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자의 눈으로 본 과학의 발전
엑시덴탈 유니버스.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우연히 만들어진 우주(Accidental Universe)"라니. 부제는 또 어떤가.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The world you thought you knew)". 우연히 만들어진 우주는 뭐고,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세상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말일까. 그리고, 그 우주와 우리의 삶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까?
이 책의 저자 앨런 라이트먼은 소설가이자 이론물리학자로, MIT에서 과학과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과학 서적을 낸 것은 물론이고, 여섯 권의 소설, 두 편의 수필집과 한 편의 시집도 낸 문인이다. 과학과 인문학. 얼핏 서로 너무 다른 분야인 것 같지만, 앨런에게는 이 두 개가 모두 익숙한 분야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다른 과학자들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과학에 접근했다. 과학의 발전을 인문학자의 눈으로 본 것이다. 이 책은 여타의 과학 교양서적처럼 과학의 발전이나 새로운 이론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함께 고민하며 얘기하고 있다.
출처: 교보문고
과학자들을 당혹하게 만든 과학
과학자들은 모든 자연현상의 뒤에 놓여 있는 기본 법칙을 찾으려는 사람들이다. 그 법칙만 알아내면 신비로워 보이는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하늘이 파란지, 비가 온 후에는 왜 무지개가 뜨는지, 눈송이는 왜 육각형인지 과학자들은 몇몇의 기본 법칙들에 입각해서 설명할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은 각종 호르몬 이름까지 거들먹거리며 사랑의 감정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 우주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원자에서부터 우주의 블랙홀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에 대한 법칙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한데, 공은 예상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현대의 많은 저명한 물리학자들은 이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우주가 있으며, 우리 우주는 그중 하나일 뿐이라는 ‘다중우주이론(multiverse)’을 주장한다. 여러 실험과 이론 검증을 거쳐서 다중우주이론이 맞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 이론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 여러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중 어떤 우주는 무한하고, 어떤 우주는 유한하며, 어떤 우주는 5차원이고, 어떤 우주는 17차원이다. 어떤 우주는 생명체가 살 수 없고, 어떤 우주는 고등동물이 살 수 있다. 공상과학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런 우주가 수 천억 개나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그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우주 중에서 우리는 왜 하필 ‘지금 이 우주’에 살고 있는가. 과학자들은 그 이유를 설명해내는데 실패했다. 1)
수없이 많은 우주들 중에서 우리가 바로 이 우주에 살게 된 건 명확한 인과관계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당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순전히 ‘우연한 사고(accidental)’다. 다중우주이론으로 인해 (물론 다른 요인들도 있겠지만), 이제 우주의 모든 속성들을 기본적인 법칙과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사라졌다. 우리는 정말 우연히 지금 이 우주에 살고 있는 것이지, 거기에 어떤 과학적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더 이상 ‘과학적’이지 않게 된 것이다.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현대 물리학의 세계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것,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 과학과 종교를 대척점에 놓고, 이 두 부류는 절대 서로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은 과학이 끝내 (겉보기에)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세상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현대 물리학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선봉에 서 있는 것은 바로 ‘양자역학’이다. "[책수다] 과알못이 설명하는 현대 물리학"에서도 설명했지만,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 슈뢰딩거의 고양이, 입자의 이중성 등은 모두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이론들이다.
다시 한번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자면, 불확정성 원리란 "입자의 정확한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알 수 없다"는 걸 뜻한다. 입자가 어느 순간에 어디에서 나타날지 그 확률(probability)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은 국정원에서 동선을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바람난 배우자는 흥신소에서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작은 입자 하나조차도 어느 순간에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우주의 모든 것이 계산되고 예측되며, 이해 가능하다고 믿는 과학자들에게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것이다.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또 어떤가. 독이 든 병이 깨졌을지 안 깨졌을지 모르기 때문에,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살아있는 현실과 죽어 있는 현실 두 개가 공존한다. 상자를 열어서 ‘관찰자’가 존재하기 전까지는 어느 것이 현실인지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너무 ‘비과학적’이지 않은가. 아인슈타인조차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로 ‘확률’에 대해 얘기하는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않았었다.
역시 어제 설명했던 '이중 슬릿 실험(double-slit experiment)'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설명 빼고 핵심만 얘기하자면, 이중 슬릿 실험은 "하나의 입자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했다"는 걸 증명해낸 실험이다. 입자가 '공'과 같다면 당연히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입자가 '물'이라면? 물을 흘려보내면 두 개의 수채 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하나에서 시작한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그 물결은 어느 한 방향(구멍)으로만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실험은 우리의 몸과 온 우주를 이루고 있는 입자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것을 밝혀낸 단초가 된 것이다.
입자가 당구공이나 총알과 같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물이나 빛 같은 ‘파동’이라니. 한 개의 전자 입자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한다니. 이런 ‘비논리적’인 말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2)
출처: 여기
그래서, 우리는 과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렇듯 현대 물리학은 발전을 거듭하면 할수록 점점 더 (겉보기에)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세상과 맞닥뜨리게 됐고, 철학과 종교와 만나는 접점이 넓어졌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온 사람들(특히 서구인들)은 이런 과학의 발견들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천동설을 믿고 있다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닌 한낱 티끌 같은 작은 행성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두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이 사실은 엄청난 속도로 우주를 돌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자신이 신봉하던 모든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렸을 때 그들은 어땠을까. (우리 몸을 포함한) 모든 물질이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고, 현대 기술로서는 아무것도 (입자의 위치와 속도마저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없고, 우리가 왜 '지금 이 우주'에 살고 있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 우리가 믿고 쌓아 올렸던 이성의 탑이 위태로울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과학, 철학, 인문학, 종교, 예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가. 이 책은 그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저자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과학이 아닌 '사람' 안에서 찾으려고 한다.
Why should we drive an hour to visit a friend when we can make a Skype call without leaving our house? Or, even more convenient, send a text message? Why should we stare closely at the stippled skin of a snake when we can take a high-resolution digital photograph and magnify the image by ten? (p. 141)
우리가 집을 나서지 않고도 ‘스카이프’를 이용해서 통화를 할 수 있는데, 아니, 더 편리하게는 그저 문자를 보낼 수도 있는데, 우리는 왜 한 시간이나 운전을 해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걸까? 뱀 피부의 무늬를 관찰하려면 고해상도의 디지털 사진을 찍어서, 그 이미지를 열 배로 확대하면 되는데, 우리는 왜 뱀을 직접 가까이서 관찰하는 걸까?
과학이 계속 발전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왜 다시 아날로그로 회귀하고, 오래된 방식을 고수하는 걸까? 아니, 애초에 과학과 아날로그 방식이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모순이었을까? 과학을 계속 파고 들어가면, 결국 사람이 나오는 걸까?
이 책에 대한 변명
내가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과학 이론들에 대한 얘기를 꺼냈기 때문에 이 책이 어려울 거라고 지레짐작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엄밀히 말하자면 어려운 책이 아니라 불친절한 책이다.
이 책의 주목적이 ‘인류의 과학 발견과 이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과학 이론을 시간과 정성을 들여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않고 있다. 평소에 과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읽는 데 별 무리가 없겠으나, 과학과 담을 쌓고 산 사람이거나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이 기억 너머로 아스라이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라면 진도가 팍팍 나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이해를 돕고자 어제 글에서 과학 이론에 대한 설명을 해드린 거였는데, 그마저도 조금 어려웠나 보다.)
하지만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나 같은 과학 문외한도 이 책을 읽었으니까. 어제 글에서 언급했듯이 내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은 옛날 옛적 대학 때 들었던 교양과목 수업과 두세 권의 과학 서적을 읽은 게 전부다. 이 정도 배경지식만으로도 이 책을 읽고, 이 독후감을 쓰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과학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서 이 책을 잘 읽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면, 먼저 쉽고 재미있게 설명되어 있는 과학교양서적을 한 두 권쯤 읽은 후 이 책을 읽는 것도 좋을 듯싶다.
영어 문법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단어들은 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말로는 다들 잘 알고 있는 '전자, 원자, 핵, 양성자, 중성자, 입자, 궤도' 등 과학과 관련된 단어들이 난무하는데 그 단어들을 영어로 모르면 단어 찾느라 진도를 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혹은 영어를 너무너무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영어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각주
1)
다중우주를 설명하는 이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학적 원리’라는 이론으로 설명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그 이론은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이 우주가 아니라 다른 우주였다면 ‘왜 우리는 다른 우주가 아니라 이 우주에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고등 생명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이 우주’ 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설명을 찜찜하게 여기는 과학자들도 많다. 마치 “왜 우리 엄마는 아빠와 결혼했는가”라는 질문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면 지금 그 질문을 하고 있는 네가 태어나지 못했을 테니까.”라고 답하는 것과 비슷하니까.
2)
혹시나 과학책을 읽거나, 양자역학에 대해서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 간다면 너무 자신을 탓하지 말기 바란다.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라 양자역학이 이상한(?) 학문이라서 그렇다. 양자역학의 거장인 리처드 파인만조차도 “양자 이론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미친 거다.(Anyone who claims to understand quantum theory is either lying or crazy)”, “어느 누구도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I think I can safely say that nobody understands quantum mechanics)”라고 말했을 정도니까.
@leesol 이솔 님께서 그려주신 리처드 파인만 그림.. 어제에 이어 또다시 출연했다. :)
나를 깨우는 책 속 몇 마디
1.
We are an accident. From the cosmic lottery hat containing zillions of universes, we happened to draw a universe that allowed life. But then again, if we had not drawn such a ticket, we would not be here to ponder the odds. (p. 18)
우리의 존재 자체는 ‘사고’나 다름없다. 수 천억 개에 달하는 우주들이 들어있는 뽑기 모자에서 우리가 뽑은 우주는 아주 우연히도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우주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만일 우리가 이 우주를 뽑지 못하고 다른 우주를 뽑았다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로또를 그렇게 사도 당첨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이미 ‘사람이 살 수 있는 우주’라는 로또에 당첨됐으니까. 로또에 두 번 당첨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2.
We scientists are taught from an early stage of our apprenticeship not to waste time on questions that do not have clear and definite answers.
But artists and humanists often don’t care what the answer is because definite answers don’t exist to all interesting and important questions. Ideas in a novel or emotion in a symphony are complicated with the intrinsic ambiguity of human nature. That is why we can never fully understand why the highly sensitive Raskolnikov brutally murdered the old pawnbroker in Crime and Punishment, whether Plato’s ideal form of government could ever be realized in human society, whether we would be happier if we lived to be a thousand years old. For many artists and humanists, the question is more important than the answer. (p. 46)우리 과학자들은 초짜 연구생일 때부터 명확한 해답이 없는 질문에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배운다.
하지만 예술가들과 인문주의자들은 종종 답이 뭔지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재미있고 중요한 질문에는 명확한 해답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아이디어나 심포니에서의 감정은 인간 본성에 내재된 불확실성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것은 우리가 소설 <죄와 벌>에서 그토록 감성적인 라스콜니코프가 왜 고리대금업자 노인을 잔인하게 살해했는지, 플라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정부 형태는 인간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는 건지, 인간이 천년을 살게 되면 과연 더 행복해지는지 절대로 알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예술가와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질문이 답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3.
I can imagine a futuristic “mind-body” experiment: An intelligent person is placed in a soundproof and sealed room, with minimal sensory input from the external world, and asked a series of questions concerning emotional, aesthetic, and ethical issues. Difficult questions. Suppose also that before entering the room, our test subject’s brain is completely examined so that the chemical and electrical state of each neuron is measured and recorded, something that in principle could be done. Then, the puzzle is: Given a very large computer and the known laws of nature, can we predict the person’s answer to each of the questions?
Although I am a scientist myself, I would hope not. I cannot explain exactly why. I do believe that the physical universe is governed completely by rational laws, and I also do believe that the body and mind are purely physical. Furthermore, I don’t believe in miracles or the supernatural. But, like Dostoevsky’s character, I cannot bear the thought that I am simply a piano key, thinking and doing what I must when I’m struck. I want some kind of unpredictability in my behavior. I want freedom. I want some kind of “I-ness”in my brain that is more than the sum of neurons and sodium gates and acetylcholine molecules, a captain who can make decisions on the spot – good or bad decisions, it doesn’t matter. Finally, I believe in the power of the mysterious. Einstein once wrote, “The most beautiful experience we can have is the mysterious. It is the fundamental emotion which stands at the cradle of true art and true science.” (p. 123)미래에 생길지도 모를 “두뇌와 몸” 실험을 상상해보자. 지적인 사람 하나를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방음이 된 밀실에 들어가게 한다. 그리고 그에게 감정적, 미적, 도덕적인 일련의 질문들을 던진다. 어려운 질문들 말이다. 여기에서 하나 더 가정을 해보자. 그 실험대상이 방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두뇌를 완전하게 검사해서,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모든 뉴런의 화학 물질과 전기상태를 측정하고 기록했다고. 그렇다면 문제는 이거다. 우리에게 이걸 계산해낼 만큼 굉장히 큰 컴퓨터가 있다면, 우리는 이미 알려진 자연법칙들을 이용해서 그 사람이 각각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지 예측해낼 수 있는가?
비록 나 자신이 과학자이지만, 그리고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나는 컴퓨터가 그의 대답을 예측하지 못하길 바란다. 나는 물리적인 세상은 이성적인 법칙에 의해 운용된다고 확고히 믿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생각이(두뇌가) 물리적이라는 것도 온전히 믿고 있다. 게다가 나는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책 속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나는 우리가 두드리면 거기에 해당하는 음을 반드시 내야만 하는 피아노 키와 같다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내 행동에 예측 불가능한 지점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자유를 원한다. 나는 내 두뇌가 단지 뉴런과 나트륨과 아세틸콜린의 집합체가 아니라, 그 안에 “나 다움”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바로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장처럼 말이다. 그 결정이 좋건 나쁘건 그건 상관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신비의 힘을 믿는다.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로 아름다운 경험은 신비이다. 신비야말로 진정한 예술과 진정한 과학의 요람에 서 있는 가장 근본적인 감정이다.”
4.
Experiments in the first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conclusively showed that all matter has a “wave-particle duality,” sometimes acting like a particle and sometimes acting as a wave. (p. 135)
20세기 초중반에 이루어졌던 실험들은 모든 물질이 “파동-입자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보여줬다. 즉, 모든 물질이 어떤 때는 ‘입자’처럼 행동하고, 어떤 때는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이중성’이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모든 물질’이라는 말도 중요하다. 이 말은 곧,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컴퓨터도, 핸드폰도, 그리고 심지어는 당신의 몸도 모두 때로는 ‘입자’처럼 움직이지만 때로는 빛이나 물처럼 ‘파동’으로 움직이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니까.
5.
저자가 딸과 딸의 친구들을 만나서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딸과 딸의 친구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This disembodied existence is their reality. (p. 142)
이 형체 없는 존재가 그들에게는 현실이었다.
현실과 가상의 차이는 무엇일까.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만이 진짜인가. 특수한 안경을 써야만 경험할 수 있는 가상현실은 가짜인가. 직접 만나지 않고 카톡으로 대화하는 것은 진짜 대화일까, 가짜 대화일까. 목소리만 들리는 전화는? 얼굴까지 보이는 화상통화는 어떤가. 내 스팀잇 블로그는 가상현실일까, 진짜 현실일까. 내 글들은 모두 인터넷이라는 형체가 없는 공간에 있다. 내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나의 글들. 그것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자칫 직접적인 경험만이 진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의 눈과 귀로 직접 경험하는 것들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X-ray나 적외선, 자외선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빛들, 너무 높거나 낮아서 사람의 귀로는 듣지 못하는 소리들,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원자들,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는 우주와 천체.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이것들은, 특수한 안경과 현미경, 망원경을 써야만 보이는 이것들은 모두 가짜인가.
양자역학은 우리가 생활하는 현실에서는 만질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원자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다룬다. 하지만 그것을 가짜라고 부르지 못하는 이유는 이 양자역학이 아주 작은 원자들의 세계에서는 현실 그 자체인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질 수도 없고 실체도 없는 인터넷 공간 역시 패러다임을 바꿔 들여다보면 그 나름대로 ‘진짜’ 세계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인터넷 공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것도 아니면 가상현실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스팀잇이라는 블로그가 주는 소통의 경험은 굉장히 ‘인간적’이고 ‘직접적’이라는 것이다.
한국어판 제목: 엑시덴탈 유니버스
원서 제목: The Accidental Universe
저자: 앨런 라이트먼 (Alan Lightman)
출판사: 다산초당
특이사항: 저자는 소설가이자 이론물리학자로, MIT에서 과학과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Disclaimer) 본문에 실린 인용은 제가 직접 번역한 것으로, 한국에 출간된 번역본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기 때문에 한국 출간본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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