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작은생각] 그대는 화폐를 아는가?-철학자, 계몽주의자 유시민을 '디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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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지금껏 프로크루스테스였습니다. 불쌍한 희생자를 침대에 누이고 침대가 모자라면 남는 만큼 팔다리를 잘라내고, 남으면 그만큼 망치로 두들겨 폈습니다. 끔찍한 일이죠. 이런 만행(?)이 처음 얼마간은 가능했습니다. 인간은 대체로 금단의 약속=공리에 맞게 자기이익에 의해,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인간의 비합리적 행위는 예외적 소수였기에 경제학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하면 그 뿐이었습니다. 자선과 기부, 여성들의 가사노동이 대표적 희생자입니다..."

장면 1: 헤르메스 씨가 몸담고 있는 학교 한 켠의 정수기 위에는 유니세프 로고가 박힌 투명한 아크릴 재질의 모금함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커피, 녹차, 코코아, 사탕 따위가 담겨 있는 네모난 바구니가 있죠. 어떤 사람이 함께 나누고픈 차나 사탕 따위를 바구니에 기부하면, 그것을 먹거나 마시는 사람은 모금함에 성의껏 동전을 집어넣습니다.

장면 2: 뉴기니 동쪽에 있는 섬들에는 ‘쿨라’라는 풍습이 있습니다. ‘바이과’라는 두 종류의 조개 껍데기를 일정 기간 보유했다가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는 이 풍습은 섬들을 고리 모양으로 연결하여 이루어지는데, 그 길이가 수백 km에 이른다고 하네요. 사람들은 바이과를 갖고 있다가 1∼2년 내에 다음 상대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두 종류의 바이과가 시계 방향과 시계 반대 방향으로 영원히 섬들의 고리를 돌고 돕니다.

장면 3: ‘스티미아’에서 헤르메스 씨의 하루하루는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이곳에서는 담벼락에 글을 쓰면 사람들이 읽고 앞에 있는 유리 지갑에 깜냥껏 돈을 넣습니다. ‘계약’이라는 풍습이 지배하던 ‘코리아’ 출신의 그로선 때로는 10분 동안 끄적거린 푸념 수준의 글 값이 코리아 돈으로 5만원, 머리를 싸매고 오랜 시간 힘들게 쓴 글 값이 50원으로 매겨지기도 하니 난감할 밖에요... 게다가 오늘 아침엔 코리아 돈 100만원에 해당하는 거금과 쪽지가 아무도 모르게 유리 지갑에 들어 있습니다. “새로 이사 와서 힘들 테니 일단 써요. 나중에 깡통이 차면 제가 알아서 회수해 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2주 전, <긴급 토론>을 보는 내내, 저에겐 ‘마음 속의 가시’ 같은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정재승 씨는 의외로 뭉툭했고, 유시민 씨는 지나치게 날카로왔으며, 김진화 씨는 난데없이 뾰족했고, 한호현 씨는 예상대로 존재감이 없었지만, 저의 불편함은 그들의 태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주 <썰전> 이후 암호화폐에 대한 유시민의 태도는 가일층 ‘계몽주의적’으로 변했습니다. 그의 계몽주의적 태도는 “엔지니어들은 화폐를 정확히 몰랐다”는 한 마디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말 한 마디에 전국의 이과생들은 분개하고, 전국의 문과생들은 내심 환호했겠죠? ^^::

다른 한편으로 암호화폐가 집중화된 권력을 부수고 부의 분산이라는 기적을 행할 성배가 되리 믿는 이상주의자들은 눈에는 그의 태도가 20세기 꼰대의 전형으로 보였을 겁니다. 반면, 암호화폐를 흙수저 탈출의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는 2030들을 어서 빨리 구원해야 할 코인충 쯤으로 연민(멸시)하는 도덕주의자들의 눈에는 그가 십계명을 들고 시나이 산을 내려오는 모세로 보였을지도 모르죠.

여기에서도 제 불편함은 문과와 이과, 이상주의자와 도덕주의자를 불필요하게 갈라놓은 유시민의 고압적 태도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위악적일 만큼 단호한 태도는 선한 의지에서 출발한 의도적인 ‘액션’, 일종의 메시아니즘일 수도 있으니까. ‘내가 욕을 먹더라도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청년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제 불편함의 근원은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왜 ‘질문해야 할 질문을 질문하지 않는가?’ 긴급토론과 썰전의 등장인물들은 외견상 입장이 제각각이었으나 정작 해야할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정확히는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했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함부로 파기해서도, 의문조차 품어서도 안 되는 금단의 약속. 그것을 그들은 ‘공리’라 부릅니다. 그들의 대화에서 질문되지 않은 채 은폐되어 있던 질문, 즉 ‘공리’는 두 가지입니다.

1. 인간은 자기이익을 추구하는가?

공학자답게 존재감 없을 만큼 무색무취한 ‘선의’에서 나온 발언이었지만 한호현 씨의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왜 자기이익만 추구한다고 생각하죠? 인간의 행동 동기에는 ‘선의’도 있습니다.” 한호현 씨의 이 발언에 맞선 ‘난데없이 뾰족한’ 김진화 씨의 발언이 손석희 씨의 제지 속에 묻힙니다. “인간의 행동이 자기이익에서 출발하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수학적 예측이 가능한가요? 그걸 할 수 있다면 누구든 진작에 노벨상을 탔을 겁니다.”

스치듯 지나간 바로 이 발언에 비밀의 열쇠가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자기이익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예측 가능하다.”라고 포장되어 있지만 이면에는 “인간의 행동이 수학적으로 예측 가능하려면, 자기이익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는 진의가 은폐되어 있다는 겁니다. 기하학에 비유하자면 ‘다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n-1)도가 되려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여야 한다.’고 말하는 격입니다. 보통사람의 언어 감각으로는 앞뒤가 바뀐 개소리(!)에 가깝지만, 수학자 출신이 유독 많은 근대 합리주의 철학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논리적 요청’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이름으로 포장해서...

이에 대해 유시민 씨 역시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에 쫓긴 사회자의 제지도 있었지만 그 역시 경제학자이고 경제학 역시 수학적(=객관적?) 예측을 위해서는 공리가 ‘요청’되기 때문이겠죠. (물론 유시민의 경제학이 그렇다는 듯이지 모든 경제학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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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은 합리적으로 행동하는가?

질문되지 않고 은폐된, 자기이익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을 이해했다면 두 번째는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합리성, 적어도 김진화 씨와 유시민 씨가 생각하는 ‘서구적 합리성’은 수학적 비례성에 근거합니다. 합리성이라는 뜻의 영어 ‘rationality’가 비율를 뜻하는 ratio에서 파생한데서도 알 수 있듯, 경제학에서 ‘합리적 인간’이란 ‘수학적 비례에 맞게 행동하는 인간’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1000원짜리 생수를 사면 1000원을 지급하는 정도의 ‘제 정신’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역으로 1000원짜리 생수에 100만원을 지급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정신 나간’ 행위이기에 경제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의미죠.

또 한 번 여기에서도 ‘논리적 요청’이라는 만병통치약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행동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예측 가능하다.”라는 공리 속에는 “인간의 행동이 수학적(=객관적?)으로 예측되려면 합리적이어야 한다.”라는 진의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경제학자야, 나는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고 싶어. 그러니 인간의 행동은 합리적인 것, 수학적 비례에 맞는 것이어야 해.”라는 학자의 욕망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경제학은 지금껏 프로크루스테스였습니다. 불쌍한 희생자를 침대에 누이고 침대가 모자라면 남는 만큼 팔다리를 잘라내고, 남으면 그만큼 망치로 두들겨 폈습니다. 끔찍한 일이죠. 이런 만행(?)이 처음 얼마간은 가능했습니다. 인간은 대체로 금단의 약속=공리에 맞게 자기이익에 의해,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인간의 비합리적 행위는 예외적 소수였기에 경제학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하면 그 뿐이었습니다. 자선과 기부, 여성들의 가사노동이 대표적 희생자입니다.

문제는 세월이 흐를수록 수학적 공리에 맞지 않는 예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욕망이 다양해지고 ‘자기이익’으로는 정의될 수 없는 동기들이 늘고, 그에 따라 수학적 비례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비합리적’ 행동 또한 함께 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하룻동안 생존하는데 필요한 영양소의 총량은 당연히 측정 가능합니다. 하지만 개개인이 먹고자 하는 각기 다른 메뉴, 끼니마다 달라지는 음식의 가치를 측정하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편의상 전자를 ‘욕구need’, 후자를 ‘욕망want/desire’이라 한다면, 인류의 발전에 따라, 전자 대비 후자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를 인정하고 대상을 소비함으로서 얻는 ‘주관적 만족도’ 즉 욕망의 충족도를 따지는 ‘효용’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이 또한 수량화할 수 없는 것을 수량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주관적 만족도를 측정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측정하고 싶다, 지배하고 싶다(아는 것은 힘이니까!)’는 욕망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그들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라는 침대를 동원합니다. ‘특정한 상대주고받는 것만을 대상으로 삼자’고 논리적으로 요청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사탕을 바구니에 넣음으로써 불특정한 상대에게 주고, 사탕을 먹은 어떤 사람은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동전을 모금함에 넣어 다른 불특정한 상대(알 수 없는 빈국의 어느 어린이)에게 주는 우리 학교 학생들의 ‘주고 주는’ 행위는 ‘주고 받는’ 교환이 아니기에 비경제적 행위로 잘려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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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2에 소개한 ‘쿨라’의 경우 ‘주고 받는’ 행위이긴 하나 주는 대상과 돌려받는 대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잘려나갑니다. 파레토라면, 순서에 따라 주는 대로 받기 때문에(=행위자가 받는 대상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선호도를 측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잘라냈겠죠. ‘원시적’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

스티미아의 경제는 어떤가요? 각자의 담벼락과 유리지갑을 매개로 글을 써서 주고 동전을 받으니 경제적 행위로 인정해야 마땅합니다만, 문제는 경제학자의 기대와 달리 예측 가능성과는 거리가 먼, 비례에 맞지 않는, 비합리적인, 정신 나간 행위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세상에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특정한 대상에서 만족을 얻지 않고 주고 받거나, 주고 주거나, 받고 주거나, 주고 돌려 받는 과정자체에서 만족을 얻는다는 겁니다. 경제학자들에겐 지옥이죠. 미친!

유시민 씨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암호화폐를 고안한 엔지니어들은 화폐를 몰랐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믿었고, 잘못된 믿음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전파했다. 따라서 사기다.”
“암호화폐는 화폐가 아니다. 화폐는 내재적 가치를 가진 것인데, 암호화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유시민 씨는 (엔지니어들과 달리) 화폐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우리가 대체로 합의할 수 있는 화폐의 정의는 ‘행위자가 주관적 만족을 얻고 담고 전달하는 매개 수단’일 것입니다. 그것은 ‘매개 수단’이라는 점에서 본질상 언어와 동일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언어가 생각의 수단이라면, 화폐는 주관적 만족 즉 욕망의 수단이라는 점 정도겠죠. 하지만 이렇게 정의내리는 정도로는 언어가 무엇인지, 화폐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언어와 화폐는 ‘매개 수단’, 뭔가를 담아서 전하는 그릇과도 같은 다시 말해 ‘텅 비어 있음’을 본질로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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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어 있다니... ‘개’라는 단어에 담겨진 의미가 없다고? 그렇지 않죠. 언어는 의미로 항상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서 ‘텅 비어 있다’는 말은 ‘채워져 있으나 그 내용물이 항상 바뀐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개는 ‘귀여움’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뒤에 ‘새끼’가 놓이고 사람에게 쓰이면 욕설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 면에서 언어가 ‘내재적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은 넌센스입니다.

1000원이라는 화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들에게는 하찮디 하찮은 가치이지만, 빈국의 어린이들에게는 훌륭한 한끼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 큰돈입니다. 또 그런 곳에서 당장 병들어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치료약 한 알을 살 수 있는 가치, 목숨의 가치, 즉 무한대의 가치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화폐가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는 주장 또한 넌센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항상 내용물이 바뀌는데 우리는 어떻게 언어와 화폐라는 매개체를 큰 불편 없이 사용할까? 차라리 그 내용물을 고정시켜 놓으면 좀더 명확하고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백과사전을 만들기 했고(백과전서파), 의미가 객관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는 언어는 학문의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주장(논리실증주의자)도 했죠.

화폐의 경우, 끊임없이 출렁이고 이러저리 떠다니는 속성을 붙잡아두기 위한 준거로서 금을 사용하기도 하고, 노동력의 양을 끌어다 쓰기도 하고, 효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고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어와 마찬가지로 그 모든 노력은 여지없이 실패했습니다.

그러한 기나긴 실패의 과정 끝에 나온 깨달음. 그것은 언어나 화폐 같은 매개 수단(넒은 의미의 기호들)이 담는 각각의 내용은 함께 사용되는 다른 언어나 화폐와의 관계, 그것이 사용되는 상황과 맥락에 의해 (=정황적으로)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외국인이 1만원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1만원으로 ‘빅맥’을 몇 개 사먹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면 됩니다. ‘빅맥’이 가치의 준거로 사용하는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그와 나와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공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1스팀은 4800원쯤 돼.”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편의를 위해 ‘원화’를 공통된 욕망의 척도로 삼기로, 그리고 그것을 국가가 강제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욕망보다 스팀 공동체에서 얻는 욕망이 더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200만원의 월급을 손에 들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이번 달엔 150스팀파워를 벌었군.” 그 스팀파워로 열심히 좋은 글에 보팅을 하고 그 결과, 좋은 작가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삼는다면, 욕망의 공간이 가상 공간이고 그 수단이 암호화폐라는 이유로 비난 받을 이유는 없는 겁니다. 같은 돈을 손에 쥐고, “야~ 이걸로 야구 글러브 10개는 살 수 있겠어~”하는 야구쟁이와 다를 바 없으니까.

이제 글을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요약하겠습니다. 인간은 자기이익이 아니라 주관적 만족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만족의 추구는 (합리적인=비례에 맞는) 교환 행위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증여, 배분, 기부, 전달 심지어 파괴 행위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화폐”라는 주장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논리적 필요에 따라 요청’될 수는 있어도 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모든 기호가 그렇듯 화폐는 내재적 가치를 지니지 않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기에 화폐일 수 있습니다. 내부가 텅 비어 있기에 우리는 거기에 제각기 다른 욕망,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욕망을 담고 전달하고 전달 받는 것입니다.

계몽주의자로서 유시민이 가진 선의는 이해합니다. 무의미한(=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는) 암호풀이를 통해 생성된 코인이 아무런 용도(=내재적 가치)도 없이 공동체의 합의와 무관하게 투기의 수단으로 쓰여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트코인에 투영된 욕망과 그 욕망을 실현하려는 행위는 비트코인이라는 화폐 자체와는 분리되어야 합니다.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규제는 행위 자체를 대상으로 해야지 그것의 매개 수단 전체를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특정 언어로 반사회적 메시지가 유포된다고 해서 그 언어의 사용 자체를 막거나, 그것이 언어임을 자의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맺으며

저는 철학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철학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는 뜻이라면 아니고,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면 감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유시민이라는 인물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철학자로서의 헤르메스’는 ‘계몽주의자로서의 유시민’에 대한 존경만큼은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성의 빛으로 미몽을 부순다면서 정작 자신의 인식론적 사각지대는 돌아보지 않은 계몽주의는 오늘날 저에게 반성과 청산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헤르메스가 유시민을 디스(dis-respect)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제가 나눌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보팅, 댓글, 리스팀, 팔로우 등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이든 헤르메스의 날갯짓을 더 힘차게 만듭니다. 헤르메스의 보람은 더 많은 사람들과의 나눔이니까요.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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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eversloth 님의 스팀파워 지원으로 쓸 수 있었습니다. 대역폭 제한으로 힘겨워 하는 뉴비에게 산타 할아버지처럼 몰래 스팀파워를 지원해 주고 가신@eversloth 님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로 보답하고 얼른 돌려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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