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대작, 대지의 기둥
작가들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거기에서 영감을 받으면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는가 보다. 빅토르 위고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둘러보다가 성당 돌벽에서 오래전에 새겨진 듯한 글씨를 발견한다. ANATKH. 그리스어로 ‘숙명’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도대체 어떤 사연을 가진 자가 성당 벽에 ‘숙명’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은 것일까.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빅토르 위고는 <노트르담의 꼽추>라는 대작을 썼다고 한다. <Holes (구덩이)>의 저자 루이스 새커도 아주 무더운 날 산책을 하다가, 이런 더위에 사막에서 땅을 파고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한 것이 그 책의 시작이었다고 전했다.
<대지의 기둥>의 저자 켄 폴렛은 유럽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을 보고 난 뒤 감명을 받아서 이 작품을 쓰기로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사실 영감은 누구나 받을 수 있고, 그걸로 작품(소설이건, 그림이건, 조각이건 간에)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도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그걸 씨앗으로 삼아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성당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중심에는 성당이 있다. 하지만 종교나 신에 관한 책은 아니다. 이것은 커다랗고 아름다운 성당을 짓는 일과 거기에 얽힌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성당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한 도시의 사활이 걸린 생명줄이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12세기 영국이다. 왕자가 탄 배가 사고로 침몰하면서 왕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 간에 전운이 감돌게 된다. 아들이 사망하면서 자연스레 딸이 다음 후계자가 되었지만, 그가 여자라는 이유로 왕위찬탈을 노리는 조카가 있었고, 그는 암암리에 자기편이 되어줄 세력들을 모으게 된다. 이 사실을 눈치챈 공주 쪽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녀도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사람을 모았고, 기사들은 양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를 모함하고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지러운 시대상황 속에서도 오직 크고 아름다운 성당을 짓는 일에만 사활을 건 사람들이 있었다. 이 시대에 성당은 단순히 신을 섬기는 종교적 의미만을 지닌 곳이 아니었다. 성당은 한 도시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축물이었다. 성당을 세우려면 백여 명의 건축가와 미장이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까지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이들이 머물 집을 짓느라 마을은 외부로 더 확장되었고,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자연스레 장(market)도 형성되고, 정기적으로 장이 열리니 인구 유입은 더 많아졌다. 사람이 많아지면 세금도 더 많이 걷히기 때문에 마을의 경제력도 커지고, 마을에 돈이 많아지면 그 마을을 관할하는 기사의 영향력도 세진다. 완성하는 데에만 몇십 년이 걸리기 때문에, 일단 성당을 짓기 시작하면 몇십 년 동안 그 마을은 번창 일로를 달리게 된다. 처음엔 작은 마을이었던 곳이 큰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출처: 교보문고
가상의 도시인 작은 킹스브릿지(Kingsbridge)에서 다 허물어져 가던 성당이 불에 완전히 타버리자, 수도원장 필립은 새로 성당을 짓고 싶어 한다. 일단 성당을 지으려면 주교의 허락과 축복을 받아야 하고, 건축가와 석공들을 모아야 한다. 또한 큰 석자재와 목재가 필요하기 때문에 채석장이나 벌목장이 있는 산을 가지고 있는 기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킹스브릿지에 성당이 새로 생기게 되면 그 마을은 번창하게 될 테고, 바로 옆 도시인 셔링(Shiring)은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셔링을 다스리던 기사와 사제들은 어떻게 해서든 킹스브릿지에 성당이 세워지는 걸 막기 위해 애를 쓴다. 과연 가난하고 작은 마을 킹스브릿지의 수도원장 필립은 성당을 지을 수 있을 것인가.
순전히 건축 일을 사랑하며, 자기 평생 최고로 아름다운 성당을 짓는 게 꿈인 건축가 톰, 신심이 두텁고 성격이 올곧은 수도원장 필립, 사랑하는 남자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뒤 홀로 숲 속에서 살아가는 엘렌, 엄마를 따라 평생을 숲 속에서 살았지만 건축가의 꿈을 키우게 되는 엘렌의 아들 잭, 한번 한 약속은 절대로 어기는 일이 없는 대쪽 같은 바톨로뮤 백작, 그와 적이 되어버린 퍼시 햄리 기사, 집안의 몰락으로 온갖 고초를 겪게 되는 알레나와 리처드 남매, 주교가 되고 싶은 야망에 불타는 옆 도시 셔링에 있는 웨일렌 대부제(archdeacon). 이들은 자신들의 꿈과 성공, 야망과 욕망을 위해 서로 싸우고, 얽히고설키며, 속고, 속이고, 방해하고, 그걸 극복하고, 복수하고, 넘어지고, 다시 힘을 모아 일어선다. 여기에 선과 악, 기사들과 사제들의 권력암투, 형제간의 대립, 온갖 역경 속에서도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까지 흥미진진하게 더해진다. 주인공들의 자식 대까지 무려 40여 년 동안 이야기가 이어지는 대작이다.
Source: Goodreads
(드라마로 제작됐기 때문에 드라마 출연 배우들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맨 위 왼쪽부터 웨일렌 대부제, 필립 수도원장, 건축가 톰, 바톨로뮤 백작. 아래에 있는 두 남녀는 앨렌의 아들 잭과 바톨로뮤 백작의 딸 알레나이다.)
길지만 흡입력 강한 스토리
내 경우 영어로 된 책 한 권을 읽는데 대개 2주 정도 걸린다. 좀 짧고 쉬운 책이면 일주일 만에 읽기도 하지만, 대략 300 페이지 내외의 영어 원서는 2주일 정도 걸려 읽는다. 헌데, 이 책 <대지의 기둥>은 게으름 부리지 않고 틈틈이 읽었는데도 다 읽는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작은 글씨의 페이퍼백으로 987 페이지나 됐기 때문이다. 한국어판도 3권으로 번역되어 나와있다.
페이지 수도 상당한 데다가 제목도 뭔가 무거운 이야기일 거 같고, 시대 배경마저 12세기인 역사소설이라 책을 빌려 놓고도 거의 한 달간 책을 펼쳐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읽기 시작하자마자, 이야기 속으로 확 빨려 들어가서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을 읽느라 밤잠도 설쳤고, 잠들 때마다 더 읽고 싶은 마음에 아쉬웠다. 예전에 오프라 북클럽에 추천됐던 책이었는데, 그때 오프라가 한 800 페이지쯤 갔을 때 책이 끝나는 게 아쉬워서 못 읽었다고 말했었다. 나도 딱 그런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읽었던 만큼 마지막 책장을 덮는데 너무 서운하고, 등장인물들과 헤어지기 아쉽고,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책이고(30개 언어로 번역됐으며 총 1400만 부 이상 판매됐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8부작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후속 편에 대한 요청이 많아서 저자가 200년 이후 같은 지역을 배경으로 한 "World without End"라는 소설도 썼다는데, 그건 평이 좀 극과 극으로 나뉘어 있는지라 나도 읽을지 말지 망설이고 있다. 하지만 이 책 <대지의 기둥>은 읽어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다.
40여 년에 걸친 사람들의 이야기인 데다, 성당 건축과 설계에 관한 내용이 앞부분에 나오기 때문에 처음엔 진도가 느리고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면 굉장히 재미있다.
나를 깨우는 책 속 몇 마디
1.
성당 짓는 일을 옆에서 도왔던 건축가 톰은 성당이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한지 알게 됐고, 그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 최고의 솜씨를 가졌던 그이기에 성주의 집을 지어달라거나 성을 보수하는 일자리 제안은 많이 받았지만, 톰은 자기가 주축이 되어 다시 한번 성당 짓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평생에 성당을 지을 기회를 찾을 수 있을까? 이미 지어진 성당을 보수하는 곳은 간간이 있지만, 성당을 처음부터 짓는 곳을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에게 들어온 모든 일자리 제안을 거절하고 성당을 짓는 마을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Tom had been offered the post of builder to the Exeter castellan, repairing and improving the city’s fortifications. It would have been a lifetime job, barring accidents. But Tom had turned it down, for he wanted to build another cathedral.
His wife, Agnes, had never understood that decision. They might have had a good stone house, and servants, and their own stables, and meat on the table every dinnertime; and she had never forgiven Tom for turning down the opportunity. She could not comprehend the irresistible attraction of building a cathedral: the absorbing complexity of organization, the intellectual challenge of the calculations, the sheer size of the walls, and the breathtaking beauty and grandeur of the finished building. Once he had tasted that wine, Tom was never satisfied with anything less. (p. 23)톰은 엑서터 성주에게서 건축가 자리를 제안받았었다. 도시의 성채를 손보고 개선하는 일을 하는 자리였다. 사고를 막는, 평생을 할 수 있는 일자리였다. 하지만 톰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또 다른 성당을 짓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인 아그네스는 이 결정을 결단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일자리를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돌로 지은 좋은 집에서 하인도 부리고, 마구간도 갖고, 저녁마다 고기를 먹으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톰이 그 제안을 거절한 것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성당을 짓는 일이 가지고 있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을 빼앗는 구성의 복잡함, 계산상의 지적인 도전, 거대한 벽들의 크기, 완공된 건물의 숨이 막힐 듯한 아름다움과 위엄. 한번 성당 건축의 맛을 봤던 톰은 다른 건축 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꿈에 그리던 일이 얼마나 좋은지 한번 맛본 사람은 절대로 다른 일을 하며 만족할 수가 없다.
2.
킹스브릿지의 수도원장 필립은 불타버린 성당 자리에 새로 성당을 지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웃 마을인 셔링을 다스리는 사악한 햄리 기사가 이것을 그냥 두고 볼 리 없다. 그는 필립을 방해하고, 자신의 마을에 성당을 지으려고 한다. 성당을 발판으로 삼아 자신의 권위를 늘리려는 웨일렌 주교와 한 패가 돼서 말이다. 모든 건 결국 신의 뜻대로 될 테니, 필립은 기도나 하며 뒤로 물러나 있으면 될까? 아니면 성당이 사악한 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발로 뛰어야 할까?
What could be done? For a moment he was tempted to do nothing. Let Bishop Henry come and look, and make his own decision, he thought. If the cathedral is to be built at Shiring, so be it. Let Bishop Waleran take control of it and use it for his own ends; let it bring prosperity to the town of Shiring and the evil Hamleigh dynasty. God’s will be done.
He knew that would not do, of course. Having faith in God did not mean sitting back and doing nothing. It meant believing that you would find success if you did your best honestly and energetically. Philip’s holy duty was to do all he could to prevent the cathedral from falling into the hands of cynical and immoral people who would exploit it for their own aggrandizement. (p. 424)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말까, 그는 잠시 생각했다. 헨리 주교가 와서 직접 보고 결정을 내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만일 셔링에 성당이 세워질 운명이라면, 그렇게 되라지. 웨일렌 주교가 그 성당을 차지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라지. 그 성당이 셔링 마을과 그곳을 다스리는 사악한 햄리 기사에게 부를 가져다주라고 하라지. 신의 뜻은 이루어질 테니까.
물론 그는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을 믿는다는 건 뒤에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신을 믿는다는 건, 만일 자신이 정직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걸 믿는다는 뜻이다. 성당이 냉소적이고 부도덕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서 그들이 성당을 자신들을 위해 악용하는 걸 최선을 다해 막아내는 것이 필립이 해야 할 성스러운 의무였다.
3.
Then he thought of all the people who depended on him for support, protection and employment: the monks, the priory servants, the quarrymen, Tom and Alfred, the villagers of Kingsbridge and the worshipers of the whole county. Bishop Waleran would not care for them the way Philip did. Waleran seemed to think he was entitled to use people any way he chose in the service of God. Philip believed that caring for people was the service of God. That was what the salvation was about. No, it could not be God’s will that Bishop Waleran should win this contest. (p. 428)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지지와 보호와 일자리를 의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수도사들, 수도원의 하인들, 채석 인부들, 톰과 알프레드, 킹스브릿지 마을 사람들, 이곳의 신자들. 웨일렌 주교는 필립 자신이 돌본 것처럼 그들을 돌봐 주지 않을 것이다. 웨일렌 주교는 신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선택한 어떤 방법으로든 사람들을 마음껏 이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필립은 사람들을 돌봐 주는 것 자체가 신에 대한 봉사라고 믿고 있었다. 구원이란 바로 그런 거니까. 웨일렌 주교가 이기는 것이 신의 뜻일 리가 없었다.
4.
The first casualty of a civil war was justice, Philip had realized. (p. 482)
내전의 첫 번째 희생자는 정의였다는 걸 필립은 깨달았다.
5.
“You know me, and you know my brother; and you’ve chosen Alfred. You know Prior Philip, and you know Earl William; and you’ve chosen William. All I have left to say to you is that you deserve everything you’re going to get.”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형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형인 알프레드를 선택했지요. 당신은 필립 수도원장에 대해서도 알고, 윌리엄 백작에 대해서도 잘 알지만, 윌리엄을 선택했습니다. 내가 할 말은 단지 이것뿐입니다. 알면서도 선택했으니 그 결과도 달게 받아야죠.”
한국어판 제목: 대지의 기둥
원서 제목: The Pillars of the Earth
저자: Ken Follett (켄 폴렛)
특이사항: 미국에서 8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졌음.
Disclaimer) 본문에 실린 인용은 제가 직접 번역한 것으로, 한국에 출간된 번역본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기 때문에 한국 출간본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책을 소개하기 위해 전반부의 줄거리만 일부 제공될 뿐 본 독후감에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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