도 주문이다. 부처님의 이름을 소리로 계속 되뇌이는 것이다. 꼭 부처님이 아니어도 좋다. 기독교신자라면 JESUS(예수님)를 반복해도 된다. 내게 의미가 있는 구절을 되뇌여야 된다. 능엄경(楞嚴經)안의 이근원통장(耳根圓通章), 풀이하자면 청각에 의지해서 두루 통하게 하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우리가 관세음보살이라고 할때 관세음(觀世音)은 소리를 마음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그 소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성을 알아차리는 훈련을 하는 것이 바로 염불/주문수행이다. 주문을 외우는 순간에 집중(止/사마타)을 이루고 그 소리에 대한 집중에서 그 소리의 들음을 버리고 듣는 성품을 돌이켜서 내 안의 자성을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관조한다는 것은 결국 알아차림/觀/위빳사나이다. 이것이 바로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 회광반조(回光反照)이다(들음을 돌이켜 듣는 마음을 보면 그 돌이킨 마음(빛)은 두루 비추어진다). 어디를 비출까? 이것이 바로 지관(止觀)수행이다. [21세기 時景] 날아라 슈퍼보드 아이들에게 주문을 가르치다(치키치키차캬차캬초코초코쵸)/주문을 훈민정음 제자원리로 해석하다



주문은 아니어도 자기 전에 항상 읽고 자는 자비경과 자비 기도문이 있다. 자비경은 숫타니파타에 실려 있는 경전인데 내용이 참 좋다. 천주교 신자가 이를 바탕으로 기도문에 맞게 내용을 수정했는데 이것도 내용이 참 좋다. 특히 자비경의 유래가 심상치 않다. 자비경을 외우는 자는 천신들이 보호하여 악귀들이 해악을 끼치지 못한다고 한다. 해악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가 자비의 아우라로 악귀의 마음을 조복시키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위엄으로 악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겁을 주는 것이 아니다. 사통팔달 자비심의 마음을 퍼트리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증오와 탐욕에 불타있는 내가 자비경과 자비의 기도로 1도만큼이라도 순화되길 항상 바라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아직도 싫은 사람은 싫고 좋은 사람이 좋다. 그래서 백수를 자처한 것이다. 성가신게 싫으니까... 그러나, 진정한 수행자는 관계의 어려움을 이겨서 조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순화하는 것이다. 나는 어찌보면 도망자일뿐이다.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자비가 함께하시길...

ps. 자비(慈悲)에서 자(慈)는 사랑을 주는 것이고 비(悲)는 고통을 함께 동참해주고 경감시켜주는 것이다. 그래서 자비심이 무서운 위력이 있다고 한다.

자비경의 유래
자비경과 자비기도문


공양주 길상화 보살의 사당으로 가는 돌계단에 덩굴식물의 잎사귀가 정갈하게 덮고 있다. 가을의 문턱이라 몇몇 잎사귀는 쇠하고 있다. 나의 늙음도 이렇게 조금씩 희끗희끗해지고 있다.


극락전

극락전과 지장전에서 가족과 먼 길을 떠나는 친구를 위하여 24번씩 절을 하였다. 지장전에 들어서니 할머니 한분이 벽에 기대어 지장경을 독송하고 계신다. 지장전에 비치되어 있는 소책자 지장경예불문을 정좌하고 정성들여 읽었다. 대략 30분 걸리는 거 같다. 길상사 지장전의 위치가 특이하다. 성북동 도로 주변 외각에 위치해 있어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행인들의 소리들이 들려온다. 지장전 밑에는 도서관과 까페가 결합한 ‘다라니 다원’이 있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지장보살은 육도중생이 성불하기까지는 절대로 해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맑고 깨끗하여 우리 같은 범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비스럽고 거리감 있는 보살이 아니라 저잣거리에 더불어 함께하시는 보살이다. 내가 만나는 주위의 거지도 지장보살이 될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장전이 가장 속세와 연결되게 자리잡았나보다.

지장전을 나와 길상사내 지장전 문밖에서 속세를 바라보다. 으리으리한 가정집이 같은 높이? 아니 좀더 높은 곳에 보인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보니 길상사로 들어가는 현판이 보인다.


스님과 선수행자들의 처소에서 내려오는 길 계곡에 걸터앉아 있는 반가사유상이 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나니 오직 분별하는 것을 꺼릴뿐이라.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으면 툭트여 명백하리라. -길상사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오직 분별함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못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쉽기 때문에, 꽉 막히어 캄캄하다. 그래서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단지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다. 둥글게 둥글게 모나지 않게 걸어갈 뿐이다. 우리는 무명(無明/어리석음/어두움)속에서 태어나서 무명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나, 무명이라는 글자 뒤에는 명(明)이 있기때문에 언젠가는 밝아질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내안의 밝음을 자각하면 된다고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세음(觀世音), 세태의 소리인 변화(진동, 요동, 파도타기, wave)를 잘 관찰하여야 하나보다. 내안에 빛이 있기에 어둠을 볼수 있겠지. 어둠만이 있다면 어둠밖에 없는데 무엇을 볼것인가?

이글을 읽은 모든 분들께서 길상원만(吉祥圓滿)하시길...



[여행기] 자비 관음상이 모셔있는 길상사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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