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레도 대성당(스페인)
배낭영성
밀라노와 피렌체(지상의 천국)의 일부와 관련된 다른 내용을 남겨둡니다.
성야곱 성당(독일 뤼데샤임), 이 마을에 머무는 동안 이 성당의 종소리가 듣기 좋았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마을마다 절에서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있었다. 개인적 성향이겠지만 내게는 새벽의 목탁 두드리는 소리와 뻐꾹새의 울음도 깊은 잠을 깨우는 협박이기보다는 부드럽게 의식을 일으키는 다정한 음악 소리로 느껴진다. 유럽 여행에서 가장 부러웠던 것을 뽑자면 다소 번잡한 도시라도 때맞추어 울리는 타종 소리, 아직 자연의 모습을 간직한 새 소리, 맑은 공기와 하늘이다. 아주 큰 도시는 가보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전통이 자연스럽게 계승된 유럽 소도시 풍경과 지금 우리 마을의 밤 풍경은 사뭇 다르다.
물질적 가난함을 벗어나더라도 마음의 가난함을 벗어나기는 힘든가 보다. 내가 이해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과의 소통이자 자발적 가난(겸손과 내적 충만)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렇게 드러나는 십자가는 폭력, 찌라시, 점집(정신적 안정을 얻으려면 돈부터 내시오. 월급의 1/10로다가 따박따박은 기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당신이 내는 돈에 비례한다오), 하느님께 때를 쓰는 아우성(아부지, 나 여기 있소!)과 같은 느낌이 일어난다. 그러한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내 마음이 그와 같기 때문일 것이라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런데 꼭 옛마을의 점집들을 보는 것 같으니, 내가 점치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원래 똥개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하니까,
톨레도 대성당 안에서 천장을 바라보다.
유럽에 성당이 그렇게도 많았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우리가 편하게 부르는 성당이 유럽에서는 규모와 쓰임새에 따라 Baasilica, Cathedral, Chapel, Parish 등 다양하게 불린다. 성당(聖堂)의 한자어를 풀이하자면 ‘성스러운 집’이 되는데 영어 단어로 ‘Heaven(천국)’의 고대어는 ‘Heofon’으로 ‘신(神)의 집’이라고 한다. 성스러움이 신의 모습이라면 성당(聖堂)은 ‘지상의 천국’이라는 뜻도 된다. 천당(天堂/하늘의 집)이라는 표현도 있으나 의미를 확장하여 천국(天國)이라고 부르자. 생각해보니 마을의 소성당은 천당이 되고 대성당을 천국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하느님이 머무는 큰집과 작은집이랄까? 하느님도 참 바쁘시겠다. 그러나 아들이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가시겠다는 의미에서 참 고마우신 분이다. 그런데 큰집과 작은집으로 차별만 안해주신다면야, 차별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지 하느님의 마음은 아닐텐데...
불교로 이해하자면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는 깨달음을 실천하는 곳이기도 하다. 저잣거리도 깨달음의 장소가 되겠지만, 그래도 전문적인 수행터전은 필요하다. 산속에 조성된 우리의 전통 사찰은 지상에서 태어난 인간이 깨달음을 이루는 과정을 그대로 묘사한 곳이기도 하다. 석가모니는 그의 구도(求道)와 가르침을 통해서 인간에서 깨달은 자로 진화된 모습과 그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닮은 수행의 터전을 지상에 설계하였다.
성당의 종류와 이름은 어떻게 정해질까?
하늘과 Heaven의 어원
聖
사찰의 이해(사찰의 구조)
피렌체(이태리) 대성당 바깥을 서성거리며 사진에 담았다. 지상의 천국 밖을 걷고 있는 사바세계의 중생인 우리는 천국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바티칸 씨티의 베드로 대성당의 바깥에서, 나는 바티칸 씨티 주위의 매점(엄청 비쌈)뿐만 아니라 바티칸을 둘러싼 철옹성같은 절벽을 보고 이곳은 고립된 천국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테러의 위협때문인지, 천국민의 가두리 양식장인지...
톨레도의 대성당은 웅장하고 화려하다. 주위를 한 바퀴를 도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피렌체 대성당은 더하다. 바티칸 씨티의 베드로 대성당은 더 더하다. 천천히 둘러본다면 하루로도 모자라다. 그곳들 내부의 장식과 조형물들은 듣던대로 아름답고 화려하다. 아름다움을 탐미하는 우리 인간의 문화유산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거금을 들여 돈 내고 차분히? 보아야 한다. 예술작품을 보는데 이정도 투자는 아깝지 않으니까, 그런데 좀 걷다보면 귀찮다. 고상함이고 뭐고 다리가 아프다. 힘들고 지쳐서 어딘가에서 쉬고 싶다. 종교적 신심으로 시작한 순례자들도 그냥 어디 앉아서 기도하는 것이 더 편하다. 저질체력이 순례자의 신심을 시험한다. 그리고 여기에 왔노라는 인증사진만 찍으면 된다. 여기에 표현된 천국은 과연 누구를 위한 아름다움일까? 내 마음속에서는 반골 기질이 발동한다. 천국의 과시? 하느님 나 좀 봐주소!
톨레도 대성당, 비록 천국이라도 입장이 허가받지 않은 곳이 있다면 과연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일에만 개방한다고 한다. 천국 안의 천국도 쉬어야만 한다. 주일은 거룩해야 하니까,
톨레도 대성당, 우리 예수님과 성모님을 철저하게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동물원도 아니고 이게 뭐람?
오후의 석양, 미미한 달빛의 반사와 함께 드러나는 세고비아 대성당(스페인),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서글프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교회의 세속화를 보는 것 같다. 정신이든 물질이든 규모가 커지면 뭐든지 타락하기 마련이다. 다만 자비심은 예외이다. 톨레도와 세고비아의 대성당을 둘러본 후 규모가 큰 대성당은 찾아다니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 훨씬 조그마한 성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고자 소박하게 노력하는 신자들의 터전이 오히려 지상의 천국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아시시의 성 다미노 성당(이태리)
아미타경에 의하면 죽어서 서방정토에 가게 되면 연꽃에서 태어나 아미타불의 법음(法音)을 듣게 된다고 한다. 마음이 가난한 것과 서방정토의 연화좌(蓮花座)는 무슨 뜻일까? 연꽃은 탁한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맑고 고귀하게 피어난다. 그 잎은 물에 젖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연못을 깨끗하게 정화한다. 그래서 불교에서 연꽃은 번뇌에 찌든 환경 속에서도 그 상황에 물들지 않고 메어있지도 않은 깨달은 생명의 모습을 상징한다. 물들지 않음은 번뇌에 동화(매몰됨)되는 것이 아니다. 메어있지 않음은 그 속에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려면 욕구를 완전히 없앨 수 없다. 그러나 그 욕구로 인하여 탐욕과 분노의 번뇌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불교는 삶 자체를 고통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그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즐기고 있으니 어리석다고 한다. 그래서 어리석음은 든것이 많은 똑똑한 사람들도 태생적으로 갖고있는 번뇌인 셈이다. 피하지 못할 고통은 즐기라고 한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로 삶을 고통으로 본다. 우리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은 이미 삶이라는 감옥의 죄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라는 이분법의 의식 과일을 아주 맛있게 따먹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원초적인 본성, 사랑하는 남녀의 섹스로 생명을 잉태하는 것도 이분법의 파종이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의 섹스는 원하지 않을 것이고 그 행위 자체를 즐기지 않는 사람도 드물다. 따라서 좋고 싫음의 이분법은 편중됨을 일으키는 번뇌의 씨앗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뇌에 메어있지 않는 예수의 처방은 ‘가난한 마음’의 실천이었다. 그것은 살아가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지녀야 할 욕구를 제어하는 마음이고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고 이것이 바로 평상심(平常心)이다. 가난과 부, 성공과 실패, 원수와 아군, 행복과 고통, 좋음과 싫음 등을 모두 평등하게 보는 그 마음의 실천은 채우지 않고 비워내는 마음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 처해있어서도 분노하지 않고 자책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덤덤하고 담백할수 있다면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수행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가난할 것이고 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당연히 지상의 천국이 될 것이다.
선인장 (Cactus) - 에피톤 프로젝트 (Epitone Project)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뼈마디가 꺾이는 고난을 겪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빈궁에 빠뜨려서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하니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그 기국과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입니다.
선인장을 보면 맹자 삼촌의 이 구절이 생각난다. 연꽃과 같은 삶은 엄청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선인장 같은 마음가짐을 단단하게 먹으면 어떠할까? 그런데 그 큰일이라는 것이 사회적 성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이겨내는 것이다. 공자 할아버지가 강조하시는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예로 돌아가는 것, 극기복례(克己復禮)일 것이다. 다만, 걸리는 게 있다. 선인장은 까칠하다. 까칠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맹자 삼촌을 아성(亞聖/아까비 성인)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여행의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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