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teem [늙어감에 대하여-저항과 체념사이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안녕하세요 수채화 그려드리기 @raah입니다.
오늘은 비가 와서 또 그림을 못그렸네요...

아직 젊은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우리 늙음에 대해 얘기해봐요 ^^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대하여] ISBN: 9788971996379
본 포스팅은 이런 내용입니다.
. 장 아메리와 [늙어감에 대하여]

  1. 저항과 체념 다섯가지
    1. 살아있음과 덧없이 흐르는 시간.
    2. 낯설어 보이는 자기 자신
    3. 타인의 시선
    4. 더는 알 수 없는 세상
    5. 죽어가며 살아가기
  2. 서평: 죽음, 삶이 생각할 수 없는 것
  3. 죽음은 나쁜 것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셀리 게이건 ISBN: 9788901152219


[이하 '다나까!' 주의]

1. 장 아메리 [ 적에게 맞아죽지 못한 전사의 '늙어 죽어가기']

경륜, 존경, 품위, 편안함과 여유 혹은 내세의 영원한 약속 같은 것으로 늙어감과 죽음을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피상적이거나 통속적인 위안을 단호히 거부하고 일체의 형이상학도 거부하면서 낡고 주름지고 통증을 수반하는 자신의 몸과 사회적 눈초리, 그리고 나의 소멸로 이어지는 완전한 종말에 대한 직접적이고 확실한 까발리기가 가장 객관적인 통찰이라 여기는 장 아메리의 생각이어가기노동이다.

한스 차임 마이어는 27살에 조국을 등진다. 유대인혈통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갖은 모욕을 안긴 세상과 싸우기로 결심했다. 레지스탕스에 가입하여 온 몸이 부서져라 나치스에 저항했다. 치욕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며 당당하게 싸우다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힌다. 탈출하여 다시 처절하게 지하투쟁하다 다시 붙들렸다. 모진 고문으로 뼈가 으스러졌다. 다시 2년간 수용소를 전전하다. 독일 패망 후 가까스로 삶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브뤼셀에 정착하여 문화부 기자로 일하며 글쓰기에 전념하며 정갈한 인생을 살았다. 1978년 예순 여섯살에 고향 잘츠부르크 호텔방에서 준비한 수면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상이 장 아메리의 삶이다.

죽음을 두려워 않고 싸운 투사, 그러나...

그는 젊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감옥에서도 수용소에서도 용감할 수 있었다. 아마도 현실을 직시하며 죽음을 당연한 미래로 그대로 수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죽음]등 자신의 글에서 모진 고문이나 수용소 등, 자신의 체험을 직접적으로는 다루지 않는다. 되도록 개인적 차원의 경험은 절제하고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작가의 안간힘과 철저함이 느껴진다.

어차피 썩어 문드러질 것이 삶이지만, 잠시라도 존엄에 빛나는 삶을 원한다면 몸이 아니라 정신을 갈고 닦을 노릇이다. 이 책 [늙어감에 대하여]는 이를 위한 좋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역자 글.

그러나 그도 늙어 죽음이 다가오는 시기에 죽음과 늙음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고찰해 보게 된다. 죽음이 ‘살아있는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철학적 통찰이 있었지만 싸구려 통속에 남은 삶을 기대기에는 그의 정신이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치열하게 죽음이 무엇인지 이성을 쏟아 파헤친다.

죽음에 대한 모든 타협을 폭로하고 통속을 짓밟아 버리는 그의 글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허위와 싸구려 위로 안에 안주하려는 나약함을 떨쳐버리게 한다.
죽음을 알 수는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죽음 언저리에 늙어감이라는 추함을 똑바로 인식하면서 살게 해 주는 글이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우아한 체념, 황혼의 지혜 따위 말로 위로하는 것은 굴욕적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싸구려 위로에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이 매줄 써내려갈 때마다 굴뚝같았지만 이마저도 포기했다. 치욕스럽지만 피할 수 없다고 둘러대는 것은 모순일 뿐이다. 그 모순을 헤쳐 나가는 길이다. 1968. 장 아메리

2 . 저항과 체념 다섯 가지.(내용요약)

1) 죽음은 그 어떤 것이라는 모든 실체성에 대한 총체적 부정이다.

죽음은 다가가는 게 아니다. 죽음은 한마디로 無이기 때문이다. 그 완벽하고 돌이킬 수 없는 와해. 그 어떤 미래의 의미도 부정한다. 죽음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지 않는다. 죽음은 나의 탈공간화라는 모순된 사건에서 말 그대로 나의 파괴이다.
집과 차를 자랑하던 이웃이 어느날 심장마비로 '즉시 공간에서 들어내‘ 진다.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도 갖지 못한 그보다는 내가 더 많은걸 경험했다. ...하지만 후회가 많다. 내 인생의 의미는 곧 무의미이다. 그저 뭉쳐진 시간덩어리이다. 현실은 과거의 가능성을 깨끗이 씻어 버렸다. 정작 다루고 싶었던 실체는 더는 주무를 수 없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

살아낸 시간, 그것이 그이 재산이자 그의 독특함 자체이다. ‘세계내 존재’, 공간이라는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로써 나는 아직 내가 아니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단지 세계를 상대로 한 싸움과 유희를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A는 감방에서 의젓했다. 예상된 결말을 별다른 두려움 없이 마주보았다.

자신이 실제로 존재하며 현실의 일부라는 점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조롱거리가 된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자 안간힘을 썼기 때문이다. ...

덧없이 흐르는 시간 가운데 살아있음의 무의미함 때문에 매일 광기의 언저리로 내 몰리는 사람만이 위안을 필요로 한다. 이 광기는 우리 모두가 품은 가짜 물음 즉 ‘인생의 의미’라는 문제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운 ‘존재물음’의 유일한 답이 아닐까.
이런 탐색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 결국 무의미하다는 탐색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은 시간과 현실에서 걍 누군가로 살아간다.

상처는 시간이 해결하지만 이제 더는 시간이 아니다. 물론 시간감각은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에 대해 성찰한다는 것은 전혀 자연적이지 않다.
모든 상처의 치유가 기만이었음을 깨닫고 경악한다. 치유할 수 없는 마지막 상처,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수 할 없어 입는 마지막 상처가 있다.
갈수록 다른 사람들이 낯설고 그냥 시간을 내버려두고 있는 사람들이 힘겹다.

2) 낯설어 보이는 자기 자신- 통증

늙음을 통해 아픈 사람은 거울을 보거나 산을 오를 때 “이게 나야?” 라고 묻는다. 거듭 세상이 자신을 거부하는 적이 되어버렸음을, 자신을 떠받들고 있던 몸이 그 자체로 짐인 몸통이 되었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젊은 시절을 이미 살아버린 사람의 깊은 내면, 깊은 내면에는 여전히 자아탐색과 자아중독이 지배적이다. 본래적 심경변화는 거기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회는 치통과 생각의 혼란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무심하게 등을 돌릴 뿐이다.

그가 사회에 순응해야한다. 이런 현실이 자아에게 미치는 영향은 우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슬픈 현실은 이 ‘강요된 자아’가 결국 ‘자아’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 늙어감이라는게 고통으로 경험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몸 자아, 통증을 느끼는 몸 자아가 사회와 겪는 모순에서도 나타난다.

3) 타인의 시선 -누가 관심 갖을 까

자신의 소유를 늘려온 사람은 불현 듯 사회가 그에게 내린 판결, 사회적 연령을 받아들여야한다. 기업회장은 실질적 경영권을 물려주었고, 저명한 교수는 지적 능력에서 이미 젊은 조교에게 추월당했다. 이들은 젊은이의 떠받듬을 받으며 이미 주어진 역할을 연기할 뿐이다.

소유사회에서 .늙은이는 추해진다. 허약해진다. 이것들은 미워하고 얕잡아 보는 것들일 뿐이다.

이런 부정적 표현은 사회가 수행하는 ‘늙어가는 사람의 파괴’ 혹은 ‘없애버림’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사회에 의해 파괴되는 것은 오로지 ‘아무것도 아님’ 혹은 ‘없음’이라는 표시를 이마에 달고 다니는 사람일 뿐이다. 그 표시는 몸의 쇠락이다.

  • 젊은이가 늙은이를 바라보는 부정할 수 없는 반감, 아마도 이 반감은 아무것도 아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없음은 있음, 곧 존재로 밀고 들어왔다.

4) 더는 알 수 없는 세상

늙어가는 사람은 자기 영향력에서 점점 멀어지는 ‘시대의 표시’를 이해하기가 아주 어려워진다.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 생철학. --모든 것이 허망하게 사라진다, 진리다.
늘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 진리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어디로 빠져나간 다는 말인가? 표시도 체계도 없는 세계, 공허한 세계 곧 안티 우주로?
영원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태도보다 더 낫지도 나쁘지도 않은 하나마나한 말이라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는다.

흐린 날 수평선이 사라진, 표시가 없는, 잿빛 바다의 영원함을 들먹이는 것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영원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함’으로 부정된 따름이다. 문화적 사건을 영원함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늙어가는 사람에게 위로를 주기는 한다. 그러나 이 위로는 모든 자기기만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자기기만이다.

시간에 저항해서도 안 되며, 시간의 꽁무니를 따라다녀서도 안 된다. 이게 진리다.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빠져나와 영원함을 붙들 출구가 없다는 것도 진리다. 그런 영원함은 ‘없음’, 無 이기 때문이다.

5) 죽어가며 살아가기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함’ 블라디미르 얀케레비치의 [죽음]
죽음을 두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상념이 남을 뿐이다. ‘나는 죽으리라 죽는 것은 나이리라 나는 죽게 되리라 죽은 것은 나이리라 내가 죽으리라’ 죽음에 대한 생각은 병적 장광설이 된다. ...그러면 늙어가는 사람은 ‘죽음으로 나아감’을 생각하리라.

우리는 거듭 죽음은 만인앞에 공평하다고 하지만 죽어가는 과정에서조차 평등하지 않다.
죽음, 너의 가시가 어디에 있느냐? 가난한 자는 이 물음에 정확히 답을 준다. 양로원에, 난방되지 않는 열악한 요양원에서 가난한 환자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복도에서 불편한 몸을 질질 끌어야 한다.

내가 존재하면 죽음은 없다. 죽음이 왔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지식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죽음을 말하는 모든 주관적 진술은 논리 문제를 가진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진술에서 나를 나 진신으로부터 들어내어, ‘나의 없음’을 객관적 사실로 바라보는 한, 다시 말해 살아있는 자의 관점에서 나의 죽음을 바라보는 한, 나는 죽음을 논할 수 없다.

‘나는 존재한다’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내 안에 머물러 존재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 나는 존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죽은 나는 없다. 이 무슨 기막힌 모순인가?

인간은 자신이 사라진 세상은 떠올릴 수 있어도 자신의 없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할 수는 없다. 이게 바로 인간 실존의 근본 상황이다. 자신의 실존은 결정적 순간에 세계 그 자체다.

얻는 것 없는 통찰이지만 멀리서 정체를 알수 없는 덧없는 그림자를 알려주기는 한다.
죽음은 그 어떤 긍정적인 것도 가지지 않는 부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절대적 부정을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이해한다.

죽음의 경계를 넘어 피안에서 살아가리라는 생래적 믿음에 잡힌 사람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시도 즉 죽음을 생각하려는 시도를 중단할 수 없다. 무의식에서는 우리는 누구나 불멸의 생명을 자랑한다는 프로이트의 말은 맞다. 그러나 생물집착이 아니라 ‘죽음을 생각할 수 없음’일 따름이다.

더더욱 젊은이는 이를 생각지 않는다. 늙음이 나타날 때 비로서 죽음 언저리를 더듬어 본다. 무엇보다 ‘어떻게’ 죽는가가 중요하다.

아름다운- 적에게 맞아 죽기

젊었을 때는 죽음이 밖에서 올수 있었다. 적에게 맞아죽는 죽음보다 더 아름다운 죽음이 있을까? 지금 내 내부에서 쇠락하는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두리라. 그토록 원하던 산소는 더 허락되지 않으리라. 거부된 호흡의 자유로 나의 모든 자유는 박탈당한다. 어떻게든 숨을 쉬려 안간힘을 쓸게 틀림없다. 죽어가는 두려움을 갈수록 정확히 알게 되리라.

죽음에 다가갈수록 우리는 더 죽음의 불안에 휩싸여 그것을 모면하려는 무망한 싸움을 한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도 삶을 부정하는것도 가능하지 않다. 어떤 대안도 없다.
편집적인 전위시나 읊을까? 죽음으로써 죽음을 피해볼까? 무작정 앞만 보고 살아야 할까?

늙어가는 사람은 매 순간 그 정황이 요구하는 시간 감각에 자신을 맞추는 균형감각을 빚어내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물론 죽는다 그러나 아직은 시간이 있겠지. 그게 잠깐일 지라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길거야” 그렇게 거짓말 타협을 하면서 살아간다.

젊어서 죽고 싶지 않는 사람은 늙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하나마나한 이 말의 그 헛헛함이 진리로 다가온다. 나이 먹는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부정인 ‘존재하지 않음’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그 어떤 위로도 발가벗겨지고 마는 황량한 삶의 지대가 ‘늙음’이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말아야한다. 세계가 사라지고 시간만 남은, 내면만 덩그러니 끌어안은 의미가 된다. 이제 우리는 죽어감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저 겸손을 강요받고 굴종하여 늙어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남은 날들은 쪼그라들며 메말라 비틀어지리라.

2. 서평: 죽음, 삶이 생각할 수 없는 것

죽음은 그 어떤 것이라는 모든 실체성에 대한 총체적 부정이다.

죽음은 다가가는 게 아니다. 죽음은 한마디로 無이기 때문이다. 그 완벽하고 돌이킬 수 없는 와해. 그 어떤 미래의 의미도 부정한다. 죽음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지 않는다. 죽음은 나의 탈공간화라는 모순된 사건에서 말 그대로 나의 파괴이다.

아메리의 죽음에 대한 체념과 저항 사이의 줄타기는 선명하고 틀림이 없다. 모든 모호함에 저항한다. 그러나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그의 생각하기는 우울하고 비참할 따름이다.

살아있음과 덧없이 흐르는 시간.

시간 그 허무. 모든 게 시간과 더불어 훅 불려 날아가듯 사라져 버린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가 ‘살아낸 시간’일 뿐이다. 시간에 대한 물리학, 생철학, 비합리주의, 현상학의 사유유희를 안다. 정의내리고 공식으로 말하는 이 시간과 공간? 이게 다 무엇인가?
이런 시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비웃는 것이 ‘시간’이다.

죽음에 다가가면서야 우리는 시간을 떠올린다. 우리는 늙어가며 시간을 발견한다.

당시 우리는 강의 좌안에서 싸르트르, 붉은장미 함께 새 시대를 맞으려 했다. 그러나 시절은 의도와 다르게 흘러왔다.
늙은 사람은 자기 안에 쌓인 시간을 인생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온다. 죽음은 그를 공간에서 통째로 들어낸다. 그래서 늙어가는 사람은 다만 시간일 뿐이다.

몸이 세계를 금지시키는, 그래서 심술궂을 정도로 몸에 집착하도록 강제하는 그 '늙음' 탓에 사람은 결국 그 무엇도 아닌 ‘몸’ 즉 죽어가는 껍데기가 되고 만다

이 껍데기를 뒤집어쓴 늙은 사람은 안으로부터 발가벗겨지며, 이 껍데기를 자신과 상관없는 외부라 느끼고 임박한 죽음에 몸서리친다.

  • 파리를 여행하는 50대의 남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투명인간이다. [타인의 시선]
    노인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마에 ‘없음’, ‘아무도 아님’의 딱지를 붙이고 다닌다.

얼굴 반점, 근본적으로 아무런 역겨움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한다. 사회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사회적 자아이기 때문이다.

  • 시간에 저항해서도 안 되며, 시간의 꽁무니를 따라다녀서도 안 된다. 이게 진리다.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빠져나와 영원함을 붙들 출구가 없다는 것도 진리다. 그런 영원함은 ‘없음’, 無 이기 때문이다. [더는 알 수 없는 세상]

죽음을 두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상념이 남을 뿐이다. ‘나는 죽으리라 죽는 것은 나이리라 나는 죽게 되리라 죽은 것은 나이리라 내가 죽으리라’ 죽음에 대한 생각은 병적 장광설이 된다 [죽어가며 살아가기]

그의 죽음에 대한 치열한 고찰은 무의미하고 오히려 삶을 살아가야할 모든 존재들의 현재를 어지럽힌다. 통속에 물들어 생각 없이 사는 것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야 얼마든지 옮다. 비록 현실이 아닐지라도 내세의 영원에 기대어 살겠다고 ‘모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믿음을 갖거나 말거나 그들에게 비웃음을 보내는 것 또한 학자의 자세이리라.

‘죽음 이후에는 내가 없다’라는 모든 논리는 논리적 모순임은 맞다.

그러나 논리 이전에 자명한 사실이 있다. 책을 읽을 모든 독자와 말을 할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어쨌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삶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삶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진리이다. 죽은 후에 삶이나 의미가 있고 없고는 사실 우리 상관할 바 아니다. 내가 사라진 후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의미 없는 허무와 실존에 매달릴 이유는 없다.

삶과 죽음을 함께 사용할 때는 모순이 발생하지만, 그저 죽음을 등 뒤로 던지고 삶을 이야기 할 때 무슨 모순이 있겠는가. 그것을 기만이라 말하는 것은 교만이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생각의 길이 어디를 들러 통하든 그 종착역은 ‘죽음’이 아니라 어떤 ‘의미’ 이거나 ‘행복’이어야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인식하는 존재가 체념과 불행까지 스스로를 몰고 갈 이유가 무엇인가. 그 역시 생각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함이다.

  1. 죽음은 나쁜 것인가

셀리게이건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가 같이 고찰했다.
죽음이 앗아가는 것들-박탈 이론/

죽음은 왜 나쁜가. 영생은 좋은가?

만약 죽음 후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지옥에 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없다. 내가 없는데 무엇이 내게 나쁠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이 나쁜 것은 오직 살아있는 남겨진 사람들에게다. 이별이기 때문이다. 친구가 광속 우주선을 타고 100년간 여행을 간다. 이륙 후 20분만에 폭발해 버렸다면 후자는 무언가 더 슬프다. 즉 죽음은 이별 이외에 더 나쁜 일이라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죽어가는 과정의 고통을 두려워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죽음의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죽고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죽음을 나쁘다고 말하는 직접적 원인이 아닐까? 비존재는 당연히 나쁜가? 그런데 당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떻게 무언가가 당신에게 나쁜 것이 될 수 있는가?…죽음이란 무엇인가 301p
박탈이론- 비존재는 결핍, 즉 상대적으로 나쁜 것이다. 결핍된 것은 ‘삶’이다. 삶이 주는 모든 것이 결핍된 것이다.

죽음은 ‘언제’ 나쁜가-에피쿠로스의 입장/

박탈이론의 반론- 죽음이 나쁜 것이라면 그 시점은 언제인가? … 월요일에 내가 존을 쏴다. 그런데 수요일에 내가 죽고 금요일에 치료받던 존이 죽었다. 나는 ‘언제’존을 죽였을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찾아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든 죽든 죽음과는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에피쿠로스

미래 우리가 존재 하지 않을 때도 무언가 우리에게 나쁜 것일 수 있다면, 과거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는 어떨까? 원치 않는 임신으로 중절수술로 태어나지 못한 래리에게 동정심을 느껴야 할까? 그렇다면 더 나아가 지난 50년간 수정되지 못해 태어나지 못한 생명의 수는 대략 300만명의 10억10억10억배이다. 그들에게도 동정심을 느껴야 한다. 존재요건을 포기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쁜것이라고 말하려면 수천억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삶을 박탈당한 비극을 안타깝게 여겨야 한다.

존재요건을 온건하게 바꿔서 잠깐만이라도 함께 존재했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해보자. 지난주에 죽은 열 살짜리 소녀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 직관에 반하는 면을 발견할 수 있다. … 100년은 괜찮지만, 40년 밖에 살지 못했다면 나쁜 것이다. 10년 밖에 살지 못했다면 더 나쁘고, 1년은 더더욱 나쁘다. 마찬가지로 1일 1분은 더더욱 나쁘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은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렇다면 아무런 나쁠 것이 없다. 뭐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계속 더 나빠지다가 마지막 1초를 없애니 나쁜 것이 사라지다니. 존재요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내가 ‘없던’ 과거, 내가 ‘없을’ 미래-루크레티우스의 경우

루크레티우스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으로 죽음만이 아니라 생존 이전도 제시한다. 죽음이 우울하면 태어나기전 영겁의 시간도 우울해야 하지 않을까? 그 차이는 뭘까? 탄생 전에는 상실할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죽음으로는 삶을 상실하게 된다. …그럼 조금 더 늦게 죽는 것이 좋다면, 더 일찍 태어나는 것은 좋은 것인가? 대부분 늦게 태어난 것이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더 길어진 삶이 아니라 단지 ‘더 이른’ 삶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더 일찍 태어나 더 많이 산다면’ 어떨까 하는 문제에도 그저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만 말한다. 큰 고통이 따르지만 수술 후 고통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수술이 있다면 당신은 지금 수술을 받은 상태이기를 바라는가? 받기 전이길 원하는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고 미래다.

죽음이 왜 나쁜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해결이 안 되고 있다. 그럼에도 박탈이론, 삶의 선물을 누릴 수 없기에 나쁜 것, 이것 말고는 이유가 없다.

한 동안 우울했지만 이제 그 생각은 마치고 싶다.
에피쿠로스 말대로 ‘삶에는 죽음이 없다.’ 나는 오늘을 생각하는 것이 살아있는 자의 현명한 선택이다. 해는 맑고 땅은 건강하다. 죽음을 생각하는 자는 그가 학자이든, 세속자이든, 염세주의자이든 모두 대지의 어둠을 탐하는 ‘달’일 뿐이다. 니체는 달을 비웃었다. 태양은 스스로 오늘 생명을 내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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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어요...소심하고 성질 더러운 뉴비가 상처받고 포기하지 않도록
오늘도 ..리스팀 을..^^~~ 또 뵈어요.


보팅소녀 이미지는@cheongpyeongyull 님이 그려주신 작품입니다.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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